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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철학은 복음에 이르는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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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교회 김명혁 목사의 교회사 이야기(11)

-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담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신앙과 신학에는 여러 가지 색깔이 있다.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보라색’이 있고, 열정적이고 배타적인 ‘붉은색’이 있고,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파란색’이 있다.

북 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에서 형성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보라’ 색깔의 신학을 주창했고, 로마에 뿌리를 두고 북아프리카 칼타고에서 형성된 라틴 학파는 열정적이고 배타적인 ‘붉은’ 색깔의 신학을 주창했으며, 예루살렘에 뿌리를 두고 수리아의 안디옥에서 형성된 안디옥 학파는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파란’ 색깔의 신학을 주창했다.

초대교회에 형성된 다양한 신학의 색깔들 중에서 먼저 알렉산드리아에서 형성된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보라’ 색깔의 신학의 내용과 특성을 살펴본다. ‘보라’ 색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다양한 색깔들을 각각 바로 이해하는 것이 기독교를 종합적으로 폭 넓게 이해하는 길이다.

“철학은 복음에 이르는 하나의 준비”

‘신앙과 이성과의 관계’에 대해서 다양한 입장들이 이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 나타났는데,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양자와의 관계를 ‘연속적’이고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보았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클레멘트(150-214)는 희랍 철학에 대해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것은 단순한 철학적인 취미에서 비롯한 것이기 보다는 알렉산드리아의 지식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하나의 ‘목회적’ 동기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학습 교인을 도우려 할 때 그들이 희랍인일 경우 학구적 탐구를 멀리 하여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했다.

클레멘트는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몽학 선생이었던 것처럼(갈3:24), 희랍인들에게는 철학이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한다고 했다. 희랍인들에게 있어서 철학은 복음에 이르는 하나의 준비라고 했다. 희랍 철학은 영혼으로 하여금 예비적 정화작용을 받게 만든다. 그리하여 신앙을 받아드리기에 필요한 훈련을 받게 하고, 이 신앙의 토대 위에 진리가 지식의 건축물을 세워올릴 수 있도록 만든다고 했다.

“희랍 철학이 진리를 전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하고, 주님의 명령을 수행할 힘이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제하게 만들고, 인격을 개선하고, 진리를 받아드리도록 준비시키므로, 그 최고의 가르침에 이르도록 준비하게 한다.”(Stroma., I,80). “희랍 철학은 영혼을 예비적으로 정화시키고 신앙을 받아드리도록 훈련시킨다. 그 기초 위에 진리가 지식의 건축물을 세워올릴 수 있게 한다.” (Stroma., VII,20).

틀레멘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희랍(스토아) 철학의 로고스 사상을 받아드리면서, 자연과 인간 전체에 퍼져있는 소위 ‘산출적 로고스’에 참여하고 이에 따르면, 아브라함이든 모세든 소크라테스든 모두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클레멘트는 또한 이교에서 신앙으로 옮겨가는 첫째 종류의 변화가 있고 다시 신앙에서 지식에로 옮겨가는 둘째 종류의 변화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 지식은 사랑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즉시 아는 것과 알려지는 것과의 사이에 친교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고 했다.

“사회, 문화, 도덕적 삶은 영적 삶에 이르는 준비”

‘복음과 문화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양한 입장들이 이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 나타났는데,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양자간의 관계를 ‘연속적’이고 ‘종합적’인 관계로 보았다. 클레멘트는 양자간의 갈등을 그저 무시해 버리지도 않았고 지나치게 극단화 하지도 않았다. 클레멘트는 기독교 신앙과 희랍 문화를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고 서로 ‘보충’하고 ‘완성’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즉 클레멘트는 사회, 문화 질서가 요구하는 도덕적 삶을, 영적 삶과 모순 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영적 삶에 이르는 ‘준비적’ 단계로 본 것이었다.

클레멘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먼저 그 사회에서 도덕적으로 존경을 받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영적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한다.

터툴리안이 재물을 악한 것으로 본데 비해 클레멘트는 재물 자체가 반드시 악한 것은 아니고 재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악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부는 우리가 그것을 유용하게 쓰면 그것은 유용한 것이 된다. 유용하지 못하게 쓰면 유용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무도 부를 파괴할 것이 아니라 부에 대한 영혼의 욕망을 파괴하여야 한다. 영혼의 욕망은 부를 옳게 쓰는 것과 조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은 물질 자체를 버리라고 하시지 않았고 물질을 잘못 사용하는 것을 버리라고 하셨다. 그것은 영혼의 연약성과 욕망이다. 이와 같은 욕망 안에 부를 소유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치명적이며 따라서 부를 잃는 것은 찬양할만하다.” (“부자의 구원”).

이와 같은 클레멘트의 해석은 그리스도의 요구와 문화적 요구를 조화시켜 당시 부자들이 안고 있던 딜렘마를 해결 시키려 한 시도였다고 하겠다. 클레멘트는 주장하기를 예수님이 부자에게 요구한 것은 문자적으로 물질 자체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초연하라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물질을 너그럽게 사용함으로써 사랑의 법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부자일지라도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초연하여 가난한 자의 필요를 도울 수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했다. 후세의 수도원 주의는 이와 같은 클레멘트의 타협적 입장을 잘못된 것으로 판단했고, 미국 개신교의 “부의 신학”(thdology of wealth)은 클레멘트의 입장을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클레멘트는 그리스도인이 사회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지혜에 늘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공공 사회 생활에 참여하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고 했다. 터툴리안이 공중 사교 목욕탕에 가는 것이 죄라고 단정한데 비해, 클레멘트는 공중 사교 목욕탕에도 건강과 청결의 목적으로 가는 것은 좋다고 했다. 터툴리안이 “레슬링 같은 운동은 마귀의 노름이라”고 일축해 버린데 비해 클레멘트는 레슬링이 여자들에게는 적당치 않으나 남자들에게는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위해 좋은 운동이라고 말했다.

신학은 항상 그가 처한 역사, 문화적인 상황에 따라서 가지 각색의 색깔을 띈 신학을 산출한다. 우리는 여러 가지 색깔에서 기독교의 보다 폭넓고 종합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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