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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약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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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아 들을지어다(약2:5-7)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사도 야고보는 지금 목회자의 심정으로, 애정 어린 마음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 야고보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말씀에 우리 모두가 귀를 기울이며,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교회 교인들의 수가 어쩐 일인지 날이 갈수록 점차로 줄어만 갔습니다. 그러니 목사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게다가 주변에서 활동하는 갱들의 수는 나날이 늘어만 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마음은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도대체 좋은 일을 한다는 교인들의 수는 나날이 줄어가는데, 어떻게 못된 짓만 골라서 하는 갱들의 수는 나날이 늘어만 간단 말인가? 정말 말세는 말세야!"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은 우연히 갱단의 두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궁금한 듯이 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우리네 교인들의 수는 나날이 줄어가는데, 어떻게 당신네 갱들의 수는 나날이 늘어만 갑니까?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갱단의 두목은 주저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당신들보다도 사랑이 더 많거든요."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는 우리들이 갱단의 깡패들보다도 사랑과 의리가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까? 교회가 늘상 부르짖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왜 세상 사람들의 눈에서조차도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사랑이 부족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까?
옛날에 어떤 왕이 자기 나라에서 제일 가는 학자 한 사람을 왕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훌륭한 왕이 될 수 있겠소? 당신에게 귀한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내가 당신을 이곳으로 불렀소."
학자는 서슴없이 한 마디 했습니다.
"그거야 간단하지요. 왕께서는 나쁜 짓은 하지 마시고 착한 일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왕께서는 틀림없이 훌륭한 인물이 될 것입니다."
왕은 학자에게서 무엇인가 특별한 가르침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나쁜 짓은 하지 말고 착한 일만 하라는 평범한 말을 하니까 왕은 은근히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왕은 언성을 높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그까짓 가르침을 받으려고 내가 당신을 이곳으로 불렀소? 나쁜 짓은 하지 말고 착한 일만 하라는 것은 어린 아이들도 다 아는 소리가 아니요?"
그러자 학자는 침착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하라는 것은 네 살짜리 어린 아이로부터 여든에 이르는 노인들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알면서도 실행을 하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은 아닙니다. 쉬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그대로 실행하지 못하는데서 언제나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빈부귀천 물론하고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와는 상관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복을 내려주십니다. 우리의 마음도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눈도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외모와는 상관없이 우리를 귀히 여기시는 것처럼, 우리도 누구를 대하든지 그 사람의 외모를 바라보지 말고 그 사람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바라보십시다. 우리가 대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예수님을 대하는 심정으로 그를 귀히 여기십시다. 그리할 때 우리 가운데 절로 아름다운 사랑의 꽃이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오늘 말씀 속에서 가난한 사람과 부자를 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지극히 축복하십니다. 반면에 부자들 가운데서는 횡포를 일삼으며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 그 사람이 가난하다고 무조건 괄시해 버리고, 그 사람이 부유하다고 해서 무조건 그의 편을 든다면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정말 소중히 여기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 사람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바라보면서 그 누구든지 예수님을 대하는 심정으로 귀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도 야고보는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네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하셨습니다. 둘째,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넷째, 그들에게 약속하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셨습니다. 엄청난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그렇게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람이 가난하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을 괄시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 가운데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외모를 조금 갖추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등소평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중국의 거인이었습니다. 그의 키가 컸기 때문에, 그를 거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키는 불과 150cm 남짓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당당했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나라도 중국을 깔볼 수 없도록 만든 장본인이 바로 등소평이었습니다.
그가 한 번은 닉슨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서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등소평은 미국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면서 인사를 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키가 크고 등소평은 키가 작으니까 우리가 생각하면 그가 자기 손을 올려서 악수를 해야 되는데, 등소평은 절대로 손을 올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일부러 키 큰 미국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손을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키 큰 미국 사람들은 악수는 해야 되겠고 어쩔 수 없이 등소평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공손한 모습으로 악수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중국 관리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하, 악수를 하시는데 일부러 손을 내리실 필요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그때 등소평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르는 소리! 내가 13억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자네는 잊었는가?"
자기 밑에 13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콧대 높은 미국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앞에서는 당연히 고개를 수그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언제나 당당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때로는 외모를 갖추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가난하게 살 때도 있습니다. 병들 때도 있습니다. 남들이 갖춘 외모를 우리가 갖추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해 주셨습니다. 믿음에서 부요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영원토록 유업으로 받는 백성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이다!"
물론 사도 야고보는 오늘 본문 속에서 가난 그 자체를 미덕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만 택하시고 부자들은 다 버리셨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 가운데는 엄연히 부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잘 아는 삭개오는 새리장이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도 부자였습니다. 또 빌립에게서 세례를 받았던 에디오피아의 내시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넬료는 백부장이었습니다. 루디아는 두아디라 성의 자주장사로서 재력가였습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은 부유한 사람도 택하여 주십니다. 뿐만 아니고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도 택하여 주십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엄청난 복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외모를 판단해서 그가 가난하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를 괄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 그 사람이 부자라고, 내가 갖추지 못한 것을 그 사람이 갖추었다고 해서 우리가 시기하면서 그를 꼴보기 싫어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대하든지 그 사람 마음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낮아지고 그는 높이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가난에 처한 분이 계십니까? 병든 분이 계십니까? 오늘 본문을 한 번 역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뜻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때로는 우리를 가난하게 하십니까? 왜 하나님이 때로는 우리를 병들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믿음에서 부요한 자가 되게 하려고 하심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심입니다. 그렇게 해서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모세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모세가 애굽의 궁중에서 왕자로 있을 때는 세상적으로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때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는 목자가 되었을 때, 그는 세상적으로는 가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이 그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믿음에서 부요한 자가 된 것입니다. 탕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세상적으로 부유할 때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적으로 가난해질 때 되돌아왔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시는 것입니까?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적인 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믿음의 부, 곧 영적인 부가 훨씬 더 소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부를 허락하시기 위해서 때때로 우리를 낮추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선하신 뜻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사도 야고보는 가난한 자에 대한 괄시를 질책하고 있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괄시하지 아니하시는데,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어지는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 그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괄시해서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 당시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외모 때문에 차별을 받는 경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컨대 회당에서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부자가 들어왔습니다. 손에 금가락지를 끼웠습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었습니다. 안내하는 자들이 얼른 나가서 그에게 의자를 내주며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친절을 베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더러운 옷을 입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의자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얼른 앉으라고 불친절하게 대했습니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은 자기가 외모 때문에 괄시를 당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또 그들 가운데는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외면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고전11:21∼22에 보면 초대 교회의 애찬식에서 있었던 일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각자가 음식을 마련해 오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넉넉한 사람은 자기 음식을 충분하게 준비해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는 형편이 여의 치를 못해서 자기 먹을 음식도 마련해 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넉넉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넉넉한 사람은 자기가 가져온 음식이라고 해서 자기만 먹었습니다. 나누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배불렀지만, 음식을 가져오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은 시장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괄시를 당한다는 생각 때문에 너무나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가난한 자를 괄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지극히 배려해 주셨습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봅니다.
번제를 드릴 때를 생각해 봅시다. 수송아지나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드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고려하셔서,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도 하나님께 번제를 드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빚을 내었습니다.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7년이 되면 채무가 면제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른바 면제년의 규례였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 몸을 종으로 팔았습니다. 그러나 종살이하더라도 50년이 지나면 자유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른바 희년의 규례입니다.
한 가지 예만 더 들어보십시다. 밭에서 곡물을 거둘 때 다 추수하지 말고 모퉁이를 일부러 남겨두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고 떨어진 이삭도 도로 줍지 말라고 했습니다. 포도원의 열매를 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매를 다 따지 말고 남겨두라고 했습니다.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셨겠습니까? 그것으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을 삼을 수 있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가난한 사람들을 괄시하지 아니하시고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의 형편을 배려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따뜻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결코 괄시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감싸주고 배려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사도 야고보는 부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 하반부와 7절 말씀입니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그 당시 부자들 가운데 있었던 횡포, 그들의 악행을 사도 야고보는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압제입니다. 둘째는 법정에 가서 고소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첫째, 부자들은 사람들을 힘으로 억눌렀습니다. 착취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의 배를 채운 것입니다. 한 가지 실례가 약5:1∼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부자들은 마땅히 품군에게 주어야할 품삯을 주지 않고 착취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자들이 자기 재물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자들의 횡포입니다.
둘째, 부자들은 법정에 끌고 가서 고소했습니다. 예컨대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기사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제 2차 전도여행때 빌립보에 이르렀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이 있었습니다. 점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종은 점을 쳐서 자기 주인들을 물질적으로 이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종은 바울과 실라 일행을 볼 때마다 소리지르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인데 당신들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기 위해서 온 자들입니다!"
바울은 그를 보고 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종은 더 이상 점을 못 치게 되었습니다. 주인들은 돈벌이가 끊겨졌습니다. 그래서 여종의 주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서 저자 곧 시장에 있는 법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은 관원들에게 이렇게 고소했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 사람들인데, 우리 성에 와서는 이상한 풍속을 전하면서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합니다."
그렇게 해서 바울과 실라는 옷이 벗겨진 채 매를 심히 많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것입니다. 여종의 주인들과 법정의 관리들이 다 한통속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자들의 횡포입니다. 힘이 있으니까 법정에 끌고 가서 고소하는 것입니다. 요즘도 그런 말이 있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입니다.
"왜 아니꼬아? 그러면 돈 벌어!"
이것이 바로 부자들이 하는 악행입니다.
셋째, 부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했습니다. 성도는 지극히 존귀한 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컫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을 짓밟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부자들은 이처럼 사람들을 압제하기도 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서 고소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 그 사람이 그저 부자라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 사람 앞에서 비굴하고 무조건 그의 편을 드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을 괄시해서도 안되고, 그 사람이 부하다는 이유 때문에 무조건 그 사람 편을 들어서도 안되고, 그 사람을 꼴보기 싫어해도 안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형제 자매들입니다. 우리 모두의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생각하십시다. 그리해서 누구를 대하든지 절대로 소홀히 대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 있는 심정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히 여기십시다. 그리할 때 우리 속에 절로 사랑의 꽃이 아름답게 필 수 있습니다. 사랑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빌레몬서의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라는 종이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 주인 빌레몬의 돈을 훔쳤습니다. 그는 멀리 로마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하나님의 섭리로 거기에서 사도 바울을 만났습니다. 믿음의 감화를 받았습니다. 오네시모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편지 한 장을 써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서 16절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더 이상 오네시모를 종처럼 노예처럼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외모와는 상관없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 받는 형제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외모와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사랑 받는 형제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 승동 교회는 백정교회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천대받는 사람들, 외모적으로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우리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교회연혁을 한 번 읽어보시면 제일 먼저 장로로 장립 받은 사람 가운데 박성춘장로라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백정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에게서 천대받는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믿음에서 부요한 자가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축복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를 택하여 주시고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람을 대할 때 외모를 대하지 말고 그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대하는 심정으로 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사랑의 꽃을 아름답게 피울 수가 있습니다.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바라볼 때 "야, 승동 교회는 사랑이 절로 꽃피우는 교회구나!"라고 인정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온 백성들이 우리를 칭송하고, 우리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놀라운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축복과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날로 더해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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