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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늘을 푸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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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푸는 방법

- 김종춘 목사(www.dreamel.com 운영자) 

우리가 쉽게 외우는 주기도문에 난제가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기 전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먼저 사해야 한다. 눅11:4는 더 엄격하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이쯤 되면 주기도문을 하기가 만만치 않다. 마음에 맺힌 것이 있고서는 할 수 없는 게 주기도문이다. 마음이 맺히면 만사가 맺힌다.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흘러가야 한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닫히고 맺히고 묶인 마음이다. 내 마음이 풀려야 하늘도 풀린다. “...남을 용서하라. 그리하면 하나님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너희가 남을 헤아리는 대로 하나님도 너희를 헤아릴 것이다”(눅6:37-38, 새번역).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이 맺히고 마음이 맺히면 환경도 맺히고 하늘도 맺힌다. 우리는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고 남의 허물을 용서해야 한다. 죄 없는 자만이 남을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죄 없는 자는 아무도 없다. 아니, 우리 죄가 더 크고 많다. 주인한테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다 탕감을 받았다. 그러면 자신한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는 빚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빚을 안 갚는다며 동료를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듣고 주인이 대노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주인은 크게 노하여 그를 형리에게 넘기고 빚진 것을 다 갚게 했다. 너희도 진심으로 형제를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18:33-35, 새번역). 우리는 더 죄를 짓고도 남한테 엄하고 더 용서받고도 남한테 용서를 베풀지 않으려고 한다.

1929년 광주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그 여파가 평양신학교에도 미쳤다. 신학생들도 반일시위를 벌였다. 그 때 “목사가 될 신학생들이 무슨 시위냐”며 호주 장로교 소속의 왕길지 선교사가 반대했다. 그러자 “우리 민족의 비극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학생들이 왕 선교사의 퇴진을 요구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왕 선교사는 학생들에게 사과하며 용서를 구했다. 그래도 학생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당시 평양신학교 교장이었던 나부열 선교사가 중재에 나섰다. 학생들을 전부 강당에 모아놓고 타일렀다. “왕 목사님은 우리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어른입니다. 어른이 잘못했다고 사과하는데 용서하는 것이 학생들의 도리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화해하고 시위는 그만둡시다.” 그러나 학생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차례 대화를 가졌지만 갈등만 커졌다. 마지막으로 나부열 교장이 입을 열었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군요.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다 졸업 후 목사안수를 받고 목회하겠지요. 그러나 주기도문은 못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학생들이 조용해지자 나부열 교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왕 목사님의 사과를 받고 용서하면 주기도문을 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주기도문을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은 해야지요.” 교장은 지혜롭게 말했고 학생들은 드디어 소요를 그쳤다.1)

나의 죄가 얼마나 크며 그래서 내가 받은 용서가 얼마나 큰지를 아는 자는 남을 정죄하지 않으며 남을 용서할 것이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교통법규 위반자만 있다. 딱지를 떼인 위반자와 딱지를 피한 위반자다. 딱지의 유무와 상관없이 다 교통법규 위반자다. 죄도 마찬가지다. 들킨 죄인과 들키지 않은 죄인이 있을 뿐이다. 우리 자신의 허물을 살피면 남을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어찌하여 네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네 형제에게 ‘내 형제여, 내가 그대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어주겠소’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라. 그래야 네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될 것이다”(눅6:41-42, 새번역).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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