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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죽을병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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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근 목사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서울이수중앙교회 담임)

인생이란 고난을 통해서 연단됩니다. 다이아몬드는 처음에는 석탄 조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석탄 조각이 오랫동안 강한 압력을 받게 되면 다이아몬드가 되어 나오는 겁니다. 속인과 성인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지속적으로 강한 압력을 믿음으로 견디어내느냐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욥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 23:10)고 한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고난의 풀무 속에서 연단 하시는 것이 자신을 검은 석탄으로 두지 않고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되게 하기 위한 그분의 크신 사랑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6-7)라고 말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만일 요셉이 애굽에 팔리지 않고 아버지의 품 안에만 있었더라면,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큰 인물이 작은 유대 땅에서 검은 석탄으로 인생을 끝낼 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다이아몬드가 되기 바라셨습니다. 그러자면 오랫동안 압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물이 없는 깊은 우물인 사지에 빠뜨리게도 하시고, 애굽에 종으로 팔리게도 하시고, 감옥에 갇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석탄처럼 쉽게 타버리고 말 인물이 아니라, 다이아몬드같이 영원히 빛날 인물을 만들기 위해서 요셉을 그 길고도 험난한 고난의 학교에 입학시켰던 것입니다.

한 번은 성녀 테레사 수녀가 "주여,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는 말씀을 읽다가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라면 병들었어도 고쳐주셔야지, 어떻게 사랑하는 자를 병들게 하시나이까?" 하고 물었더니 "얘야, 나는 본래 사랑하는 자에게 고난을 많이 준단다."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병도 안 걸리고, 모든 인생 고(苦)에서 벗어날 수 있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얼마나 원하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잘 되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우리들의 현실이 아닙니다. 아담을 통해서 이 땅에 죄가 들어온 이래로 인간은 수고와 고통, 질병과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인간을 연단하시고 한사람 한사람 구원의 역사를 계속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자를 고난 가운데 두시기도 하고, 병들게도 하시며,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고난에서부터 탈출을 시도합니다. 요11장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탈출구가 있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했겠나이다.” 마르다는 오라비인 나사로가 죽은 것은 예수님께서 여기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동생인 마리아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아서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고, 고난의 원인을 과거로 돌리려 했습니다.

그리고 고난의 책임을 미래로 떠넘기려 해서도 안됩니다. 마르다 자매는 여기에서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아나이다."하고 말합니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현재의 고난을 망각하게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현재 주어진 고난이 잠시 잊어버린다고 해서 그것이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술 한잔한다고 해서 잠시 잊을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고난을 잊으려고 과거 속에 묻어두거나, 미래로 미루면 안됩니다. 지금 찾아온 고난과 정면으로 맞서 믿음으로 싸워야 합니다. 미국의 작가 C. S. 루이스가 쓴 "악마의 편지들" (The Screwtape Letter)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지옥의 악마 스그류테이프가 인간을 하늘 나라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두 가지 전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으로 한편으로 과거로 돌아가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공상의 세계에 머물게 함으로써 현재의 고난과 용감하게 싸우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왜 나에게 이처럼 무서운 고난을 주셨을까? 이 고난을 주신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이 고난을 통해서 당신께서 나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고난이라면 그것은 필요해서 주신 것이지, 필요도 없는데 주실 이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의 눈에서 결코 불필요한 눈물은 흘리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고난은 우리를 축복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의 고난을 과거 탓으로 돌리던가 아니면 내일로 미루게 함으로써, 그 고난을 현재 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축복으로 보지를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하는 그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만사형통을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악마의 함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유럽의 청년들에게서 보았습니다. 유럽에서는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쉬운 곳입니다. 자기가 대학을 가기를 원하면 누구나 갈 수 있습니다. 학비도 없고, 교통비도 없고, 병원도 모두가 다 공짜입니다. 17세가 되면 부모와 독립해 혼자 살 수 있습니다. 담보 없이도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집을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청년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야말로 만사형통인 셈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똑똑히 보고 왔습니다. 대부분 유럽의 젊은이들은 무력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극히 소수의 젊은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비전과 의욕이 없습니다. 자기 인생을 내던져 지킬 불사를만한 가치 있는 일도 없고 인생에 설래이는 감격도 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극적인 스포츠를 즐기던가, 아니면 마약을 통해서 환각에 빠져버립니다.

사람들은 고난이 없는 삶을 원합니다만, 고난이 없는 삶은 곧, 인간됨의 상실이요, 삶의 부정이요, 죽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향해서 그들이 가야할 인생이란 땀을 흘리는 수고의 길이고,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할 고난의 길임을 분명히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고통과 고난을 통해서 새 세계를 창조하고, 새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게 하십니다. 고난을 통해서만 새 시대를 열어가게 하십니다. 고난을 통해서만 구원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고난의 길을 걷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질병 외의 모든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것도 최악의 고통을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일생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오해 받고, 배신당하고, 멸시 받으며, 결국에는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최고의 기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이시면서, 당신이 만드신 사람에 의해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거야말로 참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고난을 통해서만 인간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우리들에게 줄기차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난,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아픈 마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본 호렙산 화염에 휩싸여 있던 떨기나무는 고난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는 바로 그 현장에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바로 그곳에서 야훼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세를 불렀습니다. 이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하심이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사랑하는 자에 대한 이 하나님의 긍휼이 죽은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살려내는 능력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고난을 극복해 낼 것이고 우리의 꿈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처한 것을 보시고 안타까워 우시는 주님, 자신을 위해서 슬피 울고 계시는 이 주님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인생은 달라지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훨씬 더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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