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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의 도(고전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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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고린도전서 1:18)

  이 본문은 참 귀한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스럽게 보이지만, 구원을 얻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가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똑같은 사건을 두고서 어떤 이들은 미련스럽게 바라보고,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까 ?  이를 우리들은 이 시간에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십자가의 도란, 나사렛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그 죽음이 사람의 죄를 씻고, 사망의 세력을 이기고, 구원의 길로 향하게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십자가가 지금은 자랑스러운 심벌이 되었음을 세상 사람들도 인정합니다. 이 천국 복음이 겨자씨와 누룩처럼 모든 민족, 모든 나라에 전파될 것이라는 2000년 전 예수님의 예견대로 복음이 전세계에 퍼져나갔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월드컵이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그 36 개국의 참가 국가들의 국기가 광화문 네거리에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심방을 가다가 차 안에서 이 국기들 가운데 십자가를 그려 놓은 국기들을 발견했습니다.  나라의 모든 문화와 전통과 역사와 국민성을 융합하여 표현하는 것이 국기일진데, 그 국기에 십자가를 새겨 넣은 것은 예사롭게 볼 일이 아닙니다.  그 36개국 나라 중에 십자가가 있는 국기가 영국, 스웨덴, 덴마크입니다. 이 세 나라는 다 16강에 들어갔습니다. 그 외에 이 월드컵에 참여하지 못한 나라들이지만, 그리이스, 노르웨이, 뉴질랜드, 도미니카, 스위스, 아이슬란드, 통가, 투발루, 피지, 핀란드, 슬로바키아의 국기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모든 병원의 마크는 십자가를 쓰고 있습니다.  국제적십자사의 마크는 글자 그대로 붉은 색 십자가입니다.  영국과 미국에서 가장 영예로운 군인에게 수여하는 훈장이 무공십자훈장입니다. 이번 영국 월드컵의 대표팀 주장이 데이비드 베컴(27)이라는 미남  선수인데, 그가 신고 있는 축구화를 눈여겨 보면, 흥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축구화에는 십자가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성 조지의 십자가'입니다. 올해 즉위 50주년을 맞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에 대한 존경과 팀 승리의 기원을 담고 있는 표시입니다.

  지금은 신자나 불신자나 이 십자가를 이상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때로는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어떤 이들은 목걸이로, 어떤 이들은 귀걸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예배당은 말할 것도 없고, 가정집에도 걸려 있고, 그것도 가장 은밀한 안방에 십자가를 걸어놓는 집들도 많습니다. 가게나 사무실에도 이 십자가를 걸어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보는 귀한 장식품이 되었습니다. 이제 십자가는 영광이요, 승리요, 환희요, 구원이요, 치유의 상징으로 우뚝 서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 감격과 기쁨과 평화와 능력이 있습니다. 이는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안목에 대한 놀라운 변화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들 ! 이 십자가가 원래는 당당하게 드러내 놓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사형도구이다. 로마제국에서 가장 극악무도한 자를 죽이던 사형수단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영어로 크로스(CROSS)라고 하는데, 이 말은 라틴어의 크룩스(CRUX)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고문대, 형틀'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헬라어로 스타우로스(STAUROS)라고 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불행한 나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암시하듯, 십자가는 사람들이 만든 형벌 가운데 가장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옆에 함께 죽었던 강도 둘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 강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 하느냐 ?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이 십자가형으로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그들은 그 십자가에 처형당할 정도로 파렴치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그런 십자가를 목걸이를 해서 목에 걸고 다니고, 귀걸이를 해서 귀에 걸고 다니겠습니까 ?  어느 정신없는 사람이 그런 사형도구를 자기 안방에다가 버젓하게 걸어놓고, 아침 저녁으로 그것을 쳐다보겠습니까 ?  심지어 국가의 모든 뜻과 의지와 방향을 함축하고 있는 국기에다가 그것을 새기겠다는 그런 파격적인 발상을 하겠습니까 ?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부끄럽고, 저주스럽고, 창피스러움의 극치였습니다. 입에도 감히 언급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였던 십자가입니다. 이런 사형도구에 죽은 사형수 나사렛 예수님은 극악무도한 자로 여겨졌는데, 그 예수님과 그 예수님의 죽음이 인류를 구원하는 길이라고 믿는 십자가의 도는 정말 우매하고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믿을 것이 없어서 저런 사형수를 구세주로 믿고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다린다는 말인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당시 사람들이 이 십자가를 어리석고 미련스러운 것으로 공히 받아들이면서도,그 관점에서는 약간씩 차이가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과 로마사람들이 이 십자가를 어리석게 받아들인 이유가 다 달랐습니다.  먼저 유대인들은 이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에 대해서 표적을 구하는 민족이라고 평했습니다. 표적이나 이적이나 기적을 추구하고 열광하는 이들이 유대인입니다. 쇼킹한 것, 재미 있는 것, 흥분시키는 것,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여 군중심리를 부추기는 것, 이런 것을 아주 좋아하는 민족성이 유대인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관점에서 메시야를 받아 들일려고 했고, 그런 안목으로 십자가를 바라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기적이나 이적이나 시람의 감각적인 호기심을 끄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세속적인 왕이 되는 것도 거부하고, 이적을 보이되, 그 이적에서 영생의 떡으로 나아갈 것을 말씀하시자, 이 예수님이 그들의 눈에는 아주 싫어졌습니다. 특히 왕은 왕이로되,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킬 그런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야가 아님을 알고부터 그들의 마음은 실망을 넘어서서 분노로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터무니없게도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심지어는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 이런 말까지 서슴없이 내 밷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유대인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2-23)  바울은 말씀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 24). 요 1:9 에서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않았다고 말씀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미련스럽게 여기고 배척한 동족이 이 유대인이었습니다. 

  다음으로 헬라인들입니다. 헬라사람들은 지혜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지성과 그 인식체계의 잠재력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들은 이데아의 세계로 인도해줄 지혜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지성으로는 예수님의 인카네이션, 곧 성육신화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말씀, 곧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는 것, 하나님이 사람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몹시 못마땅했습니다. 더 가관인 것은 그 하나님의 아들, 곧 창조주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요, 불합리한 것이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이 예수님이라는 것이 말이 안된다, 그것도 육체를 입고 오셨다는 것은 말 같지도 않다고 보왔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의 도가 헬라사람들에게도 어리석게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말씀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진리냐, 무엇이 지혜냐, 이렇게 인간의 이성과 자연의 법칙에 다 수용된 것만이 진리인가, 그 진리를 발생케 한 진리는 더 큰 진리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 자연을 누가 만들었으며, 그 진리를 규정하는 인간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는가 ?  그렇습니다.  사람의 이성이 추구하여 정립해 놓은 법칙과 공식만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적인 교만입니다. 과학과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도 인정하는 자가 정말 지혜로운 자입니다.  이는 신앙의 세계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연, 물질이란 '있다. 본다. 그리고, 발견한다'는 세계입니다.  신앙은 이런 물질과 자연이 '어디에서 왔는가 ?  특별히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  존재하는 모든 것은 왜 있는 것이고,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관조하는 세계입니다.  이를 깊이 깨달아 가는 품성을 우리는 영성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한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지니라."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보다 더 위대한 진리는 없고, 최고의 지혜는 없습니다. 최상 최고의 복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신사참배 거부로 경찰서에서 심문을 받았을 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책에서 읽어 보왔습니다. "기독교는 지식적인 종교가 아니요, 신앙적인 종교입니다. 감정적인 종교가 아니라, 체험적인 종교입니다. 그런고로, 학사 박사가 믿지 못하는 진리를 무식한 노인들은 믿을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와 무식한 부인들이 체험한 사실을 학사 박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  법입니다. 그래서, 지식적 세계와 신앙적 세계는 서로 통하는 점도 있으나, 서로 통하지 못하는 점도 있는 것이니, 그런고로 기독교는 초자연적인 종교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눅10:21-24)

  다음으로 로마사람들은 그 십자가를 향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예수, 네가 왕이라면, 왕다운 실력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 리더의 자리에 걸 맞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십자가의 도를 바라보는 로마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강자의 철학이요, 정복의 관점입니다. 로마제국은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성장했고,  약 500년 동안 팍스 로마나를 이루었습니다. 뛰어난 인물을 찾았습니다. 소수의 천재, 소수의 비범한 자를 구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나라의 운명을 그에게 맡겨 제국의 계속적인 부흥을 꾀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리더쉽에는 다음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 째는 사자의 리더쉽입니다. 이는 물리적인 폭력을 기반으로 하는 통치스타일입니다. 포악하고, 잔인합니다. 노루나 사슴을 사정없이 물어뜯어 죽이는 강인한 발톱과 이빨을 실력으로 내거는 리더쉽입니다. 후진국의 리더들이 대개 이런 성격의 리더쉽을 지니고 있습니다. 규범이나 원칙이나 법이나 제도가 없이 그저 물리적인 힘이 있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정글의 사자와 같은 리더입니다.  여기에서는 법치가 통용되지 않습니다.  "짐이 곧 국가입니다." 

  두 번째는 로마 황제가 지닌 리더쉽입니다.  원래 로마는 공화정으로서 그 리더가 세습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뛰어난 인재의 장군이나 원로원 의원이 황제가 되어 그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지와 덕과 용, 세 가지 미덕을 조화롭게 갖춘 자가 철인이요, 그가 리더가 될 수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황제나 리더는 이런 인품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현대 국가나 민주 사회, 건실한 기업이 요구하는 리더쉽은 대개 이런 종류의 리더쉽이라고 하겠습니다. 학교 교육의 목표도 바로 이것이요, 학생은 이런 세 가지 자질을 갖추게 하고자 교육을 시킵니다. 요즘 기업의 뛰어난 CEO는 이 리더쉽을 지니고 있어야 그 회사를 잘 유지 관리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 나라에서의 리더쉽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지도자는 선한 목자상으로서의 리더쉽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시는 리더입니다. 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이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는 다른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사람의 죄 값을 대신 치루시고자 십자가에서 묵묵히 죽어가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강자의 논리, 힘의 숭배라는 관점에 바라본 로마사람에게 십자가의 도는 너무도 어리석게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런 로마 사람들을 염두하고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장) 

  로마를 가보면, 우리들은 콜로세움이라는 대형 원형경기장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은 로마의 권력이 십자가를 오해하고 미워하여, 심히도 모독하고 저주했던 장소입니다.  기독교가 박해받던 시대에 얼마나 많은 순교자들이 이곳에서 피를 흘렸는지 모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로마의 황제보다 더 위대한 황제로 모신다고, 인류의 구주라고 믿는다고 그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원형경기장에서 맹수들의 밥이 되어야 했고, 검투사의 상대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로마제국의 힘과 권세를 상징하는 이곳에 지금은 대형 십자가가 우뚝 세워져 있는 것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시간이 흘러 누가 이런 십자가를 약하다고 하겠습니까 ? 외모로 보기에 약한 것 뿐이었습니다.  십자가가 정말 강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아보는 자가 영안이 열린 자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요, 성령님이 충만하게 임한 자입니다.  십자가는 강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막힌 담을 헐고,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예수님을 구주로 섬기고,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하심에 따라 사람들의 심령에 에덴동산을 다시 세우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로 잃어버렸던 그 아름다운 세계, 눈물도 없고, 죽음도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세상을 이루어낼 수 방법, 그것이 곧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다만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약해지신 것뿐입니다.  속은 참으로 강한 것이 십자가입니다. 약한 자, 어렵고, 불쌍하고, 병든 자들을 위하여 약하게 보여진 것이고, 그래서 말구유간에서 시작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했던 팍스 로마나는 역사의 무대에 사라진지 오래이지만, 가장 약하게 보였던 십자가의 도와 그 복음은 로마로부터 전세계 펴져 나가 진정한 살롬을 이루고자 하며,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고 있습니다. 이른바 팍스 크리스투스 "그리스도의 평화가 완전히 실현되는 날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온 지구상의 모든 크리스챤들, 로만 캐톨릭, 동방정교회, 모든 개신교들인이 손에 손을 맞잡고, 한 믿음 가지고, 한 주님 모시고, 한 성령님의 역사 안에서 이 날을 대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안따갑게 지금도 이 십자가의 도를 어리석고 미련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령님의 감동이 없고, 영적인 혜안이 잆는 자들에게 이 십자가는 도무지 손에 잡히지를 않는, 답답하고 괴로운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이렇게 예배당에 앉아 예배 드리는 것을 미쳤다고 봅니다. 이 좋은 날씨에 야외에 나가지 않고, 휴일을 즐기지 않는 것을 참 이상스럽게 생각하고, 도무지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참 어리석고, 재미없고, 답답한 맹추 정도로 바라봅니다.  교회를 위해서 시간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고, 정성을 다 쏟는 것은 더 더욱 이해 못할 일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초창기는 다 이런 훌륭한 믿음의 선진들이 흘린 땀과 피에 의해서 지금 이렇게 거대한 한국교회가 되었습니다. 처음 그분들은 온갖 오해와 시기와 미움을 다 받아가며, 교회를 품에 안고서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애지중지 보살피고 키웠습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집안의 문중과 마을 유지들의 유교 봉건적인 눈총을 수없이 받아가며, 교회를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 희생으로 지금은 그 교회가 마을 어구에 우뚝 서서 구원의 빛을 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교회와 혼인하셨습니다. 교회가 당신의 가정이었고, 일터였고, 남편이었습니다. 그 교회를 사랑하여 가난하고, 어렵고, 병든 사람들의 집을 찾아 다니며, 무수히도 많이 심방하셨습니다.  한 번 가고, 두 번 가고, 또 가서 권면 하고, 설득하고, 사랑하고, 위로하면서 가방 하나 들고, 한복 입으시고, 논두렁을 지나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일일히 심방하셨던 어머님입니다.  그 어머니는 당신의 남편보다 목사님을 더 극진히 섬기시고, 주일학교 교사들 식사 대접하는데 으뜸이셨습니다. 구역식구들을 당신의 자식보다 더 받들었습니다. 성탄절 새벽송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 언 손을 녹여주시고, 따뜻한 떡국으로 한 사람 한 사람 다 먹여주셨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무척이나 절약하시면서도, 교회를 위한 일에는 그 소중한 물질을 덤성 덤성 내놓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 한국교회가 이렇게 성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 평생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오직 교회만을 위해서 살다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 수고와 노력과 눈물을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  세상 사람들은 이런 어머니를 미쳤다고 조롱했습니다. 누구는 계산할 줄 모릅니까 ? 누구라도 편안하게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 그렇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왜요 ?  십자가의 도가 어머니를 너무도 감격시켰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생명을 복제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첨단 생명공학이 복제인간을 가능하게 하고, 장차 불로장생이라는 인류의 꿈도 실현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종교나 신앙의 세계까지 거침없이 파고 들어오는 이 무서운 과학과 기술과 이성의 시대에 그리스도의 복음과 십자가의 도가 정말 미련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이 근본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곳이 있는데, 영원한 세계입니다. 미지의 세계요, 사후의 세계요, 영적인 세계요, 가히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 곳을 연결시킬 수 있는 유일한 끈은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요즘 혜화동에 있는 서울 과학관에서 '인체의 신비'라는 전시회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21세기는 몸 학이 성행할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몸은 과학·예술·인문학의 오랜 화두였지만, 몸의 실체와 신비로움은 의료인 등 특정 직업인만의 관심사였을 뿐, 보통 사람들에게는 미지의 세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전시회는 독일에서 시작했는데, 20 여 구의 시신들을 기증 받아 그 시신을 해부하여 골격은 골격대로, 근육은 근육대로, 신경계, 그 미세한 혈관들, 오장육부의 장기들을 세밀하게 해부하여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그 곳을 보면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의사도 아닌 저 같은 일반인들도 사람의 신체 내부를 저렇게 자세하게 볼 수 있구나 하는 것이 참 많은 감동과 충격과 지식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곳을 약 3 시간 동안 쪽 돌아보면서 의사가 아닌 목사로서 느끼는 바가 있었는데, 그것은 도대체 '사람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영혼이 빠진 몸 둥아리, 생명이 사라진 시신은 그저 살코기에 불과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표현을 써서 저의 느낌을 그대로 전한다면, 허벅지의 한 부분을 절개해 놓았는데, 그 단면이 선홍빛을 띠고 있는 소갈비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빨간 고깃살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뼈들은 사골과 같았습니다. 제가 앞으로 소갈비를 먹을 수 있을런는지, 갈비탕, 곰탕을 먹을 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 인간이 고귀하다는 것을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  그 몸이 수 천년 동안 이루어 놓은 문화와 그 위대한 문명이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는 것인가 ?  그렇다면, 동물과 다르다는 것은 그 문화를 이루어놓은 지능과 머리입니까 ?  그렇지만, 생명이 없는 시신에는 그 지능을 담고 있었던 뇌도 한 낫 주름살만 보이는 살덩어리에 불과했습니다. 도대체 사람의 존재성을 규정하는 그 본질적 요소가 무엇입니까 ?  왜 사람의 인권은 동물이나 식물의 권리보다 더 소중하게 다루져야 합니까 ?  동물의 살이나 뼈와 별로 다를 바 없는 그 시신 앞에서 누가 윤리를 만들었고, 누가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창 2:7 말씀,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있는 영이 되니라"  그래서, 마 4:4 말씀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고 하는 영적인 존재라는 것, 이것이 진정한 사람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세가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영의 세계가 있습니다.  몸은 사람이 죽일 수 있을지라도, 그리하여 그렇게 의사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해부되어 그 살덩어리와 뼈들이 남에게 보여질 수 있을지라도, 그 영은 죽일 수 없고, 건드릴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영적 존재를 아는 것이 신앙이요, 십자가의 도입니다.  전도서 3:11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3:21에는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고 하였습니다.

  요즘 월드컵의 열기가 온 나라를 들썩이고 있습니다. 온 국민은 한 마음이 되어 레드 데블의 열화와 같은 응원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까지 이 축구가 현대인들의 심성을 완전히 사로잡는 이 능력 앞에 십자가를 붙들고 산다는 것이 궁색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잠시 휘몰리아치는 이 소용돌이, 그래서 잠시 반짝했다가 사라질 것에 자신을 내던지지 말고,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은 십자가의 도에 자신을 내던져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진수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복음과 교회는 따분하고 답답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성도들에게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가오는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어떤 능력입니까 ?  죄 사하는 능력이요, 구원의 세계로 이끄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신앙의 세계로 깊이 빠져들면 들수록 우리는 우리 속의 침윤되어 있는 죄성의 뿌리를 인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하여도 역시 죄인이요, 이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그래서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며, 그 내일이 저 천국으로 이어질 것이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신 예수님의 피 공로와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죄를 사하여 정결한 심령으로 거듭나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심령이 되게 합니다. 

  죄 짐을 지고 괴로워하십니까 ?  주님과 나만의 아는 죄로 그 무거운 발걸음을 걸어 겨우 이렇게 예배당에 나오셨습니까 ?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 앞에 흐르는 생명수가 그 죄와 허물을 씻어 정결케 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요일1:7)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1:18).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합니다. 

  이 십자가의 도는 병을 치유하는 능력이요, 하늘의 문이 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님의 충만하심의 역사가 일어나는 통로가 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힘이 있습니다. 이는 마귀가 도망가는 능력입니다.  각색 병들이 고쳐지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찔리는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예수님이 상한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영도 병들고, 마음도 병들고, 육체도 생활도 병든 존재입니다. 하나님께 쫓겨난 인간은 그 자체가 병든 인간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주께서 우리에게 치료의 능력을 베풀어 주셔서 고침받는 자녀가 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질병과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안고서 이 예배당을 찾으셨습니까 ?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리셔셔 보혈을 흘리신 예수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 십자가의 도에는 이미 죽음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부활의 능력도 담고 있습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능력입니다. 영원히 삽니다.  십자가를 의지하는 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을 누리며 영원토록 살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십자가를 붙들고서 오직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우리들은 이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영 죽을 우리를 살리려 그 영광 버리고, 그 부끄러운 십자가 우리들을 위해 지셨습니다. 우리가 이제 생명 있음은 주님의 은혜요, 저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그 길이 곧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광야와 같은 이 세상살이가 힘들고 어려워도, 이 땅이 죄 많은 세상일지라도, 이 십자가의 도가 있으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이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사랑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저희를 위하여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때로 저희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 십자가의 도를 미련스럽게 생각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저희들의 이런 영적 무지와 교만을 용서하여 주옵시고, 이제 이 십자가가 지닌 능력을 의지하며, 십자가 붙들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불안이 있는 곳에 평안을 주시옵고, 죄가 있는 곳에 죄 사함의 은총을 베푸시옵고, 죽음의 권세를 무서워 떠는 자들에게 영원한 소망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쉽지 않는 인생길, 광야 같은 삶을 걸어가는 저희들이오매, 십자가의 보혈로 약한 것과 질병과 마음의 상처와 연약한 삶을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기를 원합니다.  저희들을 주님의 보혈로 인쳐 주시옵소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주님을 찬양하오며, 저희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가에 달리사 피를 흘려주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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