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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용도 목사의 교회개혁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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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명섭 박사의 이야기를 통해 보는 한국교회의 역사[50]
 
- 허명섭 박사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

이용도는 “고난 받는 그리스도 신비주의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의 ‘예수 신비주의’는 신적 합일만을 추구하는 ‘거룩한 이기주의’와는 그 차원이 달랐다. 이는 그의 사상이 단순히 개인적 영성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한국교회를 향한 각성의 외침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사실 이용도의 예수 신비주의는 그의 교회개혁사상의 초석이자 골간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교회의 실체는 예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당시 한국교회의 역사적 지평과 정황에 대해 철저한 비판적 반성을 촉구하면서, 예수생명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따라서 초인의 소리는 “반형식, 반교권, 반선교사의 형식”을 띠었고, 예수생명을 버린 교회와 그 지도자들에게 집중되었다.

이용도는 당시 한국교회의 영적 모습을 교리와 신조만이 생명없는 고목같이 앙상하게 남았다고 비유했으며 그들의 심령은 생명을 잃어버린 화석에 비유했다. 따라서 “교회의 표면에 처 놓은 신성의 장막, 평화의 포장을 걷어치우고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분쟁, 시기, 냉정, 탐리(探利)의 마(魔)가 횡행”하며, “그 속에서 천국”이나 “신성”을 찾아볼 수가 없다고 탄식한다.(일기, 1932년 12월초)

이용도는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것은 예수에 대한 잘못된 상(象)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한국교회가 가공된 “괴이(怪異)한 예수”를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서에 계시된 본래적 예수는 영(靈), 천(踐), 빈(貧), 비(卑)의 예수이지만, 한국교회는 영(榮), 부(富), 고(高)의 예수를 가공해 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용도는 이렇게 적고 있다. “현대의 교회는 괴이한 예수를 요구하며 현대 목사는 괴이한 예수를 원한다. 참 예수가 오시면 꼭 피살될 수밖에 없다. 참 예수는 저희들이 죽여 버리고 말았구나. 그리고 죄의 요구대로 마귀를 예수와 같이 가장하여 가지고 선전하는구나. 화 있을진저. 현대교회여! 저희의 요구하는 예수는 누구의 예수, 영(榮)의 예수, 부(富)의 예수, 고(高)의 예수였고, 예수는 영(靈)의 예수, 천(賤)의 예수, 빈(貧)의 예수, 비(卑)의 예수였나이다.”(일기, 1930년 2월 20일자)

이용도가 보기에 이처럼 잘못된 예수의 상을 가진 한국교회가 죄의 자복과 회개를 잃어버리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이용도는 한국교회를 향해 본래적 예수의 상을 찾으라고 강변한다. 즉,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세운 “사람(人)의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찾으라는 것이다. “예수를 갖다가 너희 마음에 맞게 할 것이 아니라 너를 갖다가 예수에게 맞게 할 것이니라.”(위와 동일)

하지만 이용도는 이런 한국교회에 대해 결코 외면하거나 멀리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더욱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교회로 다가갔다. 예수의 유대교에 대한 태도가 그랬다는 것이다. “광야를 거쳐 성신 충만하여 나사렛 고향으로 돌아오신 주님, 그때의 교중이야 얼마나 불철저한 그 물건들이었으며, 그때의 가증한 교의(敎義) 예식(禮式)이야 얼마나 주님 맘에 거슬리는 바 있었으랴마는 규례대로 안식일이면 회당에 가서 그대로 다 지키셨도다. 오, 주님이시여! 위대하시오이다. 주를 보고 오늘날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는 이들의 태도를 보면 참으로 비교도 되지 않는다. 교회는 다 썩었다고 교회 출입을 거절하는 자들은 예수의 이 태도를 어떻게 보는가?”(일기, 1931년 8월 12일자)

이용도는 악취가 풍기는 곳으로부터의 격리나 이탈이 아니라 그 안에 머물며 악취를 제거하고, 그로 인한 상처를 치료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아픔이 크지만 먼저 한국교회의 환부를 도려내고자 했다. 그것이 한국교회에 대한 이용도식 애정표현법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막힌 곳을 뚫어 본래적 예수의 생명과 향기가 소통되도록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한국교회와 민족의 살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에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일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진흥치 못하는 한 큰 원인인 것입니다.… 부흥이 있는 곳에야 열심히 있고 사랑이 있고 자기희생이 있고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고 쾌락이 있습니다. 부흥이 있는 곳에야 기적이 있습니다. 곧 말할 수 없는 악한 눈물을 흘리고 회개를 하며, 술망나니가 울면서 술병을 깨뜨려 버리며, 싸움과 분쟁으로 어지럽든 가정이 화락해지고, 예수의 반대자나 박해자가 예수의 증인이 됩니다.” (일기, 1927년 5월 2일자)

이용도는 이미 신학생 때부터 한국교회의 부패와 속화를 인식하며, 교회부흥의 필요를 느꼈다. “오늘의 교회는 참 부흥을 갈망한다. 부흥이 있을 때, 교회가 교회노릇을 할 수 있거니와 그렇지 못하면, 교회는 악마의 참모부가 되고 말 것이다. 오늘의 교회는 신앙상으로 보아 깊은 잠 가운데 빠져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잠을 잘뿐 아니라 도리어 분쟁, 분열, 모살 등 극도에 달하였다. 조선교회에는 지금 부흥이 있어야 하겠다. 왜 부흥이 필요한고 하니, 조선교회는 점점 무력해 간다. 점점 속화해 간다. 교회 안에는 훈훈한 맛이나 따뜻한 맛이 조금도 없고 들어서면 찬바람이 쓸쓸히 돌뿐이다. 시기가 가득하고 분쟁이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한다. 대구사건, 마산사건이 이를 증명한다.” (일기, 1927년 5월 2일자)

이용도에게 있어서 부흥은 “갱생을 초래하는 회개”였다. 그것은 또한 한국교회에 가장 시급한 것이었다: “신조에, 조직에, 언론에, 그 무엇에 선구자보다 회개운동의 선구자가 조선에는 필요하다. 갱생을 초래하는 회개, 신생적 회개운동 없이, 다른 모든 운동은 의미가 없다. 미구에 쓰러질 터인고로!”(일기, 1929년 11월 10일자)

생명력 있는 참 신앙의 상실이 한국교회의 본질적인 문제점이라는 것이다. 교회에 청년운동가도, 주일학교선생도, 농촌사업가도, 설교자도 있지만 그들의 신앙에 생명력이 없는데, 어떻게 교회가 살아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이용도는 무엇보다도 회개운동의 선구자가 조선에 나타나는 것을 꿈꾸었으며, 친히 하나님의 부름 앞에 응했던 것이다. 실로 그는 예수생명으로 가득한 한국교회를 꿈꾸며 개혁과 부흥을 외치다가, 격노한 사자의 발굽에 무참히 스러져간 초인(草人)이었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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