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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 해를 보내며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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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정현 목사 (사랑의교회)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지금 끊임없이 차오르는 질문은 한국 교회의 현주소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20세기 초만 해도 한국 교회는 사회의 버팀목이었고,사회를 이끌어가는 존경 받는 곳이었다. 비록 숫자적으로는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2%도 되지 않았지만 사람을 가르치고 병을 치료하며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교회가 가장 앞서 나갔다.

내가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는 비가 새는 초라한 교회였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교회를 폄하하지 못했다. 당시 10명,20명,100명이 모이는 작은 교회라도 세상의 비신자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교회의 영광이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교회의 성장은 정체 상태이며 점점 더 반기독교적인 사회정서 속에서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 결과 1907년 평양대부흥이 일어난 이후에 한국 교회가 가졌던 권위와 영향력은 점차 위축되었고 이제는 교회가 오히려 사회의 짐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아픔과 수치를 당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이유로 교회가 사회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다고 해도 주님의 교회만이 이 사회의 유일한 소망의 터전임을 믿어야 한다.

한국 교회가 다시금 주님의 몸된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서 지켜야 할 것과 품어야 할 것이 있다.

지켜야 할 것은 한국 교회의 혈맥 속에 흐르는 ‘순교적 영성’이다. 신앙의 선배들이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심지어 일제시대의 잔혹한 핍박 가운데서도 신앙의 정체성을 갖고 수천년간 내려오던 민족종교를 100년 만에 바꿔버렸던 것도 복음의 능력으로 무장된 순교적 영성에서 비롯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늘날 교회가 힘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교회가 마땅히 지켜야 할 순교적인 영성 대신에 세속의 관료주의가 교회의 뿌리까지 스며들어 나무의 등걸처럼 굳어버린 데 있다. 철야기도 할 때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던 사람이 갑자기 당회만 들어가면 정치꾼으로 바뀌는 것이라든지,교회에서는 누구보다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이 사회에서는 사기꾼으로 손가락질 받는 것은 모두 신앙의 관료주의에서 비롯된 삶의 이중성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된 이원론 때문에 한국 교회가 얼마나 힘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모른다. 참으로 직분보다는 소명으로 일해야 한다.

이처럼 한국 교회가 힘을 잃고 비틀거리게 된 것은 주기철 목사님처럼 순교적 영성을 지키기 위해 시대의 쇠못을 밟고 지나가는 용기를 잃어버린 데 기인한다.

교회가 신앙과 삶의 이중성이라는 두꺼운 껍질을 깨고 20세기 초 한국 교회가 가졌던 역동성을 회복하는 길은 우리 앞에 놓여진 시대의 쇠못을 밟고 지나가는 데 있다.

교회가 지켜야 할 것이 순교적 영성이라면 교회가 품어야 할 것은 ‘시대를 보는 비전’이다. 촌음을 다투며 급변하는 세상에서 교회가 세상의 뒷다리만 잡고 끌려간다면 이미 교회는 시대적인 소명과 생명력을 상실한 것이다.

세상이 정신 없이 질주해도 교회는 미물의 움직임조차 놓치지 않으면서 전체를 조망하는 독수리의 눈처럼,세상의 흐름을 직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의 흐름을 꿰뚫는 ‘글로벌루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Glocal)이라고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이것을 뛰어넘어 세계를 뜻하는 글로벌(Global)과 혁명을 뜻하는 레볼루션(Revolution)이 합쳐진 글로벌루션(Globalution)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이것은 기존의 모든 사고와 행동체계를 뛰어넘는 완전히 새로운 문화적 세대의 등장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세계적으로 12세에서 25세까지는 지역적으로는 다르지만 문화적으로는 인터넷 통해 완전히 하나가 되어버린 괴물 같은 세대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상하이 뉴욕 서울 도쿄에 있는 청소년들과 런던 터키 이스탄불 LA에 있는 12∼25세 세대들이 생각하는 양태나 수준,문화스타일이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태생적으로 지역(地域)에 바탕을 둔 정부나 사회는 이들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전세계적으로 하루 밤낮의 차이도 없이 동시화되고 있는 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책임지고 감당할 곳은 우체국 학교 병원보다 많이 세워져 있으면서 세계 곳곳에 신경망처럼 뿌리내린 교회밖에 없다.

또 하나 교회가 성경의 살아있는 권위를 통해 품어야 할 것은 우리 사회의 양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보수와 진보이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가 가난한 자,소외된 자,약한 자,상처 받은 자에게 관심을 두는 대신에 오히려 가진 자,있는 자 사이에서 기득권층을 형성하는 것처럼 비쳐지고 있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교회가 사회를 복음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에 대한 인식부터 달라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초대교회처럼 섬김과 자기 희생의 회복을 통해 사회의 심장부로 달려가야 할 것이다.

항해를 하던 배가 갯벌에 좌초되었다면 그 좌초된 배를 어떻게 끄집어낼 수 있을까? 내려가서 진흙을 묻히면서 힘을 쓰고 애를 써도 어떻게 해 볼 수 없다. 진흙만 더 묻힐 뿐이다. 그 갯벌에 박혀 있는 배를 끄집어 내는 길은 딱 하나밖에 없다. 은혜의 밀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다. 예비된 성령의 생수를 경험해야 한다(요 7:37∼38). 교회가 다시금 순교적 신앙으로 무장하고 시대를 보는 눈을 통해 섬김과 자기 희생을 교회의 안팎으로 넘치게 한다면 다시금 교회는 민족을 품고 새 시대를 향도하는 선교적 소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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