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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6월에 생각하는 북한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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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달익 목사(서문교회)

독일에서 진행 중인 월드컵 대회를 지켜보면서 각국선수들의 투혼과 기량에 감탄과 경이로움을 느끼지만 축구보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각국 응원단의 열정적 응원분위기이다. 어느 언론인이 말한 ‘경기장에 축구팬보다 민족주의자가 더 많다.’ 는 말이 실감난다. 의상과 헤어스타일의 차원을 넘어 온 몸에 바디페인팅을 하거나 각국 특유의 전통악기를 동원하여 자국 선수들을 응원하는 관중의 모습에는 축구사랑을 넘어서는 조국사랑의 진한 열정이 묻어난다. ‘내 나라 내 조국’은 언제 생각해도 따뜻한 어머니 품과 같고 사무치게 그리운 연인과 같다. 오래전 그리스유학시절 집근처에 베트남 음식점이 생겨 자주 들리곤 했었다. 그 식당에는 아시아계 학생들이 자주 모여 향수를 달래면서 아시아인들만의 고뇌와 아픔을 토로하곤 했던 기억이 있다. 아직 민주화 되지 못했던 필리핀 학생들과 우리가 각기 조국의 정치상황에 대해 분노 가득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지켜보던 식당주인 베트남인이 한마디 거들었다. ‘비난할 조국이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나는 조국을 잃어 버렸습니다. 당신들의 여권을 볼 때 마다 나는 가슴이 무너지는 슬픔을 느낍니다.’ 그는 소위 보트피플(boat people)이었다. 베트남이 공산화 되자 그는 보트에 몸을 싣고 망망대해로 탈출하여 여러 나라를 거친 후에 그곳에 정착을 시도하고 있었던 난민이었다. 그에게는 조국도 대사관도 여권도 없었다. 그냥 임시 거주하는 난민일 뿐이었다. 그때 나는 ‘비난할 조국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그의 말을 가슴깊이 새기고 또 새겼다.

우리는 유독 6월이면 나라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현충일, 6.25, 6월 민주화 투쟁, 6월의 월드컵 등등이 우리를 조국사랑의 피할 수 없는 격랑 속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사람의 국민과 한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진정한 애국은 무엇일까?

붉은 셔츠를 입고 밤새워 시청 앞 광장에 모여 대한민국을 절규하면 그것으로 우리의 조국에 대한 도덕적 신앙적 의무를 다한 것일까? 그래서 우리 팀을 8강, 4강에 진출케하면 조국의 운명은 저절로 형통케 되는가? 모든 것이 필요하고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우리가 승리의 축포를 터트리고 열광해도 북녘의 동포들을 저 모습으로 버려두고서는 행복할 수가 없음을 잘 안다. 우리가 경제 발전에 성공하고 민주화를 이룩하고 우리 젊은이들이 월드컵 무대에서 눈부시게 활약하고 일본과 미국의 야구와 골프계에서 포효하며 우리를 가슴 뿌듯하게 해도 북쪽의 피폐한 형제들을 생각하면 가슴 답답하고 눈물겹고 영혼이 괴롭다.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접근금지 지역의 저 어둠의 땅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한때 우리사회 일각에서는 독일 통일의 과정이 우리의 모델이 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지난 정부의 ‘햇빛정책’도 국제적 관심이 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무엇인가? DJ의 재방북을 교묘한 구실과 침묵으로 거부하는 저들의 모습에서 또한번 우리는 분노와 배신을 느낄 뿐이다.

지난 주 Newsweek에서 말한 것처럼 ‘햇빛정책은 북한을 변화시키는 것에는 실패하고 대신 남한을 변화되게 했다’는 조롱기 섞인 국제사회의 냉혹한 평가를 받게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독일과 우리가 다르다는 점을 당국자들이 지나치게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다. 우선 독일의 역사는 신성로마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철저한 기독교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신앙, 자유, 사랑, 인권, 민주주의 등에 너무나 익숙해있던 역사이다. 잠시 동안 어두운 세력에 의해 지배당할 수 있었으나 더 이상은 그들의 신앙과 역사경험 그리고 국민적 상식이 용납하지 않았다. 또 한가지는 공산정부기간동안 교회가 존속되어 왔다는 점이다. 북한에서 1953년 이후 모든 교회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과는 극히 대조적이다. 신앙과 양심을 지키던 이 교회들이 동독붕괴와 베를린 장벽 철거의 역사창조 주역이 되었다. 국민적 신뢰와 존경의 대상이었던 교회가 가는 길을 국민들이 따르면서 역사는 새롭게 탄생했었다. 마지막 한 가지는 그들에게는 분단과 대립은 있었으나 전쟁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 세계를 끌여 들여 이 좁은 땅 안에서 무제한의 살육전쟁을 했었다. 이 역사적 경험이 독일과 우리가 다른 이유이다. 이 근본적 차이를 무시했던 햇빛정책은 남남 갈등을 생산하고 대다수 국민의 외면을 받게 되는 기대이하의 결과를 만들었다.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이제 남은 것은 교회의 역할이다. 필자는 그것을 디아코니아(Diakonia,나눔) 사역을 통한 북한 사회의 변혁추구라고 생각한다. 현재 북한 선교사역에 있어서 Diakonia 사역은 선교학적 이론의 범주를 넘어서는 필수적 현실요청이 되어있다고 본다. 우선은 전후 세대들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전환을 위해 필요하다. 그들은 한번도 객관적으로 기독교를 관찰해 보거나 그 역사를 추적해 본적이 없다. 몰론 기독교신앙과 진정한 대면을 한 적도 없다. 단지 주체사상의 입장에서 왜곡되게 해석된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있을 뿐이며 이로 인하여 극도의 불신과 분노를 본능적으로 표출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세대들에게 우선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수정해 줄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이다. 교회가 실시하는 Diakonia 사역은 이런 경험을 위해서는 최적이 아닐 수 없다. 또한가지 이유는 접근 불가능한 집단과의 접근이 가능한 방법이라는 점이다. 북한 당국이 남측교계 인사들에게 접근을 허용치 않는 집단들이 있는데 곧 청소년들과 극빈층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다. 이들과의 직간접적인 만남이 가능한 것은 Diakonia 사역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북한사회의 변화를 추구할 수 있다. 또 다른 한 가지 필요성은 Diakonia 사역이 화해와 치유라는 결실과 더불어 북한 주민들의 현실적 필요를 해결하는 대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포애와 신앙적 양심에 따라 고통중에 있는 저들의 절박한 현실을 결코 외면 할 수가 없다. 이를 위해서는 체계적이고 전국적인 교모의 Diakonia 사역이 반드시 필요하다.

외국의 경험이 우리에게 교훈이 됨은 사실이지만, 정확한 표본이나 모델이 될 수는 없다. 항간에서는 Helsinki Process를 또 다른 모델로 여기고 있지만 이것은 6.15 공동선언으로 이미 어긋나 버렸다. Helsinki Process 는 1975년에 발표된 헬싱키선언이후 전개된 동구붕괴의 과정을 의미한다. 이 선언의 근본은 인권정책의 추진에 있었다. 그러나 6.15 선언 어디에도 인권, 자유 등의 용어는 발견되지 않는다. 북한의 일관된 주장인 ‘우리끼리 통일론’과 ‘연방제론’을 수용하면서도 인권, 자유등의 조항을 거론도 못한 것은 협정내용의 졸속과 굴욕을 의미할 뿐 아니라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 통일의 모습에서도 벗어나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 스스로가 개발한 북한선교 정책에 의해 민족의 화해 협력이 가능하게 되고 북한의 복음화와 통일이라는 두 과제를 달성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교회의 북한에 대한 Diakonia 사역을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고 싶은 것이다. 이 사역은 북한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의 종소리를 듣게 하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 월드컵의 열기에 함몰되어 이 6월에 북한동포를 잊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고 더욱 저들을 위해 고민하고 기도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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