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상처받은 자의 치유 (눅 10:30-36)

  • 잡초 잡초
  • 770
  • 0

첨부 1


상처받은 자의 치유 --- 누가복음 10:30-36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큰 과제는 건강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 또 영광을 누린다 하지만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건강하게 살아야 행복할 수도 있고 건강하게 살아야 많은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저마다 속에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성한 사람이 없습니다. 거의 다 병을 가지고 괴로워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병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영혼의 병이 있고, 정신적인 병이 있고, 육체적인 병이 있습니다. 최초에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은 그 영혼이 병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전치 못한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또 그 영혼이 병들므로 말미암아 인간의 감정과 정신이 병들어서 서로 갈등하고 정상적으로 살지 못하고,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괴로워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내적인 질병 때문에 육체에도 질병이 와서 다 병들어 죽고 또 살아있어도 일생동안 성한 곳이 없이 괴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볼 때 모든 사람들을 죄인으로 보지만 또 한편으로는 병든 환자로 보고 있습니다. 죄인으로 볼 때는 구원받는 사건이 최고로 큰 사건입니다. 그러나 환자로 볼 때는 치유하는 사역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병의 원천이 죄에서 출발된 것을 보았고, 또 근본적인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하지만 일생동안 계속해서 완전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 곧 건강하게 살도록 치유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3대 큰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마 9:35). 병든 자를 고치시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의 완성이었습니다.
건강은 외적인 몸이 튼튼한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인 건강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전인 건강은 영혼이 건강하고, 정신이 건강하고, 육체가 건강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의학은 외적인 치료에서 끝나는 것이 내적인 치료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질병의 원인을 영혼이 병든 것에서 보기 때문에 그 영혼과 마음과 육체를 동시에 치유하는 전인 치유에 보다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은 "병든 인간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의 병을 고쳐서 건강하게 해 주마" 이것에 대한 약속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는데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반 죽은 것을 내버려 두고 갔습니다. 그런데 여기 비유에 보면 마침 제사장이 지나갔으나 피하여 갔고, 레위인도 지나갔으나 피하여 갔고, 사마리아인만 그를 불쌍히 여기고 가까이 가서 아픈 상처를 기름과 포도주로 싸매고 나귀에 태워 주막집에 데리고 갔습니다. 가서 밤새도록 돌봐주고 다음날 떠나면서 주막집 주인에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잘 돌봐주시오. 내가 돌아와서 당신의 모든 수고를 갚으리이다." 하고 두 데나리온의 돈을 맡기면서 떠났습니다.
이 간단한 비유 속에서 말씀의 핵심을 보면 상처난 인간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상처받은 인간들, 강도 만나서 신음하고 탄식하는 인간들에게 치유의 손을 펴셔서 고쳐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2천년 전에도 하셨고 지금도 그 치유의 사역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강도 만난 자가 누구입니까? 여기서는 어떤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인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강도 만난 자와 같습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마귀라는 강도가 들어와서 우리의 영혼을 거반 죽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심령이 강도 만나면서부터 인간은 양심을 잃어버리고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자신을 보나 세상을 보나 인간은 모두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거반 죽게 되었다'는 것은 정신과 육체가 다 상처를 입어서 신음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사장이 그냥 지나간 것에 대해서 '제사장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제사장 나쁜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또 성서 학자들은 제사장이 바빠서 그냥 갔다고 얘기하지만 깊은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라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고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레위인도 양심이 있고 제사장도 양심이 있지만 가봤자 소용 없으니까 그냥 간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를 치료할 수 있는 재료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기름과 포도주였습니다. 당시에 포도주와 기름은 나그네들에게 여행 경비로 쓰였지만 상처난 자에게 포도주는 소독약이 되고 기름은 새 살을 낼 수 있는 치유약이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이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주막집에 데리고 가서 주막집 주인에게 돌봐달라고 맡겼습니다. 
이것은 어떤 강도 만난 자 한 개인에 대한 얘기가 아니고 예수님이 상처난 인간들을 위해 친히 십자가 상에서 피를 흘리셔서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그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인간들에게 치유하는 기름부음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의 십자가에 피흘림이 우리를 치유하고 있는 것이며 그 성령의 기름부음이 우리의 상처난 심령들을 치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나음을 입었다'는 말은 우리의 모든 상처가 치유받았다는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상처는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물론 외적인 상처, 교통사고라든지 어떤 불의의 사고로 인해 상처를 입는 것도 있지만 어린시절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형제들로부터 받은 상처, 아내와 남편으로부터 받은 상처, 직장 상사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상처로 인해 정상적인 생각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같이 신앙생활 하지만 오래 믿은 권사님이나 집사님 중에 성격 장애가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상처 때문에 이루어진 인간의 잘못된 개성입니다. 이것을 고쳐야 되는데 생각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믿습니다' 하면 구원받는 천당은 가지만 일생동안 그것을 안고치고 사니까 자기도 괴롭고 남도 괴롭습니다. 부부간에 한바탕 웃으며 살지 못하고 서로 상처를 주면서 살아야 하는 이 비극이 인간에게 존재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우리 모두 다 은혜를 받아서 내 속에 잠재된 상처들이 치유받는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곰곰이 자기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내가 어떤 상처를 가지고 있는가 자기는 말 안하고 있지만 다 상처들이 조금씩 있습니다. 자식으로부터 상처받은 부모가 그 상처 때문에 평생 눈물로 보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며느리는 시어머니로부터 상처 때문에 일생동안 얼굴 한번 펴지 못한채 살아가는 불쌍한 여인도 있습니다. 어렸을 때 선생님으로부터 상처받은 한 어린 아이가 평생을 기를 펴지 못한채 인생을 폐인처럼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강도 만난 자의 비유는 우리 모든 인간들을 치료하시는 주님의 신비한 비밀을 그 속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예수님을 만나서 강도 만난 우리의 상처들들이 다 싸매어지고 치유되고 건강해지기를 바랍니다.

첫째, 환자는 먹어야 합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려면 잘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최고의 보약은 밥이다." 병든 환자에게는 영양이 중요합니다. 어렸을 때 영양 섭취가 제대로 안되면 발육이 안됩니다. 다음은 병을 미리 예방하는 치료제가 중요한 것입니다. 병들어서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요즘은 예방하는 약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건강하게 살려면 3대 영양소를 먹어야 됩니다. 첫째, 몸을 위해서 좋은 음식을 먹어야 됩니다. 지금은 영양실조는 없지만 그래도 나이에 따라서 필요한 영양을 섭취하는 것이 건강에 좋습니다. 두 번째, 정신건강을 위해서 사랑을 먹어야 합니다. 가족과 이웃의 만남을 통해서 서로 사랑하면 강렬한 생명의 힘이 솟아오릅니다.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녀는 어렸을 때부터 눈동자가 빛이 납니다. 남편으로부터 사랑받는 아내는 얼굴에 화기가 있습니다. 세 번째, 창조주가 주시는 신비의 영양을 먹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말씀입니다.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전인적인 인간의 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양소입니다.
우리는 육체적인 건강을 위해서 자연이 주는 음식을 잘 먹어야 되고, 정신적인 건강을 위해서 사랑을 잘 먹어야 되고,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 영의 양식을 잘 먹어야 됩니다.

건강한 사람은 소화가 잘 되기 때문에 아침에 먹고, 점심에 먹고, 저녁에도 먹습니다. 그런데 환자는 몸이 아프니까 잘 먹지 못합니다. 환자는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쉬어야 됩니다. 안식을 얻어야 됩니다. 주막집은 나그네들이 쉬어가는 곳입니다.
C.G.Jung은 "신비의 힘은 중년에 들어선 이후의 인간 건강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라고 했습니다. 중년 이후의 병은 영적인 영양 결핍에서 옵니다. 그래서 중년 이후에 잘 먹는 것도 중요하고, 운동도 중요하지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신비한 영양을 먹지 않으면 중년의 공허한 마음을 메꿀 길이 없고 그 무의미를 살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신비한 영양은 예배, 기도, 찬송, 말씀으로 얻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성도는 상처가 있을 때 말씀의 칼로 찔러 수술을 해서 치료해야 합니다.

둘째, 환자는 안식을 얻어야 합니다.
옛날 주막집은 길가던 나그네들이 날이 저물면 잠시 쉬어가는 곳입니다. 배고프면 요기하고 가고, 비바람이 몰아치면 비 피해 가고, 상처난 사람들은 상처를 치료하고 가는 곳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인생 나그네들이 힘들 때 찾아오는 곳이 주막집입니다.
교회는 인생 나그네 길에서 상처난 인간들이 쉼을 얻는 주막집과 같습니다. 목사는 예수님이 맡겨 준 환자를 돌보아주는 주막집 주인과 같습니다. 
우리 마음의 뚜껑을 열고 보면 신음소리 안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전부 다 상처의 신음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죄인이 예수 믿으면 의인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이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늘나라에 가는 의이지 자기가 완전해지는 의는 아닙니다. 죄없다 간주해주는 의일 뿐이지 내가 의로워지는 의는 아닙니다. 내 속에 있는 죄의 상처들이 그대로 남아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서로 환자라고 생각할 때 그 고통을 치유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야 합니다. 장로님이나, 권사님이나, 목사나, 성도들이 찬송 잘하고 기도 잘한다고 해서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고, 인간 관계가 화목합니다. 이것이 다 건강한 상태인데 집에서 부부간에 싸우는 것은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상처가 있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그 상처 때문에 자기도 아프니까 남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하나 병들어 있으면 그 자식만 아픈 것이 아닙니다. 그 신음소리 때문에 어머니의 간장도 녹습니다. 같이 아픕니다. 그러니까 치유해야 됩니다. 한 사람이 건강해지면 다른 사람도 더불어 건강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이런 은혜를 받아서 안식을 얻을 때 내 마음의 상처들이 다 아물고 치유될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우리 어머니는 너무 너무 살기가 힘드셨습니다. 먹을 것도 없죠, 남편 사랑도 못받죠, 살아준 것이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머님에게도 얼굴에 활기를 띠는 날이 있었습니다. 친정 가는 날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외가에 가면 밤 세워가며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시댁 흉을 봤습니다. 그러면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밤새도록 눈물을 흘리며 우리 어머니의 괴로운 사연을 다 들어주시고 어머니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제가 세월이 흘러 목사가 된 후에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생활은 시집살이와 같습니다. 지치고, 피곤하고, 병들고, 상처입은 사람들이 교회에 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친정 아버지 같은 분이시고 성령님은 어머니 같으신 분이시고 교회는 친정집과 같은 곳입니다. 여기 와서 하나님 앞에 우리에게 맺힌 한을 기도로 푸십시오. "아버지 하나님, 너무 살기가 힘듭니다." 그때 성령께서 감동하십니다. "참아라. 참다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친정집과 같은 이 교회에 들어올 때 여러분의 가슴속에 맺힌 수많은 상처들이 말없이 빠져나갑니다. 그러기에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스트레스를 얼마나 많이 받습니까? 진학의 스트레스, 가정에서 받는 스트레스,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 이런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치료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이것이 스트레스를 푸는 것입니다.
셋째, 환자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일으킬 때 의식이 있었겠습니까 없었겠습니까 의식이 없었습니다. 나귀에 태울 때도, 상처에 포도주와 기름을 부을 때도, 주막집에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아픈데 치료해 줄 때도 그 사람은 누가 치료하는지 몰랐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를 주막집에 맡겨놓고 다음날 주막집을 떠났습니다. 강도 만난 자는 누가 자신을 치료해 준 줄도 모르고, 누가 살려준 줄도 모릅니다. 다음날 주막집 주인이 그 사람을 돌볼 때에야 비로소 눈을 떴을 것이고 의식이 돌아왔을 것입니다. 눈 뜨고 정신 차렸을 때 자신의 처지를 보고 얼마나 분노가 났겠습니까 평생 모은 재산 강도에게 빼앗기고, 몸은 나았다고 하더라도 한맺혀 죽을 일이죠. 상처가 너무 커서 평생 장애자로 살아야 할 처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경우에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아무 죄도 없는데 내가 교통사고로 불의의 장애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 내 사업을 사기쳐서 빼앗아 간 그 사람이 얼마나 밉겠습니까?
그때 주막집 주인이 한마디를 합니다. "여보시오. 당신 속에 억울한 것이 많겠지만 한 가지를 기억하시오. 산 것이 기적이오. 당신이 강도 만난 골짜기가 어느 골짜기인줄 아십니까 도적떼가 우굴거리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당신을 살려 여기까지 데려온 사람은 어떤 사마리아인인데 그 분은 나에게 당신을 맡겨놓고 떠났소. 당신은 그 은혜를 입은 자요. 내가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라 그 분에게 은혜를 입었는데 그 은혜 한가지만 가지고도 세상을 당당하게 사시오."
그때 강도 만난 자가 잃어버린 것, 억울한 것 많이 있겠지만 '나 이제 생명 있음은 주님의 은혜라' 이 노래를 부르면서 생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주막집 주인이 강도 만난 자를 돌보아 주는 일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에게 베풀어 준 은혜를 알려주는 일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강도 만나 잃어버리고, 상처나고, 신음하고, 탄식하는 억울한 것들이 수없이 내 속에 내재되어 나를 불행하게 만들어 갈지라도 하늘로부터 내려와 십자가에 달려 피를 쏟아 나를 치유해주시는 주님을 기억하십시다. 주님이 창 찔리고, 가시 찔리고, 못박힌 것은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를 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주님의 은혜 한가지만으로도 내 영혼과, 정신과, 육체가 치유됩니다. 우리의 병은 약으로 고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고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병이 나갑니다.
성탄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아기 예수로 오신 것은 십자가에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그 주님의 은혜가 우리 병을 다 치유해서 건강해지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