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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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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장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에게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언제나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특별히 그 가운데서 사랑이 우리에게 있어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사랑이 제일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어느 가정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사이에 아들이 끼어서 늘 입장이 난처했습니다. 이쪽 편을 들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저쪽 편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늘 양쪽에서 면박만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궁리 끝에 아내를 불러서 넌지시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여보, 누가 그러는데 밤을 삶아서 그 밤의 껍질을 까고 삶은 밤에 꿀을 발라먹으면 위가 퉁퉁 붓는다누먼.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대."
아내가 그 소리를 듣고 쾌재를 불렀습니다. 아내는 얼른 시장에 가서 밤을 한 말 사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아침저녁으로 밤을 푹 삶아서 거기에 꿀을 듬뿍 찍어 시어머니에게 드렸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평소에 안하던 행동을 하는 것을 조금 수상하게 생각했지만 일단 맛이 좋으니까 잘 받아먹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시어머니의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며느리에 대한 미움이 조금씩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전에는 손자도 잘 돌보아주지 않던 시어머니가 이제는 손자를 잘도 업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며느리를 대신해서 집안 청소도 해주고 또 물도 길어다 주었습니다. 또 그 전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며느리 욕을 했는데 이제는 며느리를 칭찬하기 시작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시어머니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를 볼 때마다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요즘 시어머니에게 어떻게 해 드렸기에 그렇게 변하셨는가? 우리를 볼 때마다 며느리 칭찬을 하시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드렸소?"
그러니 며느리가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얼마나 양심에 가책을 받게 되었겠습니까? 결국 며느리는 견디지 못하고 어느 날 남편에게 이실직고를 했습니다.
"여보, 내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내가 무엇에 씌었는지 밤을 삶아서 꿀을 발라 어머니에게 많이도 먹여드렸습니다. 벌써 어머니의 위가 퉁퉁 부어서 이제 머지않아 돌아가실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아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안돼요. 어머니를 살릴 방도가 없을까요?"
남편은 그 소리를 듣고서 우선 모른 척 하고 아내의 뺨을 한 차례 세게 때렸습니다. 그리고는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세상에 이런 못된 여편네가 있나? 글쎄 어머니를 죽이겠다고 밤을 삶아서 거기다 꿀을 찍어서 드려?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해봐!"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내는 두 손을 모으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진정으로 자기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남편은 껄껄 웃으며 아내에게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여보, 밤을 삶아서 거기에 꿀을 찍어 먹는다고 해서 죽기는 왜 죽겠어? 당신이 어머니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니까 내가 보기에 딱해서 꾀를 조금 부렸지."
그렇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사람이 변합니다. 내게 사랑이 있으면 우선 나 자신이 변합니다. 아울러 다른 사람도 변하게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변화가 있기 마련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사랑장을 기록했겠습니까? 고린도 교인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아직도 어린 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변화시켜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위대한 사랑장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3:1∼3에서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사랑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랑은 과연 어떻게 행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4∼7절에서 열다섯 가지로 우리에게 조목조목 설명해 주었습니다. 열다섯 가지 모두가 동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형용사는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은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라 동작입니다. 사랑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사도 바울은 8절에서 사랑의 영원성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었습니다. 9∼10절에서는 사랑의 온전성에 대해서 말씀해 주었고, 11∼12절에서는 사랑의 성숙성에 대해서 말씀해 주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고전13:13을 모두 암송해 보십시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소망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울러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이 있어야 우리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우리에게 있는 모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내가 보기에 좋아 보이는 것은 언제나 그것이 내게 있어야 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봅니다. 아마 여러분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침에 비가 많이 내립니다. 그래서 우산 가운데 제일 큰 것을 골라서 쓰고 나갔습니다. 한참 가다보니까 날씨가 개였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우산은 성가신 존재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우산을 내버릴 수도 없고 또 가지고 다니자니 거추장스럽습니다. 또 값비싼 우산 같으면 어디에 두고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걱정도 됩니다. 비가 올 때는 우산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비가 오지 않으면 불필요합니다. 오히려 있는 것이 불편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있는 것이라고 해서 항상 내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돈이나 물질은 어떻습니까? 돈만 있으면 필요한 것을 언제라도 살 수 있기 때문에 돈은 항상 내게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영화 「타이타닉」을 보면 배가 빙산과 충돌해서 침몰합니다. 구명보트의 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래서 서로 타겠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때 수억원을 내게 준다한들 내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겠습니까? 돈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금은보화가 아무리 많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헤엄치는데 방해만 될 뿐입니다.
또 우리가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살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우리가 돈으로 책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은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으로 얼마든지 맛있는 음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입맛은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돈이 있으면 좋은 저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가정의 행복까지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돈으로 사람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은 살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돈은 일체 가지고 가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을 때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습니다.
그 옛날 고린도 교인들이 그토록 사모했던 은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분, 고전1:7을 보면 그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은사가 너무나도 풍성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린도 교회가 평안한 가운데 든든히 서 나아갔습니까? 아닙니다. 문제 투성이었습니다. 은사는 풍성했지만 꼭 있어야 할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은사와 사랑이 없는 직분은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교만해져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기 쉽습니다. 교회에 문제만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이 없어도, 은사가 없어도, 직분이 없어도 얼마든지 좋은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일시적인 것, 영원하지 못한 것, 그저 이 땅의 것, 잠시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미국에 어떤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기르는 고양이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죽어버렸습니다. 그는 죽은 고양이를 그리워하면서 계속해서 그 고양이 생각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가 고양이처럼 변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양이에게 주기 위해 사다놓은 고양이밥을 자기가 먹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20년 동안 고양이밥을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고양이처럼 울고 고양이처럼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그의 얼굴이 고양이처럼 변해가더라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생각하면 생각하는 대로 그 사람이 변해갑니다.
우리는 누구를 깊이 생각해야 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영적인 것, 위엣 것을 사모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의 모습은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갈 것입니다. 영원하지 못한 것, 항상 있어야만 될 것이 아닌 것에 우리의 마음을 너무 빼앗기지 맙시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다. 그래야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고 또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에게 항상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돈이 없어도, 직분이 없어도, 은사가 없어도 우리는 얼마든지 좋은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우리는 결코 좋은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믿음의 대상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물질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 사람이 내게 그럴 줄 몰랐어! 내가 그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는데 그 사람이 내게 그럴 수가 있는가?"
왜 그런 말을 합니까? 사람을 너무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결코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믿음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요14:1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만이, 예수님만이 우리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하셔서 배의 고물에 누워 잠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강풍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풍랑이 휘몰아 쳤습니다. 바닷물이 배 안에 들어왔습니다. 배가 잠길 지경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풍랑과 씨름했습니다. 그들은 물을 퍼내고 노를 젓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되지 않으니까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막4:38입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예수님이 그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바다가 잠잠해졌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막4:40입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아무리 풍랑이 휘몰아쳐도, 배 안에 물이 들어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히 잘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시고 나의 삶을 주관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풍랑이 아무리 휘몰아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사십일을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산다고 합니다. 물은 삼일을 먹지 않아도 산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록에 의하면 숨을 8분 동안 쉬지 않고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은 정말 끈질깁니다. 그런데 소망이 없으면 사람은 단 1분도 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희망이 있으면 어떠한 삶의 역경이라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요셉이 그러했습니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는 종살이를 했습니다. 거기다 여주인의 모함을 받아서 감옥에 갇혔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꿈이 있었으니까 그 꿈을 붙들고 소망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근 속에 있는 그의 가족들을 모두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소망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은 작고했습니다만 영국의 유명한 문필가요, 캠브리지와 옥스퍼드대학의 교수였던 루이스(C. S. Lewis)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에로스의 사랑에 의해서 태어나며, 스톨게의 사랑에 의해서 양육을 받고, 필로스의 사랑에 의해서 성숙된다. 그리고 아가페의 사랑에 의해서 완성된다."
옛날 헬라 사람들은 사랑을 네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했습니다. 이런 사랑이든지 저런 사랑이든지 간에 하여튼 사람은 사랑을 떠나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육백 가지가 넘는 많은 계명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열 가지로 간추린 것이 십계명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두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두 가지를 합치면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떠나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살전1:3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표현이 있습니다. "믿음의 역사." 믿음은 역사와 연결이 됩니다. "소망의 인내." 소망은 인내와 연결이 됩니다. 그러면 사랑은 무엇과 연결이 됩니까? "사랑의 수고." 사랑에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일깨워주기 위해 우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난 자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주고 싸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 짐승에 태워서 주막에 데리고 왔습니다. 하루를 머물면서 그를 극진히 보살펴주었습니다. 그 다음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면서 잘 돌보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만약 비용이 더 들면 자기가 돌아올 때 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에는 실천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을 때, 과연 내게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따지면서 사랑이 부족함을 가슴 아파하고 괴로워할 때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앞에서 말씀드린 루이스(C. S. Lewis)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게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면서 괴로워하지 말라. 오히려 마치 내게 사랑이 있는 것처럼, 지금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행하라.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실제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사랑은 실천입니다. 연습입니다. 훈련입니다. 사랑은 배우는 것입니다. 마치 내게 사랑이 있는 것처럼 나아가서 사랑을 실천하십시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거울을 보고 얼굴표정도 부드럽게 연습하고, 말도 편안하게 할 수 있도록 연습하고, 또 행동도 연습하는 가운데 실제로 사랑의 사람으로 바뀌어져 가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삼각형이 있습니다. 세 변으로 되어있는 안정된 삼각형입니다. 세 변의 이름은 각각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그런데 세 변의 길이가 똑같지 않습니다. 한 변이 더 깁니다. 그 긴 변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가운데 사랑이 제일이겠습니까? 물론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는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줄 압니다. 그 이유를 네 가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믿음과 소망은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베푸는 것이니까 따져보면 다른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사랑은 타인을 위한 것이고, 믿음과 소망은 본인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랑은 믿음과 소망보다도 더 우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요일4:8,16에 보면 하나님을 가리켜서 "God is love(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보아도 "God is faith, God is hope"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믿음과 소망보다는 위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셋째, 사랑은 영속성에서 믿음과 소망보다 더 뚜렷하고 현저합니다. 어떤 사람은 비유적으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신부가 가마를 타고서 신랑집으로 갑니다. 앞뒤에 가마군이 가마를 들고 갑니다. 앞에 가는 가마군의 이름을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앞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뒤에서 가마를 들고 가는 사람은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저 앞에서 이끄는 대로 믿음으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에 따라가는 가마군의 이름을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신부의 이름은 사랑입니다. 이제 신랑집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 가마는 해체되고 가마군의 임무는 그것으로 끝납니다. 가마군은 신랑이 있는 안방에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신부만 신랑의 영접을 받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되면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그 사명이 완수됩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빛과 사랑이 넘치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사랑만큼은 천국에서도 영원합니다. 이처럼 사랑이 영속성에 있어서 믿음과 소망보다는 더 뚜렷하기 때문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 사랑이 있는 곳에는 믿음과 소망이 절로 따라옵니다. 사랑은 믿음과 소망의 원천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3:16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사랑으로 시작했습니다. 중반부입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사랑으로 시작해서 믿음이 생깁니다. 하반부입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생의 소망도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니 사랑은 믿음과 소망의 근원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고전13:7에 보면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믿음이 절로 생깁니다. 또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소망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믿음도 소망도 존재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처럼 사랑이 믿음과 소망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서 사랑은 그 가운데서 제일인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랑이 없으면 믿음과 소망은 어떻게 보면 잔인합니다. 왜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이 일어납니까? 그 사람들에게도 믿음과 소망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간에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믿음과 소망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은 작고를 하셨습니다만 미국의 대석학 가운데 헨리 나우엔이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하버드대학과 또 예일대학에서 후학들을 20년 동안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가 쓴 책은 언제나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서점에도 그의 번역된 책들이 많이 나와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20년 동안 가르치던 교수직을 홀연히 사임했습니다. 그리고는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데이브레이크(Daybreak)라는 장애인 보호시설의 직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그곳에서 어린 장애아들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몸을 씻겨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대석학으로서 강단에서 제자들을 가르쳐야 할 사람이 왜 이렇게 엉뚱한 짓을 하고 있습니까?"
그때 헨리 나우엔 박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동안 인기와 명성이라는 꼭대기를 바라보면서 힘들게 올라가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동안 내 눈에는 그저 나 자신만 바라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곳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비로소 나는 내리막길을 쉽게 내려가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내 눈에 예수님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비로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곳에서 자기가 깨달은 한 가지를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내가 이곳에서 장애아들을 돌보는 동안에 그 아이들은 내 명성, 내 지식, 내 인기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오직 그 아이들에게 관심이 있던 것은 내가 그들을 사랑해 주고 그들의 사랑을 순수하게 받아들여주는 것 한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학식과 명성과 수많은 저술은 아이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오직 사랑 밖에는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대인관계를 가질 때 그 사람이 내게서 제일 관심 있어 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을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권력도, 지식도, 명예도 큰 의미를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 봅시다. 또 아내가 남편을 사랑해 보십시다. 절로 입에서 이러한 말이 나올 것입니다.
"우리 집 바깥양반이 제일이야! 우리 집 사람이 제일이야!"
왜 그렇습니까? 문자 그대로 사랑이 제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섬기고 있는 교회를 사랑해 보십시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우리 교회에 와! 우리 교회가 제일이야!"
절로 그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말 그대로 제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우리 모두 사랑의 사람이 되어서 우리가 어디에 가든지 사랑의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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