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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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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9-11) 

고전15:9-11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어떤 시골 교회에 여자집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집에서 많은 돼지를 길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흠이라고 하면 너무 욕심이 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그의 집에서 기르는 돼지 가운데 한 마리가 여덟 마리의 새끼를 낳았습니다. 목사님은 그 소식을 듣고 축하해 드렸습니다.
"집사님, 축하합니다. 새끼를 여덟 마리나 낳았다면서요? 많이도 낳았네요."
그러자 그는 시무룩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여덟 마리가 뭐가 많습니까? 옆집의 돼지는 새끼를 열두 마리나 낳았다는데요."
그 소리를 듣고 목사님은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며칠 뒤에 그 여집사님이 기르는 돼지들 가운데 다른 돼지가 또 새끼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열네 마리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이제는 만족하시지요? 새끼를 열네 마리나 낳았으니까요. 정말 하나님의 은혜네요."
그런데 그는 조금도 기쁘지 않는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열네 마리가 뭐 그리 많습니까? 한 스무 마리쯤 되면 모를까?"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은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그를 좀 깨우쳐주어야 되겠다는 심정으로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집사님, 제가 보기에 집사님은 돼지보다도 욕심이 더 많으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는 놀란 토끼눈을 하고서 목사님에게 되물었습니다.
"아니, 목사님 어떻게 돼지와 저를 비교해서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목사님은 모른 척 하고서 말을 계속 이어 나갔습니다.
"집사님, 보세요. 돼지가 아무리 욕심이 많은 짐승이라 해도 구정물 한 통만 다 먹고 나면 만족할 줄 압니다. 그런데 집사님은 도무지 만족이 없지 않습니까? 집사님의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그러니 집사님이 돼지보다도 욕심이 더 많을 수밖에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아도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좋은 일이 생겨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는 사람은 이것도 감사하고 저것도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글을 읽어보니까 물고기의 IQ, 곧 지능지수는 0.3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로 옆의 동료가 낚시 바늘에 걸려 발버둥치면서 끌려가는 것을 보고도, 물고기는 그것을 잊어버린 채 또 다시 입질을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우스개 소리로 우리나라의 정치인의 IQ도 0.3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동료 정치인이 뇌물을 먹고서 감옥에 끌려가는 것을 보고서도 뒤돌아 서서 또 다시 뇌물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뇌물을 먹고 감옥에 끌려간 정치인은 10년 전에도 있었고,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습니다. 그 일은 내일도 계속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정치인의 지능지수가 고작 0.3밖에 안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적인 IQ는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까지 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과연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슨 일을 조금 잘하면 내가 잘나서 그런 줄 알고, 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 것처럼 쉽게 낙심해 버리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셨고 지금도 베풀어주고 계시건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갈 때가 너무나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기억하면서 살도록 매년 삼대절기를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첫째 절기는 유월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종살이하던 애굽 땅에서 해방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부활절로 바뀌어졌습니다. 사망의 권세에서, 죄의 종에서 해방 받은 것을 감사하면서 지키는 절기입니다.
둘째 절기는 맥추절입니다. 봄 추수를 끝나고 난 뒤, 한 해의 전반기를 하나님의 은혜로 보내게 된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키는 절기입니다.
셋째 절기는 수장절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추수감사절입니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난 뒤, 하나님이 1년 동안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키는 절기입니다.
오늘 우리는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이 뜻깊은 주일을 맞이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감격하면서, 그 은혜에 보답하는 심정으로 일평생 주를 위해서 충성했던 한 인물인 사도 바울의 삶을 우리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는 오늘 본문 10절 한 절 말씀 속에서 은혜라는 단어를 세 번씩이나 사용했습니다. 이 한 가지만 보더라도 사도 바울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있었는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서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심정으로 더욱더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의 삶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 우리에게 설명하면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내가 그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는 심정으로 우리의 여생에 더욱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직분과 사명에 충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바울의 과거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9절 말씀입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바울은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위대한 사도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곳곳에 많은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는 신약성경의 절반을 기록했습니다. 주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순교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본문에서 자기를 가리켜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불렀습니다. 심지어는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라고 까지 표현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과거에 그가 지은 죄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본시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원수된 자였습니다.
딤전1:13에서 바울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훼방자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악행을 가했던 포행자였습니다. 과거에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 그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참으로 감격하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롬5:20의 말씀처럼 죄가 더한 곳에 은혜는 더욱 넘치기 마련입니다.
영국의 대문호였던 셰익스피어가 한 번은 친구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 친구는 자기의 얼굴을 그린 자화상 두 장을 벽에 걸어놓고 있었습니다. 친구는 셰익스피어에게 그 그림을 보여주면서 어떠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마음 속에 친구를 놀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자화상을 물끄러미 쳐다보다니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자네의 두 자화상 가운데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을 붙이면 더 좋을 것 같네."
그러니까 셰익스피어의 의도는 무엇이었습니까? 친구의 두 얼굴이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편에 있는 강도들처럼 보인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친구는 셰익스피어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감히 자기를 예수님의 모습과 견주어서 말해준다고 황송해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제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니 은혜를 많이 받아도 은혜인 줄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18세기 영국에 존 뉴턴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불량한 청년이었습니다.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그를 바르게 고치기 위해 영국의 해군에 입대를 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군대의 엄격하고 규칙적인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탈영을 해버렸습니다. 그는 체포되어 실컷 매를 맞고서 영창에 갇혔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조금도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화가 난 함장은 그를 아프리카 노예선에 팔아 넘겨버렸습니다.
그는 15개월 동안 아프리카의 어느 작은 섬에 갇혀서 노예처럼 비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극적으로 영국 무역선에 구조되어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노예선의 선장이 되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잡아다가 팔아 넘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바다 위에서 심한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그는 다 죽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고꾸라졌습니다. 그리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뒤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의 어두웠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이 그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너무나도 감격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찬송가 405장 "Amazing Grace"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그는 일평생 동안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죽는 그 시간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고 또 전했습니다. 그가 남긴 말씀 가운데 특별히 두 가지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는 종종 설교시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다음에 내가 천국에 가면 세 가지 때문에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첫째는 그곳에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그곳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놀랄 것이고, 둘째는 그곳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며, 마지막으로 나 같은 죄인이 그곳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
사실 천국은 바리새인처럼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리와 창기처럼 겸손하게 자기의 죄를 뉘우치면서 회개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큰 죄인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런데 나같은 죄인이 천국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깜짝 놀라게 되고 말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기억력이 쇠퇴해졌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종종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다른 것을 다 잊어버린다 할지라도 나는 이 한 가지만큼은 결코 잊어버릴 수 없다. 그것은 내가 과거에 너무나 큰 죄인이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지나간 삶을 돌이켜 보십시다. 우리도 역시 큰 죄인이었습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습니다. 용서받기 어려운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발걸음을 에벤에셀로 지금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의 현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0절 상반부 말씀입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바울은 본시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변해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영광스러운 직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오늘 말씀 속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사도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하고, 그 증인이 되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언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했습니까? 본시 그는 예수님을 믿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불신자였습니다. 오히려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습니다. 그런 바울에게 언제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까?
우리가 고린도전서 15장을 일명 "부활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분명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고전15:3∼8을 읽어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의 모습을 바울에게 나타내 보이셨다는 사실을 그는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 언제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사도행전의 기록에 의하면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적어도 세 번은 만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도행전 9장에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은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았습니다.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붙잡아오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이때는 예수님이 이미 승천하신 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특별히 바울을 위해서 부활하신 모습으로 다시금 나타나셔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정말 특별하신 은혜였습니다.
두 번째는 사도행전 18장에 나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였습니다. 밤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18:9∼10에 나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세 번째는 사도행전 23장에 나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공회 앞에 섰습니다. 그때도 밤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금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23:11의 말씀입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은 본시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영광스러운 직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받은 사명과 직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 교회 제 8대 담임목사님이었던 김익두 목사님은 본시 소문난 깡패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조직폭력배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새 사람이 되고 난 뒤 평소에 자기가 괴롭히던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과거에 여러분을 괴롭히던 김익두는 이미 죽었습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은 새롭게 거듭난 김익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저처럼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이 되십시오."
하루는 어떤 아주머니가 그를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정말로 김익두가 죽었는지 어디 한 번 확인해 봅시다."
그러면서 그는 바가지에 찬물을 가득 담아서 지나가던 김익두의 얼굴에 끼얹었습니다. 그러자 김익두는 빙그레 웃으면서 아주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지금도 아주머니가 그 자리에 살아 계신다는 것이 김익두가 죽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뒤에 김익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를 간증했습니다. 김익두가 말을 잘해서 대부흥사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언제나 확신에 찬 음성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도 버리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나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새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물며 여러분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저처럼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천국을 선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 맞다 맞아. 하나님께서 김익두 같은 사람도 사랑하신다면, 나 같은 사람도 틀림없이 사랑하실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감화를 받아 예수님 앞으로 몰려오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본시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김익두는 본시 깡패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목사가 되고, 부흥사가 되고, 총회장이 되고,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된 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직분,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사명은 내가 잘나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의 미래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살아온 과거가 있고, 살고 있는 현재가 있으며, 살아야 할 미래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다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자기의 미래를 어떠한 심정으로 살아가기를 바랐습니까?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시116:12에 기자의 말씀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그 은혜에 보답하는 심정으로 살고자 했습니다. 10절하∼11절입니다.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바울은 그 어떤 사도보다도 더 많이 수고하였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는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매도 수도 없이 맞았으며, 감옥에도 여러 번 갇혔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수도 없이 많이 받았습니다. 때로는 춥기도 하고 굶주리기도 하고 헐벗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수고를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했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잘 되고 형통해야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건강했다가 회복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실패했다가 성공하고 난 뒤에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수고,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성공만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습니다. 실패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건강한 것만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병약한 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찌르는 육체의 가시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여겼습니다.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는 것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핍박을 받아 매를 맞아 감옥에 갇히는 것조차 하나님의 은혜로 여겼습니다. 바울에게는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죽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위해 로마의 영문 밖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기쁜 마음으로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미 하나님이 우리에게 족한 은혜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늘 무엇인가 부족한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이제 우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족한 줄 알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하면서 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여순 반란 사건때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 동인이와 동신이가 죽었습니다. 같은 나이 또래였던 공산당원 안재선군에 의해서 살해를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손목사님은 두 아들의 영결식 자리에서 조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느낀 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커서 감사의 조건을 제가 적어왔습니다. 이것을 읽음으로서 이 시간 답사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아홉 가지로 감사의 조건들을 적어서 읽었습니다.

"1.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을 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2.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 어찌 이런 보배를 내게 맡겨 주셨는지 감사합니다.
3.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합니다.
4.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두 아들이 순교하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5. 예수 믿다가 누워서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가 총살 당하여 순교함을 감사합니다.
6.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7. 내 사랑하는 두 아들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마음주시니 감사합니다.
8. 내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감사합니다.
9. 이와 같은 역경 속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을 수 있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는 뒤에 자기의 원수와도 같은 안재선군을 용서하고 자기의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안재선군을 목사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손양원 목사님을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또 사도 바울처럼 늘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그저 그 은혜에 보답하는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따지고 보면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결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그 무한하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꼬?"라는 심정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더욱더 충성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우리에게도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마음 속에,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일터에, 우리의 교회에, 감사의 꽃이 아름답게 활짝 피어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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