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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엡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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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엡4:1-6 성경본문보기   
제목  서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우리 자신이 우리 민족의 결점을 지적할 때 빠지지 않았던 것은 '우리는 하나되기 어려운 민족'이라는 자괴적 비판이었습니다. 좁은 땅에 살면서도 선거 때만 되면 단골메뉴처럼 심각하게 제기되어야 하는 지역주의, 필요이상으로 강조되는 학연주의, 연고주의, 최근에는 급격한 문화적 발전을 경험하면서 사회문제화 되고있는 세대차이등은 우리를 하나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사회적 바이러스와 같은 것들이고, 우리 중에 누구도 이런 문제에 대한 낙관적 해결을 전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기우일수 있다는 한편의 드라마를 우리는 지난 한 주간 동안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단 한 개의 축구공으로 인하여 우리는 모든 것을 넘어서서 하나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축구공에 매달려 있는 동안 우리가 전라도 사람인지, 경상도 사람인지를 의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남녀노소, 교육정도도 문제가 아니었고 우리의 출신학교를 물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였습니다. 저는 이번 월드컵이 우리 민족사에 기여할 가장 중요한 공헌은 승리 그 자체도, 돈벌이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하나될 수 있다는 교훈, 그리고 우리가 하나될 때 발휘할 수 있는 민족적 잠재력과 가능성의 확인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민족교육의 장이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하나됨--이것은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에게서 그렇게도 보고 싶어한 가장 중요한 기대였음을 아시는지요? 요한복음17:21에 보면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전 이 지상에서의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가운데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아버지께서 내안에 내가 아버지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가 될 때 그들이 세상의 변화를 위해 발휘할 수 있는 그 놀라운 가능성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예수의 제자들은 정말 하나됨을 위한 노력을 얼마나 하고 있을까요? 오죽하면 작가 마크 퉤인이 이런 조크를 말했을까요? "나는 개와 고양이를 한우리에 집어넣어 보았다. 그들은 바로 적응하고 어울리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새와 돼지와 염소를 한우리에 넣어보았다. 그들은 얼마간의 적응기간을 거친후에 친구가 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침례교인과 장노교인 그리고 천주교인을 한우리에 집어 넣어보았다. 그들은 바로 싸움을 시작하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격렬한 싸움을 하는 것을 보았다." 오늘의 본문 3절에서 바울사도는 에베소와 소아시아 복음화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그가 친히 3년간 양육했던 에베소 교인들에게 주후62년경 로마의 감옥에서 붓을 들어"--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됨의 비밀은 결국 우리가 두가지-하나됨의 근거와 하나됨의 자세를 알고 행하는데 있다고 가르칩니다.

1.하나됨의 근거를 아십시오.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됨의 근거를 7가지로 제시합니다. 우리는 왜 하나인가? 7가지 때문입니다. 이7가지는 무엇들입니까? 4-6절의 말씀가운데 그 7가지가 제시됩니다. 한 몸, 한 성령, 한 소망, 한 주님, 한 믿음, 한 세례(침례), 한 하나님 아버지--이렇게 7가지 우리는 공통분모들을 가진 자들임을 상기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7가지는 다시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무엇들인지 아십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4절의 초점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한 성령의 역사로 한 몸인 교회에 속한바 되었고 한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살게 된 것입니다. 5절의 초점은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한 주님을 믿음으로 동일한 한 믿음을 갖게 되었고, 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된 표지로 동일한 신앙고백을 드러내기 위한 침례를 받았습니다. 6절의 초점은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한 하나님을 믿고 동일하신 하나님 곧 만유를 지으신 그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시고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부, 성자, 성령순이 아닌 성령의 역사부터 말했을까요?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제일먼저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인정하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음으로 비로소 만유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순서는 경험적 순서입니다.(교리적 순서가 아니라) 여하튼 결국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같은 성령, 같은 주님, 같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임을 설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이 세 가지는 궁극적으로 한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 한가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죽고 독일이 전쟁에 패전한후 독일인들은 깊은 절망감과 죄책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의 책임론을 둘러싼 분열로 서로를 정죄하고 있을 때에 한 독일출신의 신학자가 스위스에서 고향인 독일로 돌아옵니다. 칼 바르트라는 유명한 신학자였습니다. 그가 고향 독일에 돌아와 담당하게된 첫 강연을 그는 이렇게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저는 만물과 역사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이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동일하신 이 하나님을 믿는 그의 자녀로서 그분안에서의 형제와 자매로서 다시한번 함께 따뜻이 손을 잡을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새로운 조국을 다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의 우리교회도, 우리민족도 이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자요, 우리의 섭리자이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한 마음으로 서로의 손을 따뜻이 잡고 교회의 새 역사를, 민족의 새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됨의 근거를 확인하십시다. 우리 각자는 한 사람 한사람이지만 우리의 숫자가 많아지는 그만큼 서로 다른 인생과 신앙에 대한 견해가 존재한다해도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고 그 한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한 아버지임을 고백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2.하나됨의 자세를 아십시오.

우리는 앞서서 우리의 하나됨의 근거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사실상 그 근거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게 되었기에 우리는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사도가 본문에서 강조하는 바는 '하나되게 하소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우리는 이미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입니다. 2절의 말씀은 이 하나됨을 힘써 지키기 위한 자세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하나됨을 지키는 자세--무엇일까요? 네 가지입니다. 첫째, 겸손한 자세, 둘째, 온유한 자세, 셋째, 오래 참음의 자세, 넷째, 사랑가운데 용납하는 자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교제가 상처받고 깨어짐을 경험할 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수 있지만 대체로 가장 보편적인 원인은 우리중에 누군가가 이 하나됨의 성경적 자세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중에 누군가가 겸손하지 못했기에, 온유하지 못했기에, 아니면 오래 참지 못했기에, 아니면 우리가 서로 사랑가운데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자세를 낮추는 것입니다. 상대를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서 자세를 낮추시고 종의 모습으로 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온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가진 힘을 감정대로 쓰지 아니하고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절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면서도 전능자의 힘으로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복수하는 대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는 겸손하고 온유한 분이셨습니다. 그는 오래 오래 참으셨고 또한 사랑가운데 모든사람을 용납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들의 구세주와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2절에 언급된 인격적 자세는 본질적으로 주님이 보여주신 삶의 자세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인격적 덕목들을 추구할 때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들을 용납하고 그들과 하나된 인격적 교제를 누릴수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로 자라갈수가 있습니다.(13절)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인격적인 자세를 갖고 이웃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요? 이것은 결코 도덕적인 결단만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하나되게 하신 성령님-그분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됨을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의 본문의 해답은 결국 엡5:18에서 발견된다고 믿습니다.--"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없이 인간적 교제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이런 인간관계의 위기를 가장 적절하게 서술한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이 춥다고 느낄수록 따뜻함을 위해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그러나 우리는 가까워질수록 자기 안에 감추어둔 가시로 서로에게 예리한 상처를 입히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춥고 추운 겨울의 고독속에서 각자 외롭게 죽어간다" 저는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자들이지만 우리 안에 존재하는 죄성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서로에게 상처를 입힐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목장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워치만 니의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중국교회 성도 한분이 어느날 자기 논의 물이 자꾸 줄어드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알고보니 옆에 있는 논임자가 자기 논에서 물을 허락도 없이 자꾸 빼가는 것이에요. 그는 최근에 교회 나오기 시작한 초신자 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상대로 회복시켜 놓으면 그 이튿날 또다시 수로를 돌려놓는 것이었답니다. '이럴 수가 있나?' 분노가 생겼지만 그런 자기의 모습을 보고 안되겠다 싶어 기도하면서 "주님, 저 사람이 틀리고, 내가 올바른 일을 하는데 왜 내 마음속에 평안이 없습니까?고 여쭈었다고 합니다. 계속하여"성령님의 도움을 구했더니 "너는 올바른 일을 위해서만 살겠느냐? 그 이상으로 살수는 없겠느냐?"는 음성을 들었답니다. 그래서 그 뜻을 곰곰히 생각하다가 깨달음이 와서 이튿날은 일찍 일어나 자기논의 수로를 이웃 논으로 돌려놓았더니 얼마후 그가 찾아와서 "당신은 정말 그리스도인 이시군요, 저도 이제는 당신처럼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자가 되고 싶습니다."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로운 삶의 목표는 단순히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되고 우리를 통해, 하나된 우리교회, 그리고 목장교회를 통해 이 어두운 세상은 변화될 것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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