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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꿈 예수님의 꿈 (행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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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행1:1-8 성경본문보기   
제목  나의 꿈 예수님의 꿈 

미국 코스타 사역과 워싱톤교회 교차사역에 이어 지난 한주간 우리교회 중보기도팀과 사랑의 순례팀 그리고 선교사 자녀사역팀 모두 48명의 교우들과 함께 카작스탄 알마타 단기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중앙 아시아 각 나라 여러 교회에서 모여온 약350명의 현지 지도자들에게 중보기도 사역을 가르쳤고, 이어서 약 45명의 선교사님들을 사랑의 순례로 섬겼습니다. 김기태, 김석기 선교사님을 위시한 우리교회 출신 선교사님들의 헌신적인 사역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또한 잠시 가정, 직장일을 뒤로 하고 문화가 다르고, 음식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풍습이 다른 상황에서 편안한 휴가대신 적지않은 고생을 개의치 않고 현지인들과 선교사님들을 섬기기 위해 헌신하는 우리교회 교우들의 모습은 정말 자랑스러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목회의 보람인것을 느꼈습니다. 저마다 기질도 성격도 교육배경도 꿈도 다른 이들이 손발을 맞추어가며 선교상황에 적응하며 애쓰는 모습은 다만 하나 예수님때문인것을 알았을때 정말 예수님이 놀라운 주님이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믿지 않는 사람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새사람이 된 체험을 가르쳐 신학에서는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회심이 가져다 주는 명백한 변화의 하나는 꿈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예수님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받아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당연한 변화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시라면 주인이 원하는대로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lordship-예수님의 주인되신 삶이라고 합니다. 예수믿으면서도 언제까지나 자기의 꿈만을 고집하고 나를 향한 예수님의 꿈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한다면 이것은 불순종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꿈은 무엇입니까?--하나님 나라의 꿈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이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하나님을 높이는 인생을 사는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선포하신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메세지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 모든 족속가운데 하나님의 다스림이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에도 이 꿈을 접지 않으셨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을 이 세상에 계시며 승천하시기전 제자들을 만나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제자로써 예수님의 꿈을 이루는 일에 쓰임받는 인생을 살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는 여러차례 그 대답을 반복해서 들려 주십니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는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마가복음8:34)

첫째로,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이것을 본문의 상황에 비추어 말씀 드리자면 더 높고 거룩한 예수님의 꿈을 갖고 살기위해 자신의 좋은 꿈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당시의 예수님의 몇 제자들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꿈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꿈은 이스라엘 민족회복의 꿈이었습니다. 이것은 민족과 국가를 포기 당한채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고 사는 나라의 젊은이들이 당연히 가질수 있는 또 가져야 할 꿈일 것입니다. 과거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받고 살던 때의 이 땅의 뜻있는 젊은이들의 한결같은 꿈도 민족해방의 꿈이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소위 셀롯인으로 알려진 열심당원들이 있었고 그들은 민족해방의 전사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유의 하나도 예수님을 통해서 그들의 꿈이었던 민족해방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들의 꿈이 무산되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그들의 꿈의 부활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드디어 그때가 가까웠다고 믿었던 그들이 본문 6절에서 질문을 던집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7-8절의 말씀의 내용이 한마디로 무엇입니까? 민족의 회복은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고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더 높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꿈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선순위의 문제라고 할만 합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가 자신의 꿈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것은 아닙니다. 민족해방의 노력이 무가치하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꿈에 우선적인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들의 꿈도 때가되면 이루게 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더 중요한, 더 높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내 인생의 주인되신 그분의 꿈을 위해 나자신을 , 나의 꿈을, 나의 욕망을, 아니 나의 이상까지라도 포기할 마음이 있으신지요? 이것이 바로 자기부인의 결단인 것입니다. 모든 진지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 결단의 과정을 반드시 지나야 합니다.

둘째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희생한다든지, 고생하는 것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단순한 희생이나 고생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십자가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로 가신 이유,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 이유-그것이 그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한 하나님의 계획이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에게는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믿습니다. 나를 향한 나의 계획이 아닌,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것이 우리 각자의 자기 십자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십자가를 받아드리고 이 십자가를 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어려워도 말입니다. 우리 각자가 나름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와 은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을 하나님은 준비하시고 이제 우리의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무엇보다 먼저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아직도 민족해방의 열망으로 해방의 전략과 계획에 바빠있었던 제자들에게 주님은 당신의 하나님나라 확장의 전략과 계획을 들려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사도행전1:8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사와 달란트를 쓰셔서 당신이 복음의 증인으로,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사시는 것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당신의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당신에게 낯선 땅끝까지 나아가서 말입니다. 선교사나 목사의 타이틀은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습니다. 증인만 되시면 됩니다. 이 땅의 여러 지역에선 오히려 목사의 타이틀이 없는 것이 전도하기에 더 좋을수가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 당신은 전문인으로 직업인으로 예수를 증거하시면 됩니다. 증인은 듣고 본대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체험한 예수님을 체험하신 그대로 말하시면 됩니다. 그 예수님이 구원이라고 소망이라고 전하시면 됩니다. 이 소식은 우리의 이웃들과 열방을 위한 복음인 것입니다. 진실로 이 사역은 당신과 나의 목숨을 걸어도 좋을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게 전하다 죽는 것은 가장 값지게 살다 죽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사용된 증인이란 말의 의미는 순교적 증인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위대한 일에 당신을 쓰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기꺼이 수용하시겠습니까? 이것이 십자가를 지고 사는 길입니다.

셋째로, 주님을 날마다 좇아가야 합니다.

나를 향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분명해졌다면 이제 우리가 할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순종하는 일입니다. 날마다 순종하는 일입니다. 초대교회의 한줌도 안되는 제자들이 당시의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성공했던 비밀은 단순한 순종에 있었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되라는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대로, 사마리아로, 로마로 그리고 땅끝까지 나아가 복음의 증인된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이 인도 하시는대로 날마다 어디든지 기꺼이 주님을 좇아갔습니다. 결과적으로 당시의 온 세상이 복음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세상은 복음의 영향으로 상당한 변화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순종할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 주께서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실 때 '좇는다'는 말은 단 한번의 행동이 아닌 지속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속적으로 순종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욕망을 따를 것인가, 주님의 비전을 따를 것인가의 싸움을 날마다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순종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날마다 주님을 따라가는 방법입니다.

저는 1800년대 중반 자신의 욕망보다 주님의 인도를 따랐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할까 합니다. 이 사람은 스위스 출신의 크리스챤 실업가요, 명망있는 은행가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기는 했지만 아직은 너무나 강렬한 재물의 유혹을 받고 있었던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살아가던 당시의 세상에 가장 막강한 영향을 끼치던 사람은 나폴레온 대제였는데 이 은행가는 나폴레온을 만나 협상을 통해 불란서와 스위스의 경제협력을 이끌어 내어 거대한 부의 주인공이 되어보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파리로 갑니다. 그러나 나폴레온이 전쟁터로 방금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만나기 위해 전쟁터로 갔다가 불란서와 오스트리아군의 치열한 전투를 구경하게 됩니다. 전투는 끝났고 나폴레온도 전쟁터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는 양군의 즐비한 시체와 부상자의 신음소리가 지옥의 참상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을사람들과 힘을 합쳐 부상병들을 돌보는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일이 끝나갈 무렵 그는 다시 나폴레온을 만나러 갈것인가를 생각하다가 문득 기도할 생각이 났습니다. 그 때에 기도하던 그의 마음속에는 나폴레온과의 협상을 통해 엄청난 부를 획득하려는 꿈대신에 새로운 꿈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전쟁중에 아군, 적군을 물론하고 부상당하는 모든 사람을 돌보고, 이 일을 통해 인류가 화해하는 평화의 꿈이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국제 적십자 운동이 탄생하던 순간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헨리 듀난트 혹은 앙리 뒤낭으로 알리어 지게 됩니다.

하나의 꿈이 사라지는 것을 실패라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수만 있다면 그때야 말로 예수님의 꿈을 붙들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일 수 있습니다. 앙리 뒤낭의 교훈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지난 7월 첫주일에 저는 버지니아 지구촌 교회에서 생식으로 잘 알려진 황성주 박사의 목사안수식에 참여하여 설교하고 안수위원으로 그를 안수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최근에 그가 저술한 책 디지탈 시편 23편에서의 그의 간증이 계속 생각이 났었습니다. 그가 강남에서 의욕적으로 사랑의 클리닉 병원을 개원한 후 큰 위기가 닥쳐왔었습니다. 경제적인 위기에다가 혈액 검진 사업이 잘못되어 구속의 위기까지 몰려 있었을 때였습니다. 결국 혈액 검진 사업은 폐쇄되었고 엄청난 추가적자가 발생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실패였습니다. 그때 마침 인도 선교사들의 모임에서 초청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마당에 병원을 비우는 것이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지만 기도했을때 '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망하면 망하리라는 각오로 나갔다고 합니다. 그 모임에 나가 기도하는 동안 그는 두가지 주님이 주시는 아이디어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인도 봄페이 슬럼가에 진료소를 열어 이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섬기는 일과 한국에 돌아가면 모든 목회자와 선교사 가족에게는 종합검진을 50%할인해서 실시해서 주의 종들을 섬기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다음 이야기를 책에서 직접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149-150페이지--)결과적으로 병원의 위기는 극복되고 오히려 병원은 번영의 전기를 맞게 됩니다. 위기는 새로운 섬김의 기회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전에 실패는 없습니다. 만일 실패를 통해 나의 꿈이 아닌 예수님의 꿈을 붙잡을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주님의 꿈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서 우리는 자신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나자신과 여러분 모두에게 묻고싶은 절박한 질문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는 정말 예수님의 제자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예"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물어야 할 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당신은 예수님의 꿈을 꾸고 계십니까?" 혹은"당신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꿈이 있습니까?"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 한편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하나의 꿈이 모든것이 아니어라.
조물주가 내리시는 꿈들의 수효는
내가 꿈꾸는 밤들의 숫자만큼이나 많으니
어제의 사라진 꿈으로 하여
내일의 꿈을 포기할 이유가 무엇인가.
친구야, 내일을 위하여
이밤은 다시 찬란한 새꿈을 꾸어야 할 시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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