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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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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근 목사(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서울이수중앙교회 담임)

나는 얼마 전 벤디에르라는 사람이 쓴 ‘요새의 함락’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거기에서 벤디에르는 자신이 겪은 경험담 하나를 소개하고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 비행기 조종사인 벤디에르는 B-17기를 타고 독일의 카셀이란 도시를 폭격하던 도중 나치군이 쏘아대는 대공포에 그가 탄 비행기의 연료 탱크가 명중됐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연료 탱크가 폭발하지 않은 것이다. 벤디에르는 조마조마하게 돌아와서 연료탱크를 조사해 보았더니 무려 열 한발이나 되는 탄환이 연료 탱크에 명중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연료 탱크가 폭발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놀라운 기적 같은 일인가? 하도 신기해서 수거한 탄환을 병기창에 보내 조사해봤더니 그 탄환 속에는 화약이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 11개 중에 한 탄환 속에 돌돌 말아서 집어넣은 메모지가 한 장 들어 있었다. 종이를 펴서 읽어보니 체코 말로 “친구여, 당신들을 괴롭혀서 미안하오. 나는 이러한 전쟁을 원하지 않소. 우리 모두 나치 정권이 망하길 기도합시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한 자비로운 크리스천 독일 병사 덕분에 전쟁의 비극에서 구출된 주인공이 감격스러워 하는 모습을 접할 수 있어, 대단히 기뻤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슬퍼지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에서 복음의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능력을 폭발시키지 못하는 오늘의 한국교회의 안타까운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숱하게 쏘아대는 설교가 성도들의 심령 속에 박혀 명중하는데도 폭발하지 않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바울 사도는 로마서를 쓰는 서두에서 복음을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말은 익히 들어 왔지만, 하나님의 복음이란 말에는 생소하다. 바울이 여기에서 복음을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언급한 까닭이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 구원의 계획을 하나님이 세우시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기 때문이다. 복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가슴에서 나와서 듣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기에 우리가 복음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우리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게 된다. 우리들의 두 눈은 하나님을 향해서 열리게 된다. 우리들의 입술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유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하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임이로다(롬 11:33)”

하나님의 그 깊은 마음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여 주시는지, 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셨는지. 우리가 제 아무리 연구해 보아도,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하나님의 그 깊은 심정을 헤아릴 길이 없다. 그래서 바울은 그저 입을 딱 벌리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세 무궁토록 영광 돌릴찌어다 아멘”하고 찬양할 뿐이었다. 우리도 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님의 뜨거운 가슴에서 나온 은혜임을 알게 된다면, 바울처럼 하나님을 향해서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울은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노라(롬 1:15)”라고 말한다. 복음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아닌가?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라(롬 15:20)”고 말한 일이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세운 터에 나는 세우기를 원치 않는다”는 원칙을 밝힌 바도 있다. 그러한 바울이 오늘은 자신의 원칙까지도 무시해 가면서 이미 다른 사람이 세운 로마교회, 그것도 예수를 잘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렇게도 간절히 복음을 전하길 원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면 죽게 될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기를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는 원수들이 결사대를 조직해 놓고 자기 생명을 노리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로마로 가는 복음 전도의 길을 열기 위해서였다.

그토록 바울이 생명을 걸고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길 원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바울은 사도들이 중심이 되었던 예루살렘교회나, 바나바와 자기가 중심이 되었던 안디옥교회 보다 앞으로 로마교회의 사명이 더 지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로마는 세계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로마교회가 바로서야 교회가 바로 설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로마교회가 생명력을 가지고 역사하고 세계선교의 비전과 열정으로 불붙어야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로마교회는 이미 믿음의 순수성과 선교의 열정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갓 태어난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교세계라는 망망대해에 일엽편주처럼 가냘퍼 보였다. 바울은 로마서 13장 13절 이하에서 “너희는 낮에와 같이 단정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고 있다. 이들은 교회에는 열심히 다니고 있었지만, 겉보기에는 꽤 열심히 주님을 믿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직도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지 못하고, 여전히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로마교회 교인들을 향해서 “너희는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실정은 어떤가? 오늘날 한국교회에 생명의 복음이 있는 것인가? 주님의 구원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 나타나고 있는 것인가? 왜 한국교회가 성장이 멈추고 침체기에 접어들게 된 것인가? 왜 갈수록 복음이 이 땅에서 외면당하고 있는 것인가? 참 이상한 일이다.

오래된 교회일수록, 그리고 대교회일수록 복음이 죽어버리기 쉽다. 이런 교회들은 첫사랑의 감격을 이미 상실한지 오래다. 십자가의 피가 말라붙어 버렸다. 겉보기에는 화려하고 거창해 보이는데, 복음의 메시지가 힘을 잃어가고 있다. 은과 금은 넘쳐 나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실종되어 버렸다.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조사해 보면, 그들 대부분이 예수 믿은 지 오래된 사람들이라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왜 갈수록 신앙이 무기력해지고, 활력이 없어지는 것인가?

교회에 오래 다니다 보면, 이상하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부 반응이 쌓여가게 된다. 자신의 신앙관과 구미에 맞는 설교를 하면 은혜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신앙관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거부해 버리는 경향성이 생긴다. 우리가 예수를 오래 믿고 신앙의 관록이 붙게 되면 실상은 잘 알지 못하면서도 ‘나는 다 안다’는 식의 태도가 생기기 십상이다. 십자가 설교를 해도 감동도 없다.

이렇게 마음이 굳어지고, 자기 생각에 빠져버리게 되면, 신앙이 죽어 버린다. 꼭 탕자의 형인 큰아들 같다. 그는 동생이 여러 해 동안 집을 떠나 거지가 되어 돌아왔는데도, 기쁘지 않다.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고 기뻐하며 잔치 자리를 배설한 아버지를 향해서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하늘을 찌른다. 큰아들은 집을 떠난 일이 한번도 없었다.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었으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그렇게도 모른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동생에 대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도 없다. 그리고 자기 의와 공적 사상으로 가득 차 있다. 꼭 오늘의 한국교회 교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실로 교회 안에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할 사람, 고질병을 고쳐야 할 사람들이 예상 외로 너무나 많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은 아닌가?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은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한 번 깨어져야 하겠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그 굳고 단단하고 교만한 마음이 다시 한 번 녹아져 내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희망이 없다.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은 구원의 감격을 상실해버리고, 주님에 대한 불타는 첫사랑을 상실해 버린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복음전도에 대한 열정도 꺼져가고 있다.

나는 일본교회의 모습을 보고 남의 일같이 느껴지지를 않았다. 200년 복음을 전했는데 그리스도인이 1%도 안된다. 그것도 점점 줄어가고 있다. 교역자의 70% 이상이 60세 이상이다. 젊은 교역자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복음을 다시 듣지 않는다면, 한국의 기독교도 그런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로마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다시 전하길 그렇게도 원했으며, 로마교회 성도들이 다시 한번 깊은 잠에서 깨어나 복음의 불길이 되어 타오르게 되길 소망했던 것이다. 그 일을 위해서 바울은 “내가 로마에 있는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한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기 위함이다(롬1:11)” 고 말했던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이루길 원하시는 그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나를 통해서 하시길 원하시는 그 일이 무엇인가? 그 일이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소명의 불이 불타올라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복음이 능력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비로소 하나님의 권능이 내게 임하게 되고, 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를 통해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바울은 로마교회가 감당해야 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했는가? 바울은 그들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했다. 바울은 로마교회를 통해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길 원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한국교회가 어떤 일을 하길 원하시는 것인가?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일 거라고 생각하나? 지금 한국교회는 구원의 감격을 상실해 버리고, 주님과 교회에 대한 첫사랑의 감격을 상실해버린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이러한 한국교회가 다시 들어야 할 복음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회개해야 한다. 다시 한 번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깨어져야 한다. 다 안다고 생각했던 교만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린 아이같이 겸손해져야 하겠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어서 아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알고도 행할 줄 모르는 우리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거듭 거듭 계속해서 똑같은 말씀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왜 모르는 것인가? 왜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예수를 믿게 하고, “나를 따르라”하시는 것인가?

“이 일을 위해 주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이 사명을 다 하기 위해서라면 내 생명이라도 내놓겠다” 이렇게 불타는 마음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인가? 이러한 불타는 마음이 있어야 내가 산다. 한국교회가 산다. 이 민족을 살릴 수가 있다. 이 때 주님의 일이 내 일이 되고 내 일이 주님의 일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소명의 불이 붙어야 내 마음이 뜨거워지고, 지혜가 생기고, 사랑의 불이 붙고, 성령의 권능이 임하게 된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지혜가 주어지고 권능이 임해온다. 그럴 때, 나는 구원의 능력이 되고, 진리의 기둥이 되고, 의와 진리의 실천자가 될 것이다. 나를 통해서 복음이 증거 되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서 로마교회가 복음을 다시 듣길 원하셨다. 그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모두를 향해서 복음을 다시 듣고, 첫사랑의 감격을 회복하라 하신다.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이 너희를 통해서 이 땅에 밝히 나타나게 하라 하신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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