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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 안에서의 나 (빌 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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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의 나 (빌3:7-9)

우리 인간에게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생식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다 동물들이 가진 욕망이지만 인간도 한편 동물에 속해있기 때문에 벗어날 수 없는 욕망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여러 가지 기본 욕구들을 종합해서 가장 밑바닥의 욕망이 무엇이냐 할 때 우리는 세 가지 정도를 짚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생존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살고싶은 욕망입니다. 세상에 어느 누구도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도 이 생존욕을 제외한 체 여기에 앉아있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살고싶은 욕망이 있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생존욕은 아주 강한 것입니다.

안락사 논쟁에 불을 붙인 사건이 1975년 미국에서 있었는데 바로 카렌 앤 퀸란(Karen Ann Quinlan) 양의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21세로 식물인간이던 퀸란 양은 인공 호흡기로 연명하고 있었고 주치의는 "인공 호흡장치를 제거하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하였습니다. 부모는 회복 불가능한 딸이 품위와 존엄 속에 죽기를 바란다며 병원 측에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줄 것을 요청했고, 우여곡절 끝에 법원은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도 좋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인공호흡기가 제거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퀸란 양이 그 후 인공호흡기의 도움 없이도 9년 간이나 더 생존하다가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사람 목숨은 모진 것입니다. 이제 죽어야할 사람도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간에 마지막 순간까지 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욕망인 것입니다. 때때로 이 살고싶다라는 욕망이 반대작용을 일으켜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죽고싶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가끔 살기가 어려울 때 죽고싶다라고 합니다. "내가 죽어야지, 내가 진작 죽었어야 저 꼴을 안 보는 건데..." 여러분,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죽고싶다라는 말은 살고싶다 보다 더 살고싶은 욕망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고싶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독약을 갖다드리면 안 됩니다. 오히려 보약을 해드리면서, "잘못했습니다. 잘 모시겠습니다. 오래오래 사십시오." 이렇게 해야 기분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인간의 욕망은 소유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았으니 이제 자기의 것을 가지고 싶은 것입니다. 이 소유욕은 굉장한 것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싶은 욕망, 우리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보면 싸웁니다. 내꺼야 내꺼야 하면서 싸웁니다. 참 가소롭습니다. 그 녀석들 태어날 때 내가 봤거든요. 내가 속으로 "야 이녀석들아, 네께 어디 있냐, 네께. 벌거숭이로 나와놓고." 독일에는 아이 낳을 때 애 아빠가 들어가서 아이 낳는 것을 도와줘야 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딸 둘 낳는 것을 다 봤어요. 저는 두 번이나 봤다구요. 두 번 보니까 거기에 진리가 있어요. 사람이 태어나는데 어떻게 하고 태어나느냐 하면 '요러구' (주먹을 꼭 쥐고) 태어나요. 아이가 이렇게(손을 편채) 태어나면 문제가 있습니다. 아이는 '요러구' (주먹을 꼭 쥐고) 태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저게 뭘까하고 봤더니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한몫 잡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목회를 하다보니까 사람이 죽는 장면도 많이 봤어요. 임종 예배를 수도 없이 드렸습니다. 예배 중에 사람이 세상을 떠납니다. 여러분, 사람이 세상을 때, 죽을 때는 어떻게 죽는 줄 아세요? '이러고'(손을 펴고) 죽는 거예요. 사람이 이렇게(손을 움켜쥐고) 죽으면 문제가 있는 죽음입니다. 여러분은 다 '이렇게'(손을 펴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뭔가 소유하려고 태어나고 얻으려고 태어났지만 하나님 앞에 가는 순간에는 가지고 갈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알량한 지식을 가지고 가겠습니까? 알량한 재산을 가지고 가겠습니까? 내로라 하는 경험을 가지고 가겠습니까? 요즘 말로 '노하우'를 가지고 가겠습니까? 하나님 앞에는 가져갈 것이 없어요. 이걸 진작 깨달으면 정말로 예수 잘 믿을텐데... 소유욕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 인간에게는 소속욕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생존욕이나 소유욕과는 조금 다른 정신적인 욕망입니다. 사람은 어딘가 소속되어 있어야 만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국민이라면 어느 나라에 소속되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돈은 많은데 자기가 속한 나라가 없다. 국제적인 난민이다. 이처럼 불행한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다. 여러분, 월드컵 경기가 있는데 응원할 나라가 없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이 됩니까? 우리가 왜 열광했습니까? 돈이 생긴 것도 아니고 병이 낳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기뻐했습니까? 연전 연승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소속욕의 포만감 속에서 우리는 밥을 안먹고 일을 못해도 즐거웠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정신적인 욕망인 것입니다. 교인들 중에 불쌍한 교인들이 있습니다. 교인은 교인인데 소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등록을 안 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이 교회, 내일은 저 교회, 오늘은 이 부흥회. 내일은 저 기도원. 여러분, 이런식으로 지내면 건강한 교인이 못 됩니다. 밥을 먹어도 그 맛이 그 맛이지만 그래도 아내가 해주고 어머니가 해주는 집에서 먹는 그 밥이 살로 가는 겁니다. 오늘은 짜장면 내일은 볶음밥 해보세요. 별로 건강에 그렇게 좋지 못하다 그 말입니다. 누가 부흥회 오면 아, 저 목사님 설교 잘 한다고... 잘하긴 뭘 잘해요. 그 교회에 가서 서너 달 지내봐요. 그게 그거예요. 인간이 잘하면 얼마나 잘하고 못하면 얼마나 못하겠어요. 그저 한 지도자 밑에서 한 교회 섬기면서 오랫동안 신앙생활 할 수 있다는 것, 축복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소속감이 있어야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내가 이런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욕구의 수위조절을 하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정말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생존욕에 있어서, 소유욕에 있어서, 소속욕에 있어서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아야 합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살고 싶은 욕망에 충실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생존욕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죽고싶다거나 때려 치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죄라는 말입니다. 아주 못된 사람들이 있어요. 자살 사이트를 만들어가지고서는 사람을 현혹해서 죽이는 이 못된 사람들. 얼마 전 신문에 보니까 자살사이트를 80개를 폐쇄했다고 합니다. 80개 폐쇄하면 800개 생길 거예요. 얼마나 못된 사람들이에요.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합니다. 사람을 어떻게 세뇌교육을 시키면 그렇게 됩니까? 미국이 나쁘고 좋고 이스라엘이 나쁘고 좋고 그건 떠나서 한 인간을 그렇게 세뇌교육 시켜서 자기의 생명을 죽이도록 만드는 이 못된 사람들. 우리는 기본적인 생존욕에 대해서 사랑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생존욕이 너무 지나쳐도 안 됩니다. 그저 적당히 살만큼 살았으면 갈 때를 대비해야지. 팔십 인생을 백 이십 세로 만들려고 하고, 불로초를 만들려고 하고, 피를 일년에 한 번씩 갈아서 젊은 피를 수혈하려고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세포를 떼다가 복제 인간을 만들고 거기서 장기를 떼다가 자동차 부품 갈아 끼듯이 그렇게 해서 수백 년을 살고자 하는 이 욕망 때문에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있는 겁니까? 하나님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적당히 살다가 살만큼 살았으면 감사하고 떠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지구가 좀 평안해질 수 있어요.

소유욕도 마찬가집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주님의 말씀에도 있듯이 적당한 것 의식주의 문제, 집 한 채 가지고 싶은 것, 그거야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소유욕이 지나치다는 말입니다. 이 지나친 소유욕 때문에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오늘 대한민국에 정계 관계에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 대통령의 친인척까지 무엇이 문제입니까? 지나친 소유욕 때문에 나라가 어지럽습니다.

제가 독일에 있을 때 TV프로에 그 때 서독만 있는데 빈익빈 부익부에 대한 토론회가 벌어졌는데 어떤 여성단체대표가 나와서 그럽디다. "독일에 너무 부자들이 많아서 문제다." 그런데 독일에서 부자 소리를 들으려면 얼마를 가져야되나 봤더니 백만 마르크 이상 가지면 부자라고 합니다. 백만 마르크가 얼마냐 하면 오 억입니다. 제가 그 소리 듣고 깜짝 놀랬습니다. 우리나라보다 다섯 배나 잘 사는 나라에서 오 억을 가지면 부자라니? 여러분 대한민국에서 누가 오 억 가지고 부자라고 하면 정신나갔다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오 억이 큰돈이긴 하지만 부자라고 명함을 내놓을만한 돈은 못된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백만 마르크 이상 가진 사람이 백만 명이나 되니 이 나라가 되겠느냐?"고 질책을 하는데 제가 상당히 부끄러워졌습니다.

우리나라에 이 가진 자들의 욕심 때문에 너무도 사회가 힘들어하는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다라고 하는 것은 소유욕조차도 조절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소속욕도 예수를 믿는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조절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소속욕이 아주 없어도 안 됩니다. 어디에 소속되려고 하는 노력이 있어야 되고 소속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소속욕이 지나칠 때 보스화 되는 것입니다. 조직을 만들고 조직을 거느리고 조직의 보스가 되고 자기 하수인을 만들고 세력을 형성하고 약자에 대해서, 자기 반대편에 대해서 무차별 공격을 하고 이렇게 해서 교계 안팎이 시끄럽단 말입니다. 한 교회 안에서도 보스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소속욕의 지나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회에 이제 보스정치는 사라져야 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가진 것이 많으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인간으로 내가 발견될 것인가? 그것만이 사도 바울의 관심사였습니다. 오래 사는 것도, 많이 가지는 것도, 교계의 보스가 되는 것도 그의 관심이 아니었던 말입니다. 세상의 자랑거리는 없었어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 것인가? 이것만이 그의 관심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나를 다시 발견할 때 십자가는 내게 두 가지 의미를 가르쳐줍니다. 하나는 내가 얼마만큼 죄인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내가 얼마만큼 죄인입니까? 죽어 마땅할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값 주고 사셨는데 무슨 값을 지불하셨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 독생자 희생하셔서 그 값으로 나를 사셨어요. 나는 죽어야 마땅할 사형수였습니다. 죽어야 마땅할 죄인이 주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살아났다고 하는 그 귀한 메시지를 십자가는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십자가는 내가 얼마만큼 가치 있는 자인가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값 주고 사셨는데 독생자 외아들을 희생해서 나를 사셨다면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나의 가치는 적어도 하나님의 자녀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인 것입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어떻게 평가하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은 아들이고 딸인 것입니다. 이것을 십자가가 가르쳐줍니다.

십자가 안에서 여러분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여러분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죽을 죄인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모든 욕망에 대해서 재조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습니까?

첫째로, 십자가 안에서 나를 발견할 때 만족이 있습니다. 죽을 죄인 살려주셨습니다. 죽어야할 존재 자체가 멸망 받아야 될 존재 자체가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다른 것은 이제 부수적인 것입니다. 얼마나 더 사느냐? 얼마나 더 가졌느냐? 얼마나 더 누리느냐? 그런 것은 부수적인 일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왜 믿습니까?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 하십니까?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한 삶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사자가 맹수입니다. 닥치는 대로 물어뜯을 것 같지만, 그러나 사자가 포식한 다음에는, 만족한 상태에서는 앞에 얼룩말이 얼씬거려도 멀뚱멀뚱 쳐다봅니다. 달려들지 않습니다. 왜? 만족하거든요.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한 사람은 앞에 명예가 얼씬거려도 부정한 돈이 얼씬거려도 멀뚱멀뚱 보고 마는 것입니다. 왜? 만족하거든요. 욕심을 내지 않는 겁니다.

둘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한 사람은 또 무엇이 있습니까? 감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가를 발견한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옛날에 소유에 집착하고 알량한 명예에 집착할 때는 매사에 불평이고 매사에 짜증이고 오르고 올라도 계속 해서 갈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재조명해볼 때 이제는 모든 것이 감사밖에 없습니다.

여수에 애양원이 있습니다.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의 기념관이 있었습니다. 거기 제가 한번 갔더니 몇 년 전에 그 때 손양원 목사님 설교집이라고 아주 얇은 책이 발행되어 있어서 그 때 제가 샀습니다. 사서 보니까 그 얇은 책에 감사하라는 설교가 다섯 편이나 있었습니다. 참 이상하다. 손양원 목사님 교인들이 누구입니까? 전부 나환자들 아닙니까? 그 사람들에게 뭐 할 말이 있어서 감사하라는 말을 다섯 편이나 설교를 그 얇은 책에 반 이상을 감사하라는 설교를 했을까? 그리고 제가 그 첫 편을 펼쳐보는데 너무 충격적인 말씀 일곱 가지를 감사하랍니다. 첫째, 물 주신 은혜 감사할 것. 저는 그 문장을 읽는 순간에 마음에 울컥하는 감정이 내가 언제 물 한 모금 마시면서 감사했나? 비싼 음식 먹고 감사하고 그저 커피 나오면 감사하긴 했는데 물 마시면서는 감사 안 했거든요. 어떤 땐 감사하고 어떤 땐 감사하지 말아야되는지 고민스러워요. 사실은 물이 제일 귀하거든요. 물 마시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래본 적이 없거든요. 두 번째, 햇빛 주신 은혜 감사할 것. 햇빛 쳐다보면서 짜증스럽다고 생각하고 덥다고 생각하고 양산 받쳐들기나 했지 언제 감사했어요? 우리는 너무나 햇빛이 많은 나라가 감사를 몰라요. 햇빛 쐬면서 내가 언제 감사해봤어요? 옥토를 주신 은혜 감사할 것. 죽을 죄에서 살려주신 은혜 감사할 것. 지금까지 생명을 연장시켜주신 은혜 감사할 것. 앞으로 영원한 영생의 나라를 보장해 주신 것 감사할 것.

저는 그 설교를 읽으면서 눈에서 눈물이 나오는데 주체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기본적으로 받을 것 다 받았는데 원망하고 불평하고 짜증스럽게 생각하고 자기는 일이 안 풀린다고 생각하고 아무거소 못 받았다고 생각하고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이 모습 속에 하나님께서 기본적인 감사를 다 주셨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이 십자가 안에서 달라져야 합니다. 이것도 주시오 저것도 주시오가 아니라 하나님 주신 복을 헤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해와 비를 내려주십니다. 똑같이 축복을 주시는데 누구는 받고 누구는 못 받습니까? 감사는 축복을 받는 그릇인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 그릇입니다. 감사의 그릇을 넓힐 때 모든 것이 감사인 것입니다.

셋째로, 또한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이제 받은 바에 만족하고 감사할 때 나눔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제 먹고 살만하면 나머지는 내 것이 아닙니다. 나눌 줄도 알고 베풀 줄도 알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배려할 줄도 아는 것이 십자가의 예수 안에서 믿음 생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기백만원을 누구한테 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나눔이라고 하는 것. 작은 부분에서부터 실천할 수 있습니다.

물건 살 때 여러분 어떻게 합니까? 사과 사는데 알아서 담아달라고 하면 좋을 텐데 자기가 제일 좋은 것만 골라서 다 담으면 그 장사는 나머지 가시고 어떻게 장사하라는 겁니까? 좋은 사과 나쁜 사과 골라서 받아왔는데 내가 좋은 것만 다 가져가면 그 사람은 어떻게 팔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고선 전도지 주면서 새문안교회 나오라고 하면 누가 나와요? 이거 너무하지 않아요? 그래도 사는 사람이 파는 사람보다 경제력이 더 있을 텐데 그렇게 합니까? 그 사람에게 자선했다고 생각하고 알아서 좀 담아달라고 하세요. 알아서 담아준 사과 중에 제일 좋은 거 그 아주머니한테 드리면서 "아주머니, 고생 많으시죠? 이거 선물로 드릴께요." 그리고 전도지 주면서 "새문안교회 나와보세요." 그러면 그 사람이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지만 내 평생 사과장사하면서 이런 대접은 처음 받았다고 고마워할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 정말 다르구나. 그런 사건이 겹치고 겹치고 겹칠 때 그 사람이 교회에 나오지 않겠습니까?

꼭 이 교회, 이 자리에 사람을 갖다 앉혀야 전도입니까? 이 불신의 사회에서 기독교의 이미지를 높이고 업그레이드시키는 것도 전도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나눔을 통하여 삶에서의 전도를 실현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받았는데, 이미 십자가 밑에서 감당할 수 없는 넘치는 사랑과 은혜를 받았는데 이제 세상의 어떤 자그마한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속상해 하고, 계속 그것에 연연해하고, 그로 인하여 남을 저주하고 비방하고 분을 삭이지 못해서야 그리스도 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저 새를 보라. 저 꽃을 보라." 왜 주님께서는 "저 부자들을 보라. 저 권력자들을 보라. 저 선거에서 당선된 자들을 보라" 라고 하지 않으시고 "새를 보라. 꽃을 보라" 고 하셨을까요?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소유를 비교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비교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깨달을 때 비로소 참 만족과 가슴 저미는 감사와 미련 없는 나눔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려 했던 사도 바울에게는 세상에 속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모두 배설물처럼 여겨졌고, 자신의 영성 훈련에 방해물이 되었기에 그는 과감히 버렸다고 했습니다. "내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 라는 그의 고백을 음미해 보십시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라고 한 그의 처절하리만큼 엄숙한 선언 앞에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에 썩어질 명예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려 한 잘못을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분토와 같은 부정한 재물과 허망한 권력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했던 우리의 어리석음을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쟁취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과감히 버리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윤리와 양심을 세상의 자랑거리를 얻는데 해가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버리면서 살지는 않았는가를 심각하게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 할 때에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이 찬송 속에서 우리는 다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서 살아온 죄를 회개하고 주님 품으로 돌아와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살을 찢기시고 피를 쏟으신 넘치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만족과 잔이 넘치는 듯한 감사와 미련 없는 나눔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넘치는 사랑과 은혜를 주신 아버지 하나님, 죽을 죄인 살려주시고 용서받지 못할 자식을 용서하여 의롭다 하심에 감격하여 눈물 흘리던 때가 그리워집니다.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하고 부족함이 없었던 우리들의 마음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너무 때가 묻고 썩어질 세상의 명예와 재물과 권력에 욕심을 내어 주님의 마음을 슬프게 했던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나 같은 죄인 위하여 주님 달려 죽으신 십자가의 감격을 회복하여 우리의 가치관이 새로워지게 하시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했던 사도 바울의 고귀한 신앙 양심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이 교회가 어머니 교회로서의 모범을 보이게 하시고 이 어머니 교회가 가진 신앙과 윤리와 삶의 철학이 온 교회에 퍼지므로 아버지의 사랑에 보답하는 한국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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