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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로 가까이 / 요 19: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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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로 가까이/요19:23-30


십자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불가사의의 지혜입니다.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서 패배하고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여 죽을 수 있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역설 중의 역설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누가 그 역설을 우리 마음에 흡족하도록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놀라운 진리는 한 번 들었다고 다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해서 다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갈증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십자가를 더 알고 싶은 갈증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만나고 싶은 갈증입니다.
이런 갈증을 가지고 본문을 보면 우리의 관심을 끄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25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현장에서 바로 예수님 곁에 있던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이모, 글로바의 아내인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께 가장 사랑을 받았던 제자 요한, 이렇게 다섯 명이 예수의 십자가 곁에 있었습니다. 그 골고다 언덕은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 호기심 때문에 나온 사람들, 처형당하시는 예수님을 잊지 못해서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신음하 시면서 서서히 죽어가시는 예수님 바로 곁에, 작은 목소리로도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근거리에 있었던 사람은 이 다섯 사람뿐이었 습니다. 어떤 면으로는 이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고통당하며 죽어가는 그 신비스러운 현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이었고, 비록 그들이 예수님이 마시는 쓴 잔을 함께 나눌 수는 없었다 할지라도 그 잔에서 떨어지는 몇 방울의 담즙은 아마 혓바닥에 대 볼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모두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붉은 죄가 눈 같이 희어졌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모두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이 되었고 딸이 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찌 십자가를 멀리서 쳐다보면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좀더 가까이 가보고 싶고 좀더 알고 싶어하는 안타까움과 갈증이 마음에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누가 묻는다면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수 있지만 저는 이렇게 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고 싶어하고 그를 항상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신앙생활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우리가 어떤 예수님을 더 선호하고 있습니까? 좀 이상한 질문이지만 어떤 예수님에 대해서 마음이 더 끌리는가 하는 것은 각각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우편에서 계속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에게 마음이 끌립니다. 예수님을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주님으로만 늘 생각하고 감사하고 찬양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승리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마음에 담고,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죄와 죽음을 이기신 것 때문에 흥분을 합니다. 미국의 어떤 교회에서는 고난 주간을 잘 지키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고 어두운 이야기를 자꾸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부활 주일만 강조를 한다고 합니다. 매우 낙관적인 신앙을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한편, 제가 자란 어린 시절의 교회를 보면 마치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처럼 항상 십자가의 주님만을 늘 애도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많이 자아냈습니다.
신앙도 개성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느냐에 따라서, 또 내가 어떤 은혜를 받았느냐에 따라서 신앙에도 색깔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십자가의 주님에게 더 끌리고, 어떤 사람은 부활의 주님에게 더 끌리고, 어떤 사람은 재림하 시는 주님에게 더 끌립니다. 그러나 똑 같은 예수님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것을 문제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의 승천, 예수님의 재림이 모두가 다 대단한 사건이요, 우리에게 큰 복음이 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혜가 솟아오르는 샘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그런 샘이라 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출발하는 샘이 있습니다. 은혜에도 샘이 있습니다. 모든 은혜는 그 샘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전제하지 아니하는 예수님의 탄생,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예수님의 부활,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하나의 액세서리처럼 취급하는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이야기, 그것은 사람이 만들어낸 우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복음의 핵심이요, 은혜의 샘입니다. 모든 은혜는 여기서 부터 흐르기 때문에 주목해야 합니다. 구약에 에스겔이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바벨론에 끌려가서 포로 생활을 평생 동안 하다가 끝냈는데, 그가 성령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아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환상 중에 성령이 그를 인도한 곳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 었습니다. 성전 안에 들어가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고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하는데, 해 돋는 동쪽을 향하고 있는 성전 문 쪽에 와서 보니 문지방에서 샘이 솟아오릅니다. 아주 맑은 물이 솟아오릅니다. 그것이 얼마나 신기합니까? 그가 그 물길을 따라서 가 보았더니 가면 갈수록 물이 자꾸 불어나는 것 입니다. 처음에는 발목까지 차더니 나중에는 무릎 까지 올라오고 나중에는 허리까지 찹니다. 좀더 가다 보니 헤엄을 치지 아니하면 안 되는 큰 강을 이루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지 아십니까? 십자가에서부터 은혜의 샘이 솟아오 르기 시작해서 부활의 언덕을 넘어 은혜의 강이 되어 저 세상 땅 끝까지 풍성하게 넘치도록 흐르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은혜는 십자가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 하는 사람은 항상 십자가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꼭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흔히 복음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일대기가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서를 주의해서 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체 분량의 1/3 가량이 예수님의 생애 중 마지막 한 주간인 고난 주간, 십자가, 죽음 등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네 제자가 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생애를 이야기할 때 십자가의 고난을 중심에 두고 다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비하면 사복음서 모두 예수님의 탄생이나 부활, 승천과 같은 기사는 이상하리만큼 간략하게 다루고 넘어가 버립니다.
어느 주석가는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복음서란 무엇인가? 복음서란 예수님의 생애 중 마지막 한 주간에 관한 모든 사건과 말씀을 기록한 연대기요, 그 나머지 모든 부분은 서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중심에 있습니다. 복음의 중심이요, 은혜의 근원이요, 샘이 됩니다. 바울도 그가 복음을 이야기할 때에 '십자가의 도'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그는 소리쳤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자기 자신을 고백하기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부활을 등한히 했다거나 예수님의 승천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다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모르는 부활은, 그것은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지난 2000년을 돌아보아도, 기독교 역사 2000년을 통틀어 기독교를 상징하는 것은 십자가 형틀입니다. 기독교 하면 십자가, 예수님 하면 십자가, 이렇게 다 십자가로 통합니다. 초대 교회 초장기 때는 십자가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 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현장을 실제로 목격했던 예수의 제자들이나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이 십자가가 소름끼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형태를 만들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그 어떤 시도도 일체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대의 사람들이 다 가고 나서, 특히 주후 4세기 경 콘스탄틴 대제가 환상 중에 십자가를 본 다음부터는 십자가가 기독교를 상징하는 상징물이 되었고 예술의 소재로 활용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십자가의 은혜를 진하게 깨닫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의 신앙생활 에는 누수현상이 심하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모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믿음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자기가 예수 믿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를 다닙니다. 그런데 이 모태 신앙을 가진 자녀들 중에 믿음이 흐리멍덩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타의에 의해서 선택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마음에 강하게 감동이 안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교회를 다닙니다. 선데이 크리스천(Sunday Christian)입니다. 교회에 와 앉아서 몸에 익은 예배 의식을 다 끝내면 훌렁 벗어놓고 나갔다가, 그 다음 주일이 되면 또 습관처럼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다 말씀을 듣고,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은혜를 받는데도 그들은 눈만 껌뻑껌뻑 하고 앉았다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끝까지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배후에 부모님의 기도가 있지 않습니까? 배후에 부모님의 눈물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계기가 되면 살아 계신 주님이 그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중생하는, 거듭나는 체험을 합니다. 사랑의교회 안에도 그런 분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30대, 어떤 사람은 50대, 어떤 사람은 60대, 어떤 사람은 죽을 때,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이 고백하는 말을 들으면 이구동성으로 비슷합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까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하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알기는 알았죠. 그러나 그것이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 말을 아무리 들어도 내 마음에 와 닿지를 않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이제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심을 믿습니다. 나는 죄인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면서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제가 자주 봅니다. 이제 바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십자가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십자가에서 여러분의 신앙은 출발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관심이 항상 마음에 크게 작용합니까? '좀더 알고 싶다. 좀더 십자가 앞으로 가까이 나갔으면 좋겠다. 좀더 예수님에 대해서 깊이 알고 그와 좀더 가까워지고 친해졌으면 좋겠다.' 하는 갈증이 있습니까? 만약에 그런 갈증이 있다면 여러분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고, 서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만일 여러분의 마음 속에 이 십자가의 은혜가 전혀 생소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저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빨리 갈보리 동산으로 자리를 옮겨야 합니다. 설혹 여러분들이 부활의 동산에 서서 죄와 사망을 이기신 예수님 때문에 흥분하고 소리 지르고 '할렐루야' 찬송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빨리 갈보리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설혹 여러분이 성령의 불과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다락방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은사와 감동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면 빨리 거기서 나와 겟세마네 동산으로 와야 합니다. 설혹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바닷가에 서서 떠오르는 뭉게구름을 바라보면서 '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는 대단히 믿음 좋은 사람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여러분의 가슴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은혜가 진하게 배어 오지 못하는 메마른 심정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다시 겟세마네 동산,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돌아 오셔야 합니다. 거기서 다시 출발하셔야 합니다. 그만큼 십자가는 모든 은혜의 샘이요, 복음의 핵심이요, 복음의 시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혜 세 가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합니다.
첫째는 우리 대신 치르신 고통의 대가지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받아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감당하신 곳이 바로 십자가 라는 말입니다. 23절을 보시면 간단한 말씀이 나옵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어떻게 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의 형이 얼마나 잔인하며,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새삼스럽게 여기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손과 발에 녹슨 못을 박아 나무에 매다는 이 형은 천인공노할 가장 잔혹한 고통을 안겨주는 사형제도입니다. 그것은 지옥의 고통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약 시대에 미리 내다보고 예언한 다윗과 같은 사람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습니다. 내 모든 뼈는 다 어그러졌습니다. 내 마음은 촛밀 같이 녹아 내렸습니다. 내 힘은 질그릇 같이 말랐습니다. 내 혀는 이틀에 붙었습니다.'(시22:14) 더 이상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의 그 고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까? 그것은 내가 받을 고통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 입니다. 죄인에게는 형벌이 따라옵니다. 형벌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만약 우리의 죄값을 그대로 받는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형벌을 피할 수 없고, 그 형벌에는 무서운 지옥의 고통이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그 고통을 주님이 대신 짊어져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실 훗날을 내다보면서 이사야서 53장 5절에 이렇게 아름다운 시로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이 왜 찔렸습니까? 예수님이 왜 상했습니까? 예수님이 왜 징계를 받았습니까? 내가 받아야 될 징계입니다. 내가 받아야 될 고통입니다. 내가 받아야 될 아픔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져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기를 소원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십자가에서 주님을 우러러 보는 그 순간을 마음에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두번째로 십자가는 우리의 수치를 담당한 대가 지불입니다.
23절에 계속해서 중요한 말씀이 또 하나 나옵니다. 십자가에 못 박은 다음에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취하여서 네 깃으로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발가벗겼습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 당하신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과 모욕을 당하셨는가를 감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매질을 당했습니다. 얼굴엔 사람들이 뱉은 가래침이 묻고, 뺨을 맞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처량했는지 다윗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십자가의 못 박히신 주님의 그 부끄러운 모습을 놓고 시편 22편에 보면 이렇게 예언합니다. '나는 벌레요 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22:6) 왜 이렇게 말 못할 수치를 예수님이 당하셔야 했습니까? 죄는 수치를 수반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하와가 죄를 범하자마자 금방 부끄러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나뭇잎을 얽어 가지고 부끄러운 하체를 가리고도 너무나 부끄러워 나중에는 숨어 버렸습니다. 죄는 부끄러움을 가져다 줍니다. 최근에 부산 철강사 회장 부부를 살해했다는 아주 무서운 사람, 정 모라는 사람은 알고 보니 1년 동안 10명이 넘는 사람을 죽였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텔레비전에서 나와서 하는 말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내 마음에 악마가 있나 봐요." 그렇습니다. 악마입니다. 악마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잡히자 부끄러운 감정이 마음에 있었나 봅니다.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는 부끄러움을 가져다 줍니다. 만약에 지금이라도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천국문을 활짝 열어놓고 천사들을 동원해서 아무리 오라고 초청하셔도 우리는 절대 못 들어갑니다. 왜 못 들어갑니까?
부끄러워서 못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우리의 모습 그대로 가지고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만약에 억지로 끌어다가 천국 안에 넣어 놓는다면 사흘 안에 미쳐버릴 것입니다.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할 것입니다. 부끄러워서 살아 남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가 가져다 준 수치를 다 제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수치와 모욕을 다 담당하시므로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도록 우리를 다시 세워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는 여호수아 5장 9절의 말씀대로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놀라운 십자가를 우리가 어떻게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세번째로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이루신 현장입니다. 30절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원히 돌아가시니라.' '다 이루었다 하시고'는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구약에 예언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말씀일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완전히 성취하셨 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 의롭다 하실 수 있는 명분을 다 완전하고 충분하게 주님이 갖추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며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받고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완전하고 충분한 구원의 길을 우리 주님이 닦아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한 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을 만큼 완벽하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 이루어 주신 현장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그 십자가 가까이 가 서 조금이라도 함께 있어보고 싶은 충동을 어떻게 느끼지 않겠습니까? 위대한 신앙 선배들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 앞에서 그들의 인생의 전환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평생 십자가 곁에서 떠나지 않기를 사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평생 맹인으로 살았지만, 영감이 넘치는 찬송가를 많이 남겨서 지금도 국경과 시대를 초월해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감동시키는 찬송 작가 패니 크로스비가 쓴 496장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흘린 보혈로 정케 하옵소서.' 영어의 원문의 뜻을 충분히 전달할 수 없는 한국말의 한계성 때문에 안타깝지만 원문은 이런 것입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소서/ 거기에 값없이 주시는 보배로운 샘/ 갈보리 샘으로부터 흐르는 치유의 시내가 있나이다/ 십자가에 가까이 의지하고 서서 거기서 천국 가도록 항상 머물겠네.' 항상 십자가 곁에 머물기를 사모하는 작가의 마음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찌 작가 혼자의 마음이 겠습니까?
우리 모두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찬송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다시 한번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오늘 우리 중에 왜 내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 내가 왜 죄인이라고 하는지 마음에 와 닿지 않아서 잘 깨닫지 못하는 분이 행여나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십자가의 길을 한 번 따라가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죄 없는 분이 양발, 양손에 못이 박혀 피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그 갈보리 언덕으로 한 번 올라가 보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그분의 얼굴을 우러러 보십시오. 당신이 왜 구원받아야 할 사람인지 해답을 얻을 것입니다. 당신이 왜 죄인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중에 아직도 예수 믿지만 죄책감에 끌려 다니며 신음하는 형제 자매가 있습니까? 십자가를 향해 달려 가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가서 예수님을 한번 보십시오. 어떤 죄도 용서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죄짐을 지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분 앞에는 어떤 죄도, 용서받지 못할 죄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죄의 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사랑의 갈증을 느끼는 분들이 계십니까? 얼마든지 우리는 사랑의 갈증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주는 사랑으로는 우리 마음의 빈 공간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저 갈보리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십시오. 거기에 가면 큰 사랑이 있습니다. 큰 사랑이 있습니다.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는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그 사랑 앞에 우리의 무릎을 꿇읍시다. 그 사랑의 강물에 우리를 던집시다. 그 사랑 안에 영원한 기쁨과 만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고독함으로 인해 신음하는 형제 자매가 있습니까? 십자가의 주님을 우러러 보십시오. 진짜 고독한 분은 거기에 계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따돌림을 받은 한 사람, 죄 없으면서도 영원히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한 사람이 거기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고독에 비하면 나의 고독은 고독이 아닙니다. 그분의 고독을 옆에서 조금이라도 느끼면 내 안에 있는 고독은 말끔히 씻어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남이 모르는 고통이 있습니까? 아픔이 있습니까? 예, 우리가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남 모르는 고통과 아픔 때문에 눈물 흘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십자가로 가십시오. 혹자의 표현처럼 십자가는 하나님의 고난이 되어 버린 우리의 고난, 하나님의 고통이 되어 버린 우리의 고통, 하나님의 절망이 되어 버린 우리의 절망, 하나님의 죽음이 되어 버린 우리의 죽음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가장 참혹한 고통을 당하신 분이기에 우리의 고통을 거뜬히 옮겨 줄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을 만나십시오. 우리 가운데 아직도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 강한 능력이 무엇인가를 잘 모르시는 분이 있습니까? 십자가 앞에 가서 그 능력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가장 강합니까? 자기를 죽이고 희생하는 힘입니다. 무엇이 가장 강합니까? 무엇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까? 무엇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썩은 밀알이 되는 것처럼 자기를 던져 희생하는 그 사람의 힘이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 진정한 평화가 어디 있는가를 알기를 원합니까? 갈보리로 올라갑시다. 예수님이 핏자국을 남기면서 걸어 가셨던 그 길을 따라갑시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두시던 그 십자가 옆에 조용히 서서 그분의 피 묻은 입술에서 흘러 나오는 음성을 한번 들어 봅시다. '하나님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하나이다.' 진정한 평화는 누구에게 오는지 압니까? 용서하는 자의 가슴에 옵니다. 원수를 용서하는 자의 가슴에 옵니다.
십자가에서 그것을 배웁시다. 우리 모두가 그것을 배우자고요. 거기에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다. 거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존 하워드 요드라고 하는 분은 감동적인 말을 했습니다. '여기 이 십자가에 자기 원수를 사랑한 사람, 자기의 의가 바리새인의 것보다도 더 큰 사람, 한 때는 부유했지만 가난해진 사람,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몽땅 주어버린 사람, 자기를 이용하고 우롱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매달려 있다. 이 십자가에는 바로 이 사람이 매달려 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나라로 향하는 우회도로가 아니다. 십자가는 우리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 나라 그 자체다.' 우리가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곳에 임하여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나라의 평화, 그 나라의 사랑, 그 나라의 용서, 그 나라의 능력, 그 나라의 사유함, 구원이 바로 그곳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은혜의 샘이 솟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복음의 출발은 십자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로 달려갑시다. 십자가 앞에서 오래오래 머물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가슴에 있는 사랑을 그분에게 드립시다.
여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축복이 일주일 내내 아니 우리의 평생을 통해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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