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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우리는 어느 목자의 어떤 양무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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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태화 (안양대 기독교문화학과 교수)

역사는 무엇인가? 역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질문은 짧지만 대답은 궁색하다. 언제나 본질적인 질문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많은 선학들이 이 의문을 풀기 위해 도전했으나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예를 들면 ‘역사’ 앞에서 헤겔은 절대정신의 자기계시로서 정신현상학을,F 바아더는 신에게로의 회귀를,니체는 영원한 재귀(再歸)를 반복하는 권력에의 의지를 생각했다. 또한 토인비는 도전과 응전의 패러다임을,E H 카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도출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역사를 강자의 지배사라고 말하기도 하며 다른 이는 이름 없는 민초들의 수고로운 집산(集散)이 역사의 밑거름이라고 부르짖는다. 그리하여 지금도 역사는 존재하지만 쉽게 정의할 수 없는 불특정 실체로 남아 경외감을 더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역사에는 잘했거나 잘못했거나 집단으로서 무리가 있었다는 점이다. 역사에서 이 무리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자유시민,백성,우매한 군중,프롤레타리아,성난 폭도,익명의 대중,소외된 시민,의식화된 민주시민,불복종과 저항하는 시민,참여시민으로서 NGO 회원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시대마다 그 기능과 역할에서 서로 다른 특징을 보여왔다. 최근 다시 등장한 필리핀의 피플 파워,인터넷 시대에서의 전자시민도 또 다른 특징의 무리인 셈이다.

3·1절을 맞아 다시 생각한다. 우리나라 역사는 누가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 그 날의 독립만세 운동에서 보여주었던 불가침의 자유와 주권을 향한 목마름,애국충정과 자주독립의 꿈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왜 우리는 87주년을 맞는 이날에 같은 질문을 또다시 역사 앞에 던져야 할까. 정체성과 평화 안녕을 위하여 언제까지 시간과 열정을 소모해야 하는가.

이제는 성숙한 시민의 나라로 일어나야 한다. 오늘이야말로 정권을 둘러싼 이전투구와 국론 분열,미숙한 국정 운영으로 신음하는 국민의 아우성을 끝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혹 우리는 그동안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마 9:36)하지는 않았는가.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 그 과정은 충분하지 아니한가. 역사 앞에 진지하게 묻는다. 집단으로서 우리 자신은 어떤 역할을 감당할 것인가. 목자 없는 양무리인가,목자 있는 양무리인가. 정의와 책임을 다하는 시민으로 거듭나야 할 때가 바로 오늘이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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