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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토굴 속의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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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명섭 박사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

한국에 기독교가 전해지면서 복음을 가장 열렬하게 받아들인 계층이 있다면 바로 여성들일 것이다. 한국여성들은 가부장적인 남성중심의 울타리에 갇혀 마치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그 배후에는 특히 여성들의 일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잘못된 결혼 및 가정제도가 도사리고 있었다. 여기에 남자들의 엔조이 문화로 여겨졌던 음주, 도박, 첩, 음담패설 등의 문제가 더해지면서, 전통적인 한국여성들의 삶은 비참할 정도였다. 그래서 한국의 가족문화에서 가정(Home)의 개념은 거의 생소하고, 집(House)의 개념에만 익숙하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초기 한국사회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이러한 남성들의 엔조이 문화로 인하여, 새로운 시민의식을 형성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많은 개인과 가정들이 그러한 잘못된 문화로 인해 망가지고 깨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교사들은 예수를 믿고 그러한 잘못된 문화를 끊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많은 여자들이 남편을 교회로 인도하는 중요한 원인이 됐다. 교회로 나와 예수님을 믿으면 그러한 잘못된 문화에서 자유하게 되고, 선교사의 가정들처럼 자신들도 아름다운 가정을 가꿀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복음은 변화시키는 능력인 것이다. 그러한 복음의 능력 앞에서 한국교회의 신자들은 많은 감동적인 삶의 변화를 경험했다.

192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신앙잡지 가운데 하나였던 「활천」에는 그러한 예수 믿고 변화된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 1925년 4월호부터 7월호에 연재된 “토굴 속의 은총”이라는 신앙이야기도 그 중의 하나이다. 주인공 최은애는 원래 강원도 홍천 양반가문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금지옥엽으로 자라난 최은애는 강릉의 소문난 부자이며 양반인 신씨 가문에 시집을 가게 됐다. 남편의 이름은 신경묵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신경묵은 술주정뱅이였다. 이런 술주정뱅이에게는 아무리 많은 재산도 소용이 없었다. 얼마가지 않아 그는 재산을 다 탕진하고 말았다.

이때 그들에게 나타난 것이 기독교의 복음이었다. 최은애의 유일한 소원은 남편이 술을 끊고 새사람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한 전도자가 와서 권면하기를 예수 믿으면 술도 끊고 좋은 사람이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최은애는 예배당을 찾아갔다. 예배당에서 부르는 찬송은 그의 마음을 상쾌하게 했다. 설교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남편의 술을 끊을 수 있다는 말에 열심히 예배당에 나갔다.

하지만 남편의 음주와 술주정은 끝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고향산천을 떠나 서울로 상경했다. 그리고 서울역 뒤 공덕리에 무당집에 셋방을 얻어 살게 됐다. 어느 날 무당이 불러서 이들에게 “무슨 도(道)를 믿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이들은 아무런 종교도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예수도 아니 믿소?”라고 물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최은애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전에 예배당에 나갔던 것을 생각하고 “나는 예수를 믿소!”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집주인 무당이 하는 말이 자기가 섬기는 신령님이 꿈에 나타나서 “너의 집에는 대주(大主)가 계셔서 내가 두려워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는 신령님께 절을 하고 빌든지, 아니면 집을 나가든지 하라고 요구했다.

여기서 최은애는 영적인 비밀을 크게 깨달았다. 예수가‘큰 주인’이라면 결코 그를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은애는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고 그들은 결국 그 집에서 쫓겨났다.

더 이상 갈 곳이 없게 된 최은애 부부는 공덕동 너머에 있는 신공덕리에 움막을 지었다. 이때 이들을 찾아온 사람이 아현성결교회의 전도부인 최익신이었다. 최 전도부원은 누추하기 짝이 없는 이 집을 일주일에 몇 번씩 찾아와서 구원의 소식을 전했다. 이때 최은애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해산날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신공덕리에서 아현성결교회에 다니던 한 신자가 찾아와 해산할 때까지 지내라고 자기 집을 비워주었다. 이에 최은애는 해산한 후부터 열심히 예배당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가정에 평화가 온 것은 아니었다. 다투지 않고 지나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웃 사람들은 남편은 술에 미치고, 아내는 예수에 미쳤다고 비난했다.

그러던 중 1923년 정월, 아현성결교회의 특별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던 최은애는 성령의 강권하는 역사로 자신의 모든 죄악을 깨닫고 진정으로 회개했다. 이때 그녀는 자신에게 물욕이 있음을 알았다. 그녀에게는 은패물이 있었는데 항상 이것이 남편과 다툼의 근원이었다. 남편은 그것을 노리고, 그녀는 그것을 지키려고 했다. 최은애는 이것을 깨닫고, 종로에 가서 이 패물을 팔아다가 남편을 위해 옷도 사고, 음식도 산 뒤에 집에 와서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잘못을 고백했다. 이렇게 되자 남편의 마음도 점점 누그러져 예배당에 출석하게 됐다. 이후 남편의 주량도 줄고, 주정도 적어지면서 살림도 점점 나아졌다. 결국 온 가정이 구원받게 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1925년 가을에 아현성결교회에서는 새로운 건축을 위해서 건축헌금을 모으고 있었다. 이때 최초로 건축헌금을 드린 사람이 바로 최은애였다. 이것이 기초가 되어 성결교회 본부에서는 신공덕리를 아현성결교회의 순회지로 삼아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27년에 정식으로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는데, 신공덕성결교회, 곧 현재의 신덕성결교회가 그것이다. 복음으로 인한 한 여인의 변화가 가정을 살리고, 한 지역을 살리는 역사로 이어졌던 것이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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