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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과거와 현재 (엡 2:1-10)

  • 잡초 잡초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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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과거와 현재 

(엡 2:1-10)

(엡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2: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날 인류의 역사를 말할 때, B.C.와 A.D.로 나눕니다.
B.C.는 'Before Christ'라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전의 시대를 말하고, A.D.라고 하면 라틴어로 'Ano Domini (In the year of our Lord)'라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이후의 시대를 말합니다.
역사가들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이 인류 역사의 분기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전과 이후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에 이런 분기점이 있듯이, 우리 개인의 삶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것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1-3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삶, 다시 말해서 우리의 과거에 대한 말씀입니다.

크게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그 때 우리는 죽었었다고 합니다.

여기 1절에 "너희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여기서 '죽었다'는 말은 육체적으로 죽었다는 말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말해도 전혀 듣지 못합니다. 또 죽은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표정도 없고 느낌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행동은 전혀 기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과는 인격적인 교제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가끔 장례식 때 가끔 죽은 사람을 부등켜안고 울며 무어라고 말하는 광경을 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도 하나님과 전혀 교제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께 말도 못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아무런 반응도 못하고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은 이런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습니까?
여기 보면 "너희 허물과 죄로..."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여기 '허물' 이라는 말 'paravptwma'(파라프티마)는 길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 놓으신 법이 있는데 그 법을 어겼음을 말합니다.
가령,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거짓말 한 것이라든지, 도적질하지 말라 하셨는데 도적질한 것,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하셨는데 남의 것을 탐냈던 것 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 '죄'라는 말 'aJmartiva'(하마르티아)는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지 못했음을 가리킵니다.
가령,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은 다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죄와 허물 때문에 우리가 과거에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과거는 죽은 것이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숨을 쉬고 움직이니 살아있는 것 같지만 영적으로는 다 죽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여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라는 말씀처럼 의로운 삶을 살지 못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의 과거,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상태는 사로잡힌 상태, 곧 노예가 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2)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세 가지 면에서 노예적인 삶을 살았는데, 하나는 세상 풍속을 따르는 데에 있어서, 또 하나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마귀를 따르는 일에 있어서, 그리고 세 번째로는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데에 있어서 노예상태에 있었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과거에 예수 믿기 전에 얼마나 세상 풍속을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까?
세상이 다 인줄 알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면 나도 따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이 가지면 우리도 다 가져야 하고, 세상 유행에 또 얼마나 민감합니까? 우리 나라 사람들처럼 세상 유행에 민감한 민족이 없을 정도로 우리는 더욱 세상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기준과 가치관이 세상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세상에 잘 보이고 세상에 뒤지지 않을 것인가만 생각합니다.
그것이 다 세상의 노예가 된 상태라는 말씀입니다.

또 우리는 얼마나 마귀사탄의 노예가 되었었습니까?
우리는 과거에 예수 믿기 전에 우리 마음대로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다 마귀 사탄의 조종을 받은 것입니다.
그가 공중의 권세를 잡고 이 세상을 통해 우리를 조종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철저히 마귀 사탄의 조종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합니다. 교묘하게 기독교를 훼방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이 하나님과 가까워지지 못하도록 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노래라든지 영화, 잡지라든지 책을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철저히 마귀 사탄의 조종을 받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영혼을 파괴하여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듭니다.
우리도 과거에 예수 믿기 전에는 그런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욕심의 종이었습니까?
사탄이 우리의 욕심을 이용해서 죄를 짓게 합니다. 욕심의 종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배고프다 하면 먹어야 하고 목마르면 마셔야 하며, 성적인 욕구가 생기면 반드시 그 욕구를 충족하도록 만들며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합리화시킵니다.
그래서 결국은 육체의 욕심에 대해서 절제하지 못하도록 함으로 욕심의 종이 되게 합니다.
욕심이 생기면 절제하지 못하고 그것을 꼭 이루어야 하는 노예의 상태에 머무르게 됐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척 무서운 말입니다.
우리가 진노의 자녀, 곧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존 에드워즈(John Edwards)라는 목사님은 그의 설교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설교에서 불신자(Non-Christian)을 '타오르는 불길 위에 있는 거미줄에 매달려 있는 거미'에 묘사했습니다.
그 거미가 구원받지 못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는 너무나도 뻔한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의 운명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듣기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옥이라든지 하나님의 진노라든지 하는 말은 공포분위기 조성한다고 싫어합니다.
사실 저도 그런 말을 해서 예수님을 믿게 할 마음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도 지옥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이 세상에서는 호이호식하고 떵떵거리며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지옥불에서 고통당하는 모습을 아주 자세히 묘사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실제 일어난 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로라는 거지의 실명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무섭습니다. 지옥은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예수를 믿지 않을 때는 영적으로 죽었고, 세상과 마귀, 욕심의 종이 되었으며,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두려운 상태에 있었던 우리들임을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이후, 현재는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4-10절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의 과거에 대한 묘사는 석 절로 줄이고 우리의 현재에 대한 묘사를 일곱 절이나 한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지나간 과거를 장황하게 늘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또다시 언급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처해있는 현재의 삶과 비교하기 위해 잠시 이야기 한 것 뿐, 현재를 더 길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여기 5절에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살았다는 것입니다.

은혜로 그렇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프다가 나은 사람 정도가 아닙니다. 죽었다가 다시 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아프다가 나았어도 감사합니다. 저는 가끔 몸살 감기를 일주일 정도 앓다가 나으면 얼마나 살 것 같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입원해있고, 수술을 받아 주사바늘 꽂아놓고, 코에 호흡기를 연결해 놓은 것을 보면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퇴원하는 날에는 다 나은 것 같고, 날아갈 것 같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프다가 나아도 날아갈 것 같고 좋은데,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면 얼마나 더 좋습니까?
우리의 현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5절 하반 절에 보면,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이 구원은 노예상태에서부터 해방된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노예상태로부터, 사탄의 노예상태로부터, 욕심의 노예상태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에서, 지옥 불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의 조종사들이 중국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도 T.V.를 통해 그들의 모습을 보았는데 얼마나 기뻐하든지요.
그들뿐 아니라 가족들, 아니 전 미국이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화재 현장에서 구조를 받은 사람이나, 물에 빠졌다가 건짐을 받은 사람, 지진의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얼마나 기뻐합니까?
오늘 우리들이 영적인 속박에서 해방을 받았고 엄청난 재난과 같은 비참함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또 앞으로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여기 6절, 7절에 보니, 장차 우리에게 이루어질 놀라운 축복들이 있습니다.
장차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비하심으로 우리에게 나타내 주시고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아까 말한 미국의 조종사들,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영웅취급을 받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영웅취급을 받고 영웅대접을 받으면서 말할 수 없는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우리와 얼마나 대조되는 모습입니까?
예수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큰 변화를 일으킵니다. 예수를 믿으면 갑자기 얼굴이 변하거나 집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인 변화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이것을 말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에베소 사람들이 자신들의 육체적인 처지만 보고 낙심하는 것을 일으켜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을 믿어도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지않고 오히려 환난과 핍박이 닥치지만 영적으로 보면 이런 존귀한 자, 복을 받았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격려와 힘을 받아 계속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동시에 당시 에베소 교회는 교회에 나오기는 하지만 아직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에 머무르고 세상의 풍속을 좇으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공중에 권세잡은 자 마귀의 조종을 받아 살며,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 상태대로는 안되고,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도 예수는 믿지만 세상에 나가면 "예수님이 밥을 먹여줍니까? 세상에서 알아줍니까? 사회적이 변화가 있습니까? 실직한 사람이 직장에 복귀가 됩니까? 아픈 사람의 병이 즉시 다 낫습니까? 죽을 사람이 죽지 않습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은 믿지 않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역사가 B.C에서 A.D로 바뀐 것처럼 우리 생애도 예수 믿는 그 순간은 영적으로 살아남습니다.
우리 사람은 육체적인 생명만 가진 것이 아닙니다. 육체적인 생명은 언젠가 다 쇠하게 되고,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생명을 가진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요즘이 씨뿌리는 계절인데, 농부가 씨를 뿌리면 씨가 땅속에 묻혀 다 죽는 것 같지만 그곳에 생명이 있으면 다시 싹이 돋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우리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죽어도 다시 사는 줄을 믿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사회에서도 복음을 따라 살고 환경과 여건을 무시할 수 없지만 이 세상에 발을 디디고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믿는 사람은 마귀를 호령하는 사람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고 명령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건전한 욕심이 있지만 욕심에 지배당하지 않으며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소망하며 살아갈 수 있는 축복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이것으로 육체적인 환경을 이길 힘을 얻고 격려를 받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분이 있다면, 큰일입니다. 어떤 분은 예수믿기 위해 교회에 나옵니다. 10년동안 예수 믿으려고 교회 나오면 언제 예수를 믿습니까? 교회 나오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자신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를 믿는 것은 인격과 마음을 열고 내 안에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 내 안에 오셔서 나의 주가 되어 주시옵소서" 영으로 함께 하시는 주님께 이런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이 순간이 영적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며, 세상과 마귀와 욕심에서 해방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칭찬과 영광과 존귀로 옮겨지는 순간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해서 과거와 현재가 분명히 차이가 나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이런 현재를 주셨습니까? 그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첫 번째 대답은 크신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4절, 5절을 봅시다.
(4)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하나님은 긍휼에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바로 그 사랑 때문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또 세상과 마귀와 정욕의 노예가 된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은혜로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전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여기 8절,9절에 무어라고 했습니까?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랑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것이 자기가 그래도 좀 나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착각합니다.
절대로 우리는 구원받을 조건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완전히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종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굉장해도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값없는 은혜로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킴으로 값을 다 지불하여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과거의 나를 아는 현재의 우리는 감사하고 찬양할 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제는 이런 찬미의 삶을 살으라고, 현재의 구원받은 자리로 옮겨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옛 속담에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면 내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고 과거의 비참한 자리로부터 구원해주셨는데,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불평하지는 않습니까?

그 다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구원받았다고 했습니다.
(10)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래서 루터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선행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선행을 위하여 구원을 받은 것이다"
(We are not saved by good works, but for good works.)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는 선한 일을 나타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마 5:16의 말씀처럼, 등경 위에 있는 빛이 아래 동네를 다 비추는 것처럼 우리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 비참한 과거에 있던 우리를 영광스런 현재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지금의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이것이 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은혜와 복입니다. 이제 우리 입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나오고 우리의 손과 발로는 선한 행실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아직 비참한 과거에 있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비밀을 알림으로 이 영적 축복을 같이 누리도록 강권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바라기는 이런 복스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뤄나가는 일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이웃들에게 복된 소식 전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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