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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되게 하신 것을 (엡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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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되게 하신 것을(엡4:1-6) 

엡 4:1-6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미국이 남북전쟁을 할 때였습니다. 한 번은 어느 강을 사이에 두고서 북군과 남군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오면 서로 간에 아주 치열한 전투를 하도록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흐르는 강물 위에는 고요한 달빛만 적막하게 비취고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아무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양쪽 편 진영에 깊은 적막감만 나돌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병사가 적막감을 깨뜨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노래 한 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북군과 남군 사이에서는 서로 군가가 달랐습니다. 심지어는 애국가조차도 서로 달랐습니다. 그래서 이쪽에서 이런 군가를 부르면 저쪽에서는 또 다른 군가로 서로가 서로를 응수하곤 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군인은 모두가 함께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도 잘 아는 노래입니다. Home, Sweet Home(즐거운 나의 집)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옆에 있는 사람도 따라 불렀습니다. 또 그 옆에 있는 사람도 따라 불렀습니다. 노래는 온 진영에 퍼져 나갔습니다. 급기야 그 노래는 강 건너편에 있는 상대 쪽 진영에도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들도 함께 그 노래를 한 목소리로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밤이 새도록 그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소리내어 울면서 그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날이 밝았습니다. 동이 텄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쪽 진영에서도 진군의 나팔소리는 울려 퍼지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더 이상 전쟁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시금 그들의 근본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서로 싸워야 하는가? 따지고 보면 우리는 한 형제인데…" 그 사실을 그들은 새삼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본문 3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너희는 하나가 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미 하나된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요, 한 자매들입니다. 성령께서 이미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우리는 힘써 지켜야 할 거룩한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된 것을 깨뜨리려는 악한 세력, 마귀의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에베소서는 특별히 교회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가 무엇입니까? 여기에 우뚝 서 있는 예배당 건물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 곧 우리 자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에베소의 전반부인 1∼3장은 교리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우리는 이미 태초에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선택하심을 받은 자들인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위적으로 이곳에 세워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창세 전에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기관입니다.
2장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과 이방 사이에 있는 막힌 담을 십자가로 허무셨음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이방인들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한 지체들이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를 우리들이 누리게 될 엄청난 영광과 축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후반부인 4∼6장은 실천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오늘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이미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우리는 힘써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할 때 "주여, 우리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하나가 된 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된 것과 관련해 우리에게 중요한 세 가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하나됨의 동기, 하나됨의 자세, 하나됨의 근거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오늘 말씀대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잘 지키는 가운데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기쁘시게 하고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 아버지에게 큰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하나됨의 동기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순교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는 그러한 시점에서 붓을 들어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가 3년 동안이나 머물면서 친히 양육했던 에베소 교인들이었습니다. 노사도 사도 바울은 눈물을 흘리면서 정말 마지막을 앞두고 있는 간곡한 심정으로 그들을 향해 권면했을 것입니다. 그가 무엇이라고 보냈습니까? 1절 하반부입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들을 불러주셨습니까? 그들이 잘나서입니까? 그들에게 어떤 인간적인 능력이 있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본시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은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그 앞서 계속해서 강조했습니다. 2:5의 말씀을 읽어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2:8∼9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우리에게 어떤 공로가 있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나 자신을 내세워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심정으로 교회 안에서 우리가 해야할 역할을 겸손하게 말없이 충성하는 것이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한 모습일 것입니다.
옛날 어느 숲속에 공작새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들에게 예쁜 딸이 태어났습니다. 딸 공작새는 곱게 잘 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숲에 살고 있는 공작새 총각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집을 간지 채 한 달도 안되어서 딸 공작새가 풀이 푹 죽은 채 친정으로 날아왔습니다. 어미 공작새는 걱정이 되어서 딸 공작새에게 물었습니다.
"얘, 왜 그러느냐? 도대체 무슨 일이냐?"
딸 공작새는 어미 공작새에게 하소연했습니다.
"엄마, 도무지 외로워서 살 수가 없어요. 숲의 새들이 다 나를 따돌리고 있어요. 그러니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어요?"
딸 공작새의 말을 들은 어미 공작새의 마음 속에 무엇인가 집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딸 공작새에게 물었습니다.
"얘, 너 아무데서나 네 꽁지를 활짝 펴 보이면서 뽐내었지? 어때? 내 말이 틀림없지?"
딸 공작새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듯이 어미 공작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이 아름다운 꼬리는 우리 공작새에게만 있는 것이잖아요. 그러니 다른 새들에게 그것을 조금 펼쳐 보여주는 것이 뭐가 그리 잘못되었나요?"
그때 어미 공작새는 딸 공작새에게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얘야, 내가 한 번은 숲에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엿들은 적이 있었단다. 그때 어떤 사람이 자기 친구를 이렇듯 점잖게 타이르더구나! '여보게, 자네의 대화 가운데서 자동차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좀 빼게나. 영국의 골퍼들 사이에서는 젠틀맨 골프 상식이라는 말이 있다네. 만일 좌중에 한 사람이라도 골프를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절대로 골프에 대한 이야기를 화제로 올리지 않는다는 걸세.' 얘야,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니?"
딸 공작새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시집으로 날아갔습니다. 그 뒤 그는 다시는 풀이 죽은 채 친정으로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는 숲속에 있는 다른 새들과 잘 어울려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위로하고, 격려해주어야 할 모습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가운데 때로는 갈등이 생깁니까? 왜 마음의 상처가 생길 때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불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무언가 잘난 것처럼 나를 내세우고 뽐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겠습니까? 나도 부족하고, 너도 부족하고, 그저 부족한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내세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있다면 오직 한 가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고, 그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그 은혜에 눈물지으면서 그 은혜에 보답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역할에 충성하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됨의 자세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우리가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들이 있습니다. 가정 생활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부부사이는 틀림없이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서로 사이에 금이 생깁니까? "아내가 이렇게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남편이 이 점을 고쳐주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변하지 않고 그저 상대방이 바뀌어지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상대방에 대해서 실망감만 점점 커지기 마련입니다. 상대를 탓하기에 앞서서 나의 자세와 태도에는 문제가 없는지 우리는 이것을 먼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2절에서 하나됨의 자세를 네 가지로 일러주고 있습니다. 이 네 가지가 있으면 나와 너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우리는 잘 지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자세가 없어질 경우 나와 너 사이에는 상처와 갈등이 생기기 쉽습니다.
하나됨의 첫째 이유는 "모든 겸손"입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겸손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얼굴에 있는 눈과 코가 서로 잘난 척을 하면서 싸웠습니다. 화가 나니까 코가 눈을 향해서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너 도대체 움푹 들어가서 못생긴 주제에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 그래도 생기려면 나처럼 이렇게 오뚝 예쁘게 솟아야지, 너는 뭐가 그리 잘났다고 떠드는 거냐?"
눈은 그 소리를 들으니까 괘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은 복수를 해야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눈은 걸어갈 때 일부러 감아버렸습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코가 깨졌습니다. 코는 흐르는 코피를 솜으로 틀어막았습니다. 그러나 코는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꼭 복수를 해야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코는 화장실로 달려갔습니다. 변기에서 대변을 펐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쌈장처럼 만들었습니다. 식탁 위에 몰래 올려놓았습니다. 눈은 볼 줄은 알지만 냄새를 맡지 못하니까 변이 쌈장인 줄 알고 그것으로 상추쌈을 싸서 맛있게 먹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체끼리 서로 잘난 체 하면서 남을 깔보면 결국은 그 피해가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모두는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역할도 역시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네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나도 역시 부족한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남이 하는 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있는지 먼저 나 자신의 모습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자세는 "온유"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는 절제된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Power under control," 또는 "Controlled power"입니다. 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쉽게 감정을 발산하지 않습니다. 내 언어와 행동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따금씩 능력도 있고, 열심도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를 모릅니다. 보기에도 불안합니다. 바로 온유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톱을 가지고서 자기의 왼쪽 발을 잘라버리겠다고 씩씩거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깜짝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 이 못된 왼쪽 발이 감히 오른쪽 발을 밟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이 못된 왼쪽 발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려고 잘라버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야 몸의 기강이 바로 서게 될 것 아닙니까?"
여러분, 지금 이 사람이 무엇을 잊고 있는 것입니까? 왼쪽 발도 역시 자기 몸의 한 지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결코 악을 악으로 갚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선으로 감화를 시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나이다."
때로는 속상할 때가 있습니다. 섭섭해서 눈물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 예수님의 온유하심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상대방에 대해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 온유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오래 참음"입니다. 우리가 이따금씩 음식을 먹을 때면 혀를 깨물 때가 있습니다. 한 두 번이 아니고 종종 깨뭅니다. 그렇다고 해서 혀가 이를 뽑아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그저 혀는 이에게 조심하라고 당부할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몸의 각 지체는 혀에 난 상처의 아픔을 함께 공유합니다. 그리고 협력해서 혀의 상처를 치료해 줍니다. 눈은 약이 어디 있는지 찾아봅니다. 발로 걸어갑니다. 손으로 약을 꺼냅니다. 입은 크게 벌립니다. 그렇게 해서 혀에 난 상처를 치료해 주는 것입니다. 오래 참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각 지체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까지 오래 참으셨습니다.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속상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조금 더 참고 인내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넷째는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발에 더러운 먼지가 잔뜩 묻었습니다. 냄새가 납니다. 또 발에는 무좀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발을 배척합니까? 그럴수록 우리는 손으로 발을 깨끗하게 씻어주고 닦아줍니다. 발이 하는 중요한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발은 우리의 몸을 지탱해 줍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필요한 곳으로 우리의 몸을 옮겨줍니다.
마라톤 선수가 열심히 뛰었습니다. 우승을 했습니다. 시상대 위에 올라섰습니다. 그런데 상을 받을 때는 발이 나가서 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손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서 목에다 메달을 걸어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발이 불평을 합니까? "야, 뛰기는 내가 뛰었는데 왜 네가 상을 받니? 이리 내! 그건 내 거야!" 그러면서 발이 쑥 내밀어 상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 몸은 균형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발은 그런 것을 전혀 구애하지 않습니다. 손이 내밀어서 대신 상을 받아도 그저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할 거룩한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된 것을 우리가 잘 지켜 나가기 위해서는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용납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웃이 나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이웃에게 조금 부족한 것이 보이고, 이웃의 눈에 티끌이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으로 용납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사랑으로 용납해 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급하지 말고 조금 더 오래 참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래 참기 위해서는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온유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됨의 첫째는 겸손입니다. 겸손은 우리를 온유로 인도합니다. 온유하다보면 절로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오래 참다보면 우리는 상대방을 사랑으로 용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자연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킬 수 있습니다.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 그리고 사랑 가운데서 용납하는 이 네 가지 자세가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꼭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됨의 근거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하나된 것을 알 수 있는지 살펴봅시다. 4∼6절 말씀입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여기에 교회를 이루는 여러 가지 근본적인 요소들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하나"가 몇 가지로 설명되어 있는지 꼽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몸이 하나입니다. 성령도 하나입니다. 소망도 하나입니다. 주도 하나입니다. 믿음도 하나입니다. 세례도 하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하나이십니다. 모두 몇 가지입니까? 일곱 가지입니다. 완전수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교회를 이루고 있는 모든 근본적인 요소가 하나라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지체들인 우리도 마땅히 하나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마지막 일곱 번째 하나님도 하나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십니다. 지금도 역사의 주인이 되십니다. 역사의 섭리자가 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 역사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한 자녀들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고, 한 자매가 되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났습니다. 독일인들은 전쟁에 졌다는 생각 때문에 깊은 절망감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들은 죄책감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서로에게 떠맡기면서 서로가 서로를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계속해서 분열되어 나갔습니다. 이러한 때에 스위스에 머물고 있던 한 독일신학자가 스위스를 떠나서 자기 조국 독일로 돌아왔습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라는 유명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분열의 아픔을 겪고 있는 독일인들을 향해서 가는 곳마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저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역사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그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 분 안에서 한 형제요, 한 자매된 자들입니다. 서로를 정죄하지 마십시다. 좀 더 따뜻하게 서로가 서로의 손을 꼭 쥐어주십시다. 그리고 함께 일어나십시다. 우리는 새로운 조국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반드시 새로운 조국을 건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됨을 외쳤습니다. 모두가 그 말에 동감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정죄하는 것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손에 손을 쥔 힘을 더 쥐었습니다. 따뜻하게 손을 잡고서 함께 일어났습니다. 쓰러진 조국을 건설했습니다. 결국은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주신 시대적인 사명이 많습니다. 전도와 선교의 사명, 교회 재건축의 사명도 있습니다. 교회의 장막터를 넓혀야 할 사명도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서로가 서로를 더욱더 사랑하고, 서로의 손을 따뜻하게 잡고서 함께 일어나서 힘차게 걸어가십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늘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우리가 해야할 모든 일들을 친히 주관하시며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나도 부족하고 너도 부족하고 다같이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랑으로 이미 창세 전에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한 지체가 되도록 불러주셨습니다. 은혜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였던 스펄젼 목사님이 어느 교회에서 집회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청년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소연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교회 생활 때문에 너무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제게 완벽한 교회 하나만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그 교회에 가서 일평생 동안 신앙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완벽한 교회 하나를 소개시켜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때 스펄젼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만일 젊은이가 그런 교회를 찾거들랑 내게도 좀 알려주게나. 나도 그런 교회에 가서 신앙 생활을 하고 싶다네. 그러나 만일 자네가 그런 교회를 찾거들랑 자네는 절대로 그 교회를 등록하지 말게. 왜 그런 줄 아는가? 자네가 그 교회 문턱을 들어서는 순간에 그 교회의 완벽함은 깨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일세."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부족합니다. 그런 우리들을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 불러주셨습니다. 은혜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잘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다. 아들이 아버지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이놈아, 네 행실을 다 고치고 완전한 사람이 되기 전에는 나는 너를 절대로 받아줄 수 없다! 먼저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난 뒤에 내가 너를 받아주겠다."
그렇게 말했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는 있는 그대로 아들을 받아주었습니다. 아들이 거지가 되어 왔습니다. 추하고 더러운 모습으로 왔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그대로 용납해 주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우리의 형제가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사랑으로 용납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또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는 이 네 가지 자세가 우리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잘 지키는 가운데 교회의 머리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고, 또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크게 영화롭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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