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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 / 마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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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 /  마태복음 5:20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좋은 일도 많지만 손해를 보는 일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건강을 잃어서 손해 볼 때도 있고, 재물을 잃어서 손해를 볼 때도 있고, 억울하게
명예가 훼손되어 손해를 보는 상황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 가운데서
가장 큰 손해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세상을 살면서
당할 수 있는 가장 큰 손해는 제가 보기에 천국을 놓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사실을 잘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서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언뜻 들으면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고대광실 같은 집을 지어 놓고, 세상에 있는 모든 부귀 영화를 다 끌어다가
혼자 누리고 살면서, 모든 매스컴이 날마다 떠들어 댈 정도로 대단한 명예를 누리기까지
하는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 아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다 아는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반복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다음 절과 비교해서 볼 때 그 안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온 천하를 자기 것으로 소유한다 할 지라도 천국을 들어가지
못하면 그것이 무슨 소용 있는가? 영생을 얻지 못하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손해는 천국을 놓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괴로운 비극은 천국 문 앞에서 거절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사실을 아주 실감나게 표현하셨습니다. 틀림없이 들어갈 줄 알고 천국에 왔는데
문을 닫으면서 '너는 안돼.'라는 말을 듣는 사람은 영원토록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를 가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런 일을 한번도 당해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글을 읽으면서 비로소 '아, 이 말이 그 말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이 한이 맺혀서 분을 풀지 못하면 자기도 모르게 이를 간다고 합니다. 아마
예수님은 가장 원통한 일을 당하여 고통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육체적인 반응 가운데
이를 가는 것이 그의 원통함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라고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천국을 놓치는 것이 우리에게 영원토록 회복될 수 없는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는
것임을 새삼스럽게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본문 말씀에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너희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도 못하면,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온다.' 주님이 '결단코'라고 하는
강한 용어를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연계해서 사용하신 경우는 딱 두 번입니다. 한 번은
이 본문이고, 다른 하나는 "너희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갈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천국의 주인이시오, 생명과 죽음을 좌우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결단코'라는 말을 쓰십니다.
이 말이 헬라어로는 우메(oume)입니다.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가슴이 뜨끔하지 않습니까? 어떤 성경학자가 이 본문을 가지고 한 말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대단히 무서운 말씀인데 이 말씀을 왜 하셨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서 "기독교는 절대로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했기 때문에, 예수만 믿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적당하게
신앙생활 하고, 적당하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세상을 살아도 되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주님이 가르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절대 쉬운 종교가 아닙니다. 천국에 결단코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못 들어갑니다. 누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서기관들이 내세우는 의보다도 더 나은 의를 가진 사람, 바리새인들이 자랑하는 의보다도
훨씬 더 나은 의를 가진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더 낫다' 하는 말은
원래 물이 둑을 넘어서 넘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가
둑이라고 한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의는 그 둑을 훨씬 넘는 물과 같은
의라야만 하기 때문에 비교가 안 될 만큼 우위에 속하는 의를 소유해야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자신 있습니까? 우리 자신에게 한번 냉정하게 물어 봅시다.
나는 천국 들어갈 수 있다고 안심할 수 있습니까? 나는 주님이 요구하시는 그 의가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까?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서기관보다도
더 나은 의가 무언가를 분명히 파악하고 나에게 이 의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함으로써
다시 한번 은혜 받기를 바랍니다.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믿음의 의입니다. 믿음으로 얻는 의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자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선한 것도 없습니다. 나에게는 자랑할만한 어떤 공로도 없습니다.
오직 나는 예수님만 믿겠습니다. 예수님만 의지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 붙들겠습니다.'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믿음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은근히 '세상에서 내가 특별히 잘못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나는 그래도
양심적이다.'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믿는 체 해도 진짜 믿음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믿음은 완전히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와 같이 예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분을
붙들고 하나님 앞으로 가겠다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가서 그들은 은근히 자기 자랑을 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토색하지 않습니다. 나는 간음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그렇게 악하게 살지 아니한 것을 감사합니다. 나는 안식일을 철저히 지킵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일년에 한 번씩 금식하라고 하셨지만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나는 십일조를 꼬박꼬박 냅니다." 이와 같이 자기 자랑을 해 댔습니다. 사람들은
'야, 저 분이야말로 천국에 들어가겠구나.' 하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그들은 들어갈
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주님이 단정하십니다.
여러분,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제일 놀란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제자들입니다.
그 당시 유대 나라 사람들입니다. 아마 메가톤급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서기관 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성경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에는 인쇄술이 없었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한 장 한 장 토 하나도 틀리지 않도록 쓰는 필생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성경을
얼마나 잘 알겠습니까? 그들은 성경의 권위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백성 앞에서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을 가르칠 때
서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서서 가르치면 권위가 없다고 하여 한 사람이 앉아서 듣든
백 사람이 앉아서 듣든 앉아서 가르쳤습니다. 그만큼 성경의 권위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서기관들만큼만 성경 율법대로 살아라. 그러면 반드시 구원 받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정도로는 안 된다고 그러시지 않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그들은 남과 다르게 구별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름 자체를 바리새인이라고
했잖습니까?.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다르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사람들 보기에 너무나도 성경 말씀대로 사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의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길을 걸어 다닐 때에도 목에다 성구를 써서 걸고 다녔고 옷술에는 율법의 계명을 적어서
다녔습니다. 모든 사람이 보면, '야, 저 사람 의롭게 사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이런 이야기가 돌고 있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천국 문을 열어 놓고 단 두
사람만 받아들이겠다고 하신다면 그 두 사람이 누구누구일까?' 그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는 서기관이요 하나는 바리새인이다.' 그만큼 천국 들어갈 수 있는
확실한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안 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가지고는 천국에 결단코 들어오지 못한다."
여러분,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놀라지 않겠습니까? 놀랄 수 밖에 없습니다.
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처럼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까? 믿음의 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있는 어떤 의를 자랑하면 하나님이 받아 주시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착각을 해도 한참 한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0절 이하에 보면
그들이 절대로 구원 받을 수 없는 이유가 나옵니다.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서기관들이 성경에 정통했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좔좔 외우면서 다녔습니까? 그러나 율법을 알면 알수록 자신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악하다는 것을 발견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연구하는 그들이, 율법을 그렇게도 들먹거리는 그들이 자신의 악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 앞에 이런 이런 일을 하기 때문에 선하다고 생각한
것은 율법을 꺼꾸로 본 것임을 드러내 준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만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천국에 못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1절, 22절에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를 받은 것이라.' 그러면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것을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의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눈 앞에 두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서기관들도 예수님을 전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히 들어갈 수 없는 불행한 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러분, 우리에게 믿음의 의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에베소 2장 8절 이하에 보면 주님이 이것을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되었으니,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도록 하셨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믿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와서 주님을 예배하고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신이 납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더 나은 의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교회를 오래 다닌 분들 중에 이 믿음의 의를 깊이 깨닫는 은혜를 일평생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자랑할 것이 없다. 오직
예수만 믿어야 한다. 율법을 완전히 지키고 완성하신 예수님, 나 대신 모든 율법의
저주를 다 당하시고 나를 율법에서 자유케 하신 그 예수님, 이 예수님만 믿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하고는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주님의
옷자락을 꽉 붙잡는 이 은혜, 이것을 깨닫는데 너무나 많은 세월을 허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20년, 30년 동안
다니면서도 깨닫지 못하다가 나중에 죽을 즈음이 되어서야 비로소 예수님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답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시간 동안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오늘 이 가운데 이런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부터 여러분 깨달으십시오.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절대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하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의가 되셨습니다. 이 분을 꽉 붙들면 우리는 주님의 나라에 갑니다. 할렐루야.
두번째로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입니까? 순종의 의를 이야기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의로운 것 같아도 마음을 꿰뚫어보시는
주님 앞에서는 아주 못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말만 하고 행동으로 보여주지는 않는
위선자들이요 외식자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저렇게 성경 잘 가르치니
분명히 말씀대로 살 것이다.' 다 그렇게 믿었습니다. 겉으로 하도 거룩한 체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인정을 했습니다. '저 사람 정도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리가 없다.'
다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보시는 예수님이 그들을 보시자 회칠한
무덤이었습니다. 안에는 썩는 송장들이 가득한데 겉으로 그저 아름답게 꾸며놓은
무덤이나 똑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3장에 보면은 한두 번이 아니라
네 다섯 번을 반복해서 주님이 그들을 책망합니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이 위선자들이여' 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말과 행동이 너무나 일치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는 거룩한 체 하면서 보이는 것들은 이것저것
지키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율법에 중요하다고 명시하신 본질, 즉 그 정신은
싹 쓸어내 버렸습니다. 그 정신이 무엇입니까? 의와 인과 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십일조는 잘 하고, 안식일은 잘 지키는구나. 그러나 사람들
보기에 꼭 해야 할 것은 다 하면서 진짜 중요한 인을 버렸구나. 의를 버렸구나.
신을 버렸구나.' 예수님이 이처럼 책망하신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의라는 것은
공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공의는 정직한 것은 정직한 것이라고,
불의한 것은 불의한 것이라고 바르게 말하는 것이고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공정하게 판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남들 보기에는 거룩하게 기도한답시고 질질 끌며 오랜 시간 기도를 하면서 남이
안 보는 곳에서는 과부와 같이 힘없는 사람은 깔아 뭉개며 그 재산을 착취하고,
힘있는 사람은 나쁜 짓을 해도 옳다고 인정을 해 주는 짓들을 하나님 보기에
살금살금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공의를 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은 지킨다고 요란을 떨면서 막상 병이 들어
죽어가는 환자를 보고도 손을 대지를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다가는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이 될 것 같자 그냥 내버려둔 것입니다.
무엇을 버렸습니까? 인을 버렸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자비심을 버린 겁니다.
이것도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해야 될 나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의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까지 하지 않으셨습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들은
내가 보니 하루살이는 뱉어내고 약대는 삼키는 위선자들이다." 하루살이같이 금방
삼킬 수 있는 조그마한 고기들은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낙타가 얼마나 큽니까?
그게 목으로 넘어갑니까? 그러므로 그걸 뱉어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거꾸로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살이같이 사소한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은 하나하나
들고서 사람들 앞에 자랑도 하고 남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왜 안식일 지키지 않았는가?
왜 십일조를 내지 않는가? 왜 금식은 하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공의와 자비와 믿음같이
너무나 중요한 것은 마치 낙타를 삼키듯이 꿀꺽꿀꺽 삼키는 것입니다. 순종을 하지 않는
그들의 생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서기관보다 나은 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순종의
삶을 가리킵니다. 교회 안에도 가끔 이런 말씀을 듣고서 이해를 못하고 혼란을 겪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만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하지 않았나? 인간은 다 죄를
범하기 마련이어서 순종을 다 하지 못 한다고 율법이 가르친다고 했는데 꼭 순종을 그렇게
강조할 필요가 있는가? 그것은 믿음의 은혜, 믿음의 역할을 오히려 깎아 내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면서 이렇게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이런 분들은 기독교를 잘못 이해해도 한참 잘못 이해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많은 분들이 너무 값싼 은혜만을 생각하고 믿음 자체가 어떤 것인가를 잘 모르기에
신앙생활이 다 세상 사람의 생활과 비슷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냄새를
피우는 것입니다. 말은 잘하면서 행동으로 순종을 안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역겨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똑같이 선한 것 없는 인간이지만 가정에 날마다 새벽에 가서 두시간 세시간씩
기도하고 오는 시어머니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기도를 그만큼 할 정도로 믿음이 좋으면
말씨도 부드러워야 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자부를 감동시킬만한 언행이 따라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기도는 대단하게 하신다고 하면서도 나중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
보면 마치 칼로 푹푹 찌르는 것 같은 소리나 하고 욕심은 목에까지 차서 날마다 돈타령만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그런 시어머니를 옆에 두고 산다면 여러분은 그런 믿음을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못 하지 않습니까?
여기에 계시는 남편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믿는다는 부인, 날마다 가방을 들고
교회에 드나드는 사람, 전도사도 아닌데 전도사처럼 사는 사람, 이런 부인과 여러분이
함께 살면서 실망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저렇게 믿음이 좋고, 날마다 성경을 펴 놓고
읽으면서 주여, 주여 한다면 정말 말도 달라야 되고, 마음씨도 달라야 되고, 원수라도
사랑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되지 않는가? 그런데 조금만 기분에 맞지
않으면 빽 소리를 지르고, 돈 문제만 나오면 쌍심지에 불을 켜다니.' 이런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역겹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이 보실 때 그렇게 삶이 따라가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면서
날마다 '믿는다, 믿는다' 하고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을 얼마나 답답하게 여기시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어떻게 천국에 들이시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모순 투성이의
믿음이 천국 들어가는 믿음이라면 그것은 거짓된 믿음입니다.
여러분, 순종의 의는 믿음의 의와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나무와 열매의 관계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반드시 순종합니다.
순종하는 의의 열매를 따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 구절 두 곳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서 1장 5절입니다. '믿어서 순종케 되나니' 믿으면 그 다음에 순종이 따라옵니다.
그리고 로마서 6장16절입니다.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했는데, 왜 순종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것이 벌써 잘못된 것입니다. 믿음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순종케 되고, 순종함으로써 의에 이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믿음 안에는 주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순종의 자세가 다 포함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믿는다고 할 때부터 어떻게 이렇게 순종할 수 있는 자리까지
갈 수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8장 1절 이하부터 집에 가서 읽어보십시오.
대답이 거기에 있습니다. 제가 설명해 드립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성령을 그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있습니다.
뜨거운 체험도 한 적이 없는데 성령이 진짜 있나 없나 모르겠다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자연적으로 믿어지십니까? 그리고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지십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 안에 성령이 계십니다. 이렇게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무슨 변화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성령이 얼마나 놀라운 분입니까?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의 생각의 틀을 바꾸어 버리고,
마음을 바꾸어 버리십니다. 성령을 모시기 전에는 항상 이 우주의 중심이 나 자신입니다.
내가 왕입니다. 눈만 뜨면 '오늘 어떻게 하면 기분 좋게 하루를 살까?' 자기 중심입니다.
'마음에 원하는 것을 어떻게 하면 오늘 달성을 할 수 있을까?' 항상 자기 만족, 자기 꿈,
자기가 설정한 목표를 향해서 달려 가는 것만이 생각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
나자마자 나도 모르게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해 드릴까?'로 바뀝니다. 나도 모르게 눈만 뜨면 '오늘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루가
되어야지. 오늘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생각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면 행동은 자연히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었습니까? 틀림없이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고상한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자연히 말씀에 순종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이 살인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내가 칼을 들고 남을 죽이지 않으면
평생 살인은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행동 보다도 내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내 마음으로라도 살인을 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까지 가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와서 내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내 마음을 들여다 보시고 불쾌하게 여기시면 안 되잖습니까? 그러므로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는 죽이고 싶도록 누군가를
미워하는 증오를 조금도 내 마음에 용납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까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정도까지 생각이 되면 순종 못할 게 무엇이 있습니까?
산상보훈을 보면 그런 말씀을 검토해야 할 내용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고 '나 같은 것을 구원해주신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해서 그 분을 어떻게 하면 즐겁게
해 드릴까?' 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한다면, 순종이라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즐거워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원해서 기쁘게 하는 것이
믿는 사람의 순종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가끔 텔레비전에서 일일 연속극을 볼 때가 있습니다. KBS에서 하는 '좋은걸 어떻게 해'
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거기에 사랑의교회 김자옥 집사가 나오기 때문에 좀더 관심을
가지고 볼 때가 있습니다. 병원 약국에서 근무하는 아주 예쁜 약사가 같은 병원에 있는
어느 의사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아름다운 꿈을 가지고 결혼을 했는데, 막상 결혼해 놓고
보니까 이 의사가 약간 문제가 있었습니다. 변태적인 성격인데다가 알코올 중독 기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부인을 때리는 겁니다. 두 달 동안 맞으면서도 잘 살아
보려고 버텨 보다가 결국은 두 달 만에 이혼해 버렸습니다. 이혼을 하자마자 그 병원에
있는 또 다른 의사가 이 여인을 너무나 사랑해서 구애를 했습니다. 정성을 다해서
그 여자를 사랑하자 이 여자가 처음에는 도무지 자기는 이런 남자와 결혼할 수 없다고
생각하다가 결국 결혼을 했습니다. 이 여자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그 남편이 고맙겠습니까?
이혼한 자기를 총각이 데려다가 결혼을 하고, 게다가 인기 있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가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기를 아내로 삼아 주었으니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그러니 뭐든지 다 주고 싶은 겁니다. 결혼 하자마자 밖에 나가서 살아도 되는데, 일부러
이 여자가 우겨서 시집을 살려고 시댁에 들어왔습니다. 그 결혼을 반대하던 시어머니
김자옥 집사가 얼마나 죽이려고 달려 듭니까? 상대도 안 합니다. 어떤 때는 밤 중에
대문 밖에 세워 놓고 열쇠를 잠궈 버려서 밤새도록 떨게 만드는 등 오만 가지 구박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힘들다고 여기지 않고 남편을 위해서
정성을 다해 시집 생활을 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고 '그래,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순종하는 것이 짐이 아니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 그 분 때문에
내가 무조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큰 축복, 정말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는데, 그분이 좋아하는 것을 순종하는 것이 뭐가 짐이 되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신앙
생활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답답하게도 교회 안에는 이런 긍정적인 신앙 생활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날마다 부정적인
신앙 생활에만 익숙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오늘도 죄를 안 짓고 어떻게 살 수 있나? 세상인데. 그리고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예수 이름 부르고 회개하면 다 씻어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잘 안 되는 것이 뻔한 것을.'라고 하면서 하루를 그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완전히 문 빗장을 열어 놓고 '들어오시오.' 하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항상 그렇게 부정적입니다. 하루 종일 살면서 이것 저것 죄를 범하지 않아도
될 것들도 습관적으로 죄를 범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이 좀 아프니까
앉아서 허리를 흔들어 가며 하루종일 범한 죄를 회개합니다. 눈을 뜨고 나서도 혹시
빠진 게 없는지 죄 목록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그 다음에 회개하고 잠자리에 듭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일어나면 똑 같은 짓을 또 반복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인들이 이런 삶에 익숙해 있습니다. 자기가
순종하지 아니할 때마다 그저 은혜의 뒤에 숨는 것이 재주가 되어 버렸습니다. 십자가
뒤에 숨는 것이 능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이런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 신앙 생활의 본질이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패배자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순종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납니다. '나는 할 수 있다. 오늘도 내 안에
성령이 계신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어.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면 내가 손해를 보아도 얼마든지 나는 순종할 수 있어.' 하는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하면 웬만한 것은 왔다가도 질려서 다 도망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요한일서 5장 1절 이하를 보십시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들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 너희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다. 그리고 너희들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계명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인가? 믿음을 가진 자다. 왜 그런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웬만한 것은 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한계령 고개가 굉장히 가파르고 꼬불꼬불해서 운전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고도 잘 납니다. 또 가끔 죽기도 하고 다치기도 합니다. 그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이런 주장을 할 수도 있습니다. '큰 병원을 한계령 골짜기에다 짓자. 그리고 일류
의사들을 거기에 대기 시키자. 최신식 시설을 갖춰 놓고 언제든지 한계령에서 굴러
떨어지면 달려가서 끌어 다가 치료하고 고쳐주자.' 그러나 또 한 사람은 이런 의견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아니야. 그것은 잘못된 방법이야. 부정적인 방법이야. 가파른
길을 올라가는 코너마다 팻말을 세워라. 그리고 격려해라. 주의를 시키라. '여기는
굉장히 사고다발 지역입니다. 조심해서 운전하시면 안전합니다.' 또는 '여기는 다른
곳에 한눈을 팔면 안됩니다. 잘 보고 운전하시면 조금 후에 정상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힘내세요.' 하는 등의 팻말을 붙여서 올라가는 사람들이 주의하면서 기분 좋게
올라 가도록 만들자.' 어느 쪽이 좋습니까? 병원을 차려야 합니까? 아닙니다.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상이고, 기분 좋게 여행 하도록 만드는 것이 정상입니다.
신앙 생활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가지고 죄를 지으면 회개하라고 하는
말씀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하나님이 강조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너는 성령의
사람이다. 조금만 정신 차리고 이 세상을 살면 하나님 앞에 순종하되 기분 좋게
순종하면서 승리할 수 있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순종합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패배자의 삶을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따라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보다도 더 나은 의가 무엇입니까? 순종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의 의입니다. 아멘!
마태복음 7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좋은 믿음을 가졌으면 좋은 열매가 있지 않겠습니까?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순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2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속된 말로 입만 나불대는 믿음으로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나와 있습니까?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 속에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삶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입니까? 믿음의 의요, 순종의 의입니다.
이것은 하나입니다. 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의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우리 모두는 즐겁게 순종하며 살려고 무척 힘쓰면서 날마다 기도하고
하루하루를 출발하는 거룩한 백성임을 믿습니다. 오늘도 성령께서 우리를 이와 같이
승리자의 삶을 살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만 천국에 들어가면 안됩니다. 대각성 전도집회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여러분, 천국을 놓치면 영원히 끔찍한 손해를 볼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들을
내버려 두지 맙시다. 혼자 천국에 들어가는 것 보다 함께 들어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서 믿음의 의요, 순종의 의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들어갈 수 있는 영광을 함께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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