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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경적인 효도관> 엡 6: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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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인 효도관> 에베소서 6:1-3절

지난 주는 전국교회가 다같이 지킨 어린이 주일이었습니다. 어린이 주일이 되면 전국 교회마다 성인예배때 안보이던 아이들이 부모손을 잡고 예배시간에 나타난다고 합니다. 엄마 잘들으셔야해요. 오늘 중요한 말씀이예요 그러면 이말을 듣고있는 엄마라고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꼬집으면서 한마디합니다. 이놈아 다음주일에 보자. 부모라고 대목을 놓칠리가 없지요. 오늘이 바로 그 어버이 주일입니다. 어버이 주일이 되면 모든 성도가 효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결같이 보이는 같은 반응이 하나 있습니다. 다들 효도에 관해서는 자신이 없다는 것이구요. 죄송하다는 마음이 들고 가슴이 아픈게 사실입니다. 이렇게 설교하는 저도 마찬가지로 죄송하고 자신이 없는 심정입니다.

부모에 대한 효도는 어느종교나 어느 민족이라도 모두 강조하고 가르치는 덕목이었습니다. 우리는 효도에 대한 접근을 인본주의적인 휴머니즘으로 할 수 있습니다. 도덕론적으로 접근하는 경우도 많아요. (제가 예전에 들었던 공자의 효도가운데에도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귤을 많이 들고 오는 공자에게 한마디 합니다. 그렇게 많이 담아오면 쏟아지지...그러면 공자는 일부로 넘어져 귤을 쏟아놓고 어머니 말씀 잘 들을걸 그랬어요. 어머니 말씀이 옳아요. 어머니가 건망증이 생겨서 문을 닫고서도 자식더러 또 닫고 오라고 해서 가보면 닫혀 있는거예요. 그러면 문을 살짝 열었다고 소리내어서 닫고 와서 "어머니 말씀대로 가보지 않았으면 온식구가 감기걸릴뻔했내요.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감동이 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도덕론적인 접근에서 보면 부모님께 받은 생명의 빚, 양육의 빚, 사랑의 빚을 갚자고 말하구요. 효는 짐승과 다른 인간의 도리로서 천륜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도 틀린말은 없습니다. 아니면 정서적으로 접근하여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누우실 때 밤낮으로 애타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이러한 노래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며 효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의 효도는 예수믿는 것과는 상관없이 할수 잇는 일이구요. 예수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더 잘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휴머니즘과 도덕론적 관점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수천년전부터 지금 21세기까지 변치않고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효도관에 대해 살펴보길 원합니다.

오늘 에베소서 6:1-3절 말씀에 보면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단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바울의 견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출애굽기 20장 십계명중에서 제5계명을 통하여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가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명령하십니다.

1. 부모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 처음 제정하여 명하셨고 그걸 하나님이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첫 번째 관점입니다. 세상의 도덕론은 부모공경을 처음에 누가 말했는지 시작했는지 누가 원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인간이 가져야 할 보편적인 인륜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 명령을 처음 하신 분이 하나님이셨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매우 중요한 말씀이나 명령을 하실 때 쓰시는 일관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부연설명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해야 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어느정도까지 해야하는지도 침묵하시구요. 순종할수 있는 것만 가려서 하라고 말씀하지도 않았어요.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 순종하란 말씀도 없어요. 그러면 틀린것도 순종해야 하는 가 이러한 논쟁을 피하기 위하여 주안에서라는 단어를 붙여주십니다. 그리고 더 강력하게 한마디 덧붙이는 것이 있다면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단정입니다.

여기에서 순종이라는 단어는 기계적인 순종, 무조건적인 복종, 노예적인 순종을 뜻하지 않습니다. 헬라어 "휘파쿠오"로서 귀를 기울이다. 따르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존중하는 마음으로 듣고 따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누가 가장 부모의 말씀에 잘 귀를 귀울이고 따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자녀가 제일 잘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부모순종은 공경과 존경이라는 말로 표현하지만 그러한 공경과 존경이라는 말속에는 사랑이 전제되어 들어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존경은 위선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순종은 노예적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노예적 순종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기를 원하시구요.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모를 사랑하여 순종하며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부모를 섬기면 하나님께 많은 득이 돌아가나보다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계명을 말씀하실 때 하나님득보자고 하나님만 좋으시라고 하신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지으신 분이시라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해야만 어떻게 살아야만 행복해 질수 있으며 역동적인 삶, 기쁜삶을 살수 있는지에 대해 정확히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 길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사랑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까? 나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식으로 이렇게 살기를 원하고 계신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복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행복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말씀을 볼 때 자신이 좋아하는 말씀이 따로 있습니다. 오늘 말씀속에도 이 말씀이 누구에게 주시는지 분명하게 서두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이것은 자녀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누가 더 좋아합니까? 부모들이 더 좋아합니다. 거봐라 순종하라 하지 않더냐? 이래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더 좋아하는 말씀은 그 아래에 있습니다. 거 보세요.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대상들이 싫던 좋던 정확하게 구분하여 이 말씀을 받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님도 부모섬기는 것을 잘 하셨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 명령을 처음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님은 어떠하셨을까요? 순종을 잘하셨구요. 육신의 부모에게도 순종하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낫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은 젊은 20대시절에 장남으로서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을 부양하는 가장의 역할을 해야했습니다. 그래서 33년의 전 생애 중 30세가 되기까지의 오랜 세월 동안 그 힘든 목수일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의 10분의 9는 제 5계명에 순종하는 생이셨습니다. 대부분의 생애를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사셨구요. 마지막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어머니걱정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9:26절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네 어머니라" 제자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하며 돌아가십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그분의 아들도 하셨습니다.

두 번째 성경적인 효도관은 3. 부모에게 순종할 때 자녀에게 부모의 신앙이 흘러들어간다는 관점입니다. 하나님은 부모가 신앙이 자녀에게 전달되는 하나님이 귀하게 만드신 통로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자손들에게 전수하는 권한과 권리를 부모에게 주셨습니다. 아비가 축복하면 정말로 하나님의 복이 자손들에게 임했습니다. 부모는 육체적인 생명을 주는 것 뿐만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이 전달되는 통로였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하실 때 순종이라는 말의 뿌리를 올라가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네 자녀들을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그 교양과 훈계의 내용이 무엇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부모님이 말씀으로 훈계하고 그 말씀하시는 훈계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통로였습니다. 부모를 존경하고 순종하라는 말은 너의 신앙을 존중하고 순종하라는 말씀과 동일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좀 너무하다 싶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출 21: 15,17절-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 지니라.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정말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와 유사한 말씀이 나와있는 레위기 24:16을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는 말씀이 나오죠?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훼방하고 거역하는 죄나 하나님 자신을 훼방한 죄를 똑 같이 다루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

세상의 타종교사람들이 말하기를 기독교는 부모도 몰라보는 종교라 하는데 할 말이 있습니다. 부모를 저주한다하여 돌로 쳐죽이라 명했던 종교를 여러분은 보신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단호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그 당시에 신앙이 전수 될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부모와 자식지간 이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저주하면 신앙이 어찌 전수 될 수 있겠습니까? 그 통로가 막힙니다. 신앙의 통로가 막힌 자식은 이미 영이 죽은 자식과 진배없으며 고깃덩어리에 불과하기에 돌로 쳐죽이라 한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통로가 막히지 않기를 소망하고 계십니다. 그 통로를 귀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구약에서 신앙전수는 제자장을 통하여 전수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통하여 전수되었어요. 절대적인 영적 권한이 아버지에게 있었습니다. 저는 말씀을 볼때마다 제일 욕심내는 것은 야곱과 에서가 아버지가 내리는 장자의 축복권을 가지고 싸운다는 것 그 자체입니다. 저들은 정말로 부모에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위임권이 있다는것을 믿었습니다. 가정의 위기가 무엇입니까? 부모가 손을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는것도 상실했구요. 손을 얹고 축복하였다하더라도 이제는 자녀들이 그 축복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아 불태워 번제로 드리려할 때 이삭을 보십시오. 순순히 잡힙니다. 군말이 없어요. 이삭이 "나는 하나님을믿어 하나님게서 뜻이 있을거야 그 뜻을 기다리고 말거야"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면서 단위에 누워있었던게 아닙니다.

이삭은 아버지를 믿었어요. 아버지를 신뢰했어요. 아버지에게 뜻이 있을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에게 자신의 생명을 맡겼어요. 이렇게 아버지에게 순종한 것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께 순종한 꼴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생명을 맡긴 것이 결국 하나님께 생명을 맡긴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꿈꾸신 부모와 자녀관계가 바로 이런것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아들은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그래서 결국 아들이 아버지에게 순종한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이러한 소망이 저와 여러분의 가정에 회복될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 성경적인 효도관은 하나님의 보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마침표가 아닙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소모전이 아닙니다. 비생산적인 것도 아닙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잘됨, 하나님의 장수의 복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우리가 누리는 축복이 부모가 주는 은덕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불교나 유교에 보면 살아생전에는 부모님을 박대하던 분들이 돌아가시기 직전이나 돌아가시면 살아계실때보다 더 잘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귀신이 되어서 자신을 돌보아 준다는 저들의 신앙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축복은 하나님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보고 잘되고 장수하게 하신다 합니다. 약속있는 첫계명을 주십니다.

어느 집을 가보면 말년에 생명보험, 노후 보장보험, 청약을 다 들어놓으시고 늙어서 자식들에게 손벌리지 않고 사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자칭 깨끗하게 사시는 어른신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것이 요즘 세상이 가르쳐주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다들 그렇게 살려하는 것을 봅니다. 깨끗하고 자존심을 상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러나 이렇게 살면 놓치는 것이 하나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자손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잘되고 장수하는 복을 누를 길은 없어지게 됩니다. 치사하시더도 자존심이 상하시더라도 자손들의 효도를 받아내셔야 합니다. 그게 자손들을 정말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자손들을 위해서 효도하라고 우기셔야 합니다. 그래야 자손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길이 열립니다.

장수한다는 말은 다음세대에까지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는 뜻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손들이 그 하는 것을 잘 본받아 똑같이 해드린다는 말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부간의 갈등에 대한 드라마를 많이 봅니다. 어느것 하나 긍정적으로 문제를 풀어가려는 의도가 배여있는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고부간의 갈등, 세대간의 갈등은 당연한 것이다라는 메시지만 온갖 매스미디어에서 말합니다. 저는 교회교육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단언합니다. 이 세대는 다음세대에게 효도받기는 틀린 세대라고 말입니다. 아이들이 본게 있어야지 따라하지요...아이들은 본대로 합니다. 정확합니다.

저희 시골에 가면 저희 부모님이 사시는 옆집에 늙은 노모를 무시하고 추운겨울에도 연탄아낀다고 불도 잘 넣어드리지도 않고 하루 한끼만 주며 박대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그 부부에게는 22살 먹은 자녀가 있습니다. 그 아들이 보니까 아무리 보아도 할머니가 잘못한게 없는데 할머니를 모질게 박대하는 어머니 아버지가 이해가 안되는 거예요. 그 청년이 할머니를 모시고 주일이면 저희 시골교회에 나오는데 제가 보는 자리에서 할머니를 끌어 안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할머니 오래 살아야되 할머니 오래 살아야되. 내가 더 커서 할머니 원수 다 갚아줄게 내가 돈벌어서 할머니 한테 잘할게 ." 누가 누구에게 원수를 갚아주겠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이 청년이 말하는 원수갚아준다는 말뜻을 그 청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안다면 그렇게 할수 있겠습니까?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부모섬기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셨고 예수님도 잘하셨고 신앙의 통로라고 상급도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안다고 해서 부모효도가 쉽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 정신이 없을 정도로 급변하게 돌아가는 현대정보사회속에서 나이든 부모님을 공양하며 산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얼마나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30대때는 독립하여 바쁘게 직장에서 승진을 위하여 일합니다. 40대 50대가 되어서 직장에서 인정받고 안정적인 나이가 되죠.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나의 부모님은 백발이 되어 돌아가실날이 얼마남지 않거나 병투병하거나 침해가 오든지 이러한 생각해보지도 않은 현실을 갑자기 부딛치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정서적 충격이 대단합니다. 이것이 인생이라고 체념할수 도 있지만 이를 곁에서 지켜보는 현실은 다릅니다. 실존의 고통이 있어요. 탄식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러한 저와 여러분에게 그 부모님을 순종하고 공경하고 사랑할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경적인 효도관 네 번째, 그래서 성령님은 4. 성령께서 부모섬기는 것을 도우십니다. 믿음의 자녀들, 신앙좋은 가정들을 가보아도 가족간에 여러갈등, 특히 부모와의 갈등이 많은 예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 의지대로 부모를 섬기려할 때 많은 장애물과 문화적인 방해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산업사회속에서 가정이 가지고 있었던 경제적인 기능, 오락적인 기능, 교육적인 기능을 다 빼앗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경제적인 기능은 공장과 직장에 빼앗겼구요. 오락적인 기능은 컴퓨터, 매스미디어 에 빼앗겼구요. 교육적인기능은 학원과 학교에 빼앗겨버렸습니다. 이제 부모의 권위를 지켜낼수 있는 장치들이 다 사라져버렸다는 말입니다. 가정이 해체되는 지경에 처해있습니다) 갈등이 있습니다.
어떤 갈등을 보면 나이드신 부모를 자녀들이 고치려 들기에 싸우게 됩니다. 젊은이들과 어른신들이 싸우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어른신들이 이깁니다. 이분들은 사실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죽기살기로 싸우십니다. 젊은이들은 살기위해 싸우지만 어른신들은 죽기 위해 싸웁니다. 그런데 어떻게 젊은이가 이깁니까? 집니다. 지는 것도 순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와의 관계가 깨어져 힘들어하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 상처를 평생 끌어 안고 사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다 이러한 연약함이 있는게 사실입니다. 성령께서 이럴때마다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8: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은 회복의 영이십니다. 치유의 영이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끌어안고 탄식해주시는 영이십니다. 관계회복의 영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강함으로 바꾸어주시는 영이십니다. 사랑안되는 관계도 사랑케하십니다.

저도 청소년 시절에 제일 싫어했던 사람이 아버지였습니다. 목회를 하셨구요. 집에서 하는 행동과 교회에서 설교하시는 말씀에 대한 괴리가 너무나 너무나 심하신 분이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이해가 되질 않았어요. 그래서 증오하기도 하였습니다. 형편없는 분이라고도 생각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성령님을 알고 그분과 매일 매일 말씀을 통하여 교제할 때 제 마음에 성령님이 주신 마음과 깨달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 아버지 안에 있는 아버지의 상처가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그렇게 미워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의지하였던 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에의해 상처받으신 한 영혼으로 보이기 시작했어요. 아버지의 아버지에 의해 받은 상처, 어머니의 어머니에게 받은 상처가 보였어요. 그후로 모든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제아버지를 생각하면 눈물과 사랑이 나옵니다. 이러한 상처를 제가 보려고 본게 아니었습니다. 철어들어서 본게 아니예요. 성령께서 보게 해주셨습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저에게도 하나님의 탄식의 능력이 나타났구요. 관계 회복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성령님과 친밀하십시오. 그분과 매일매일 교제하십시오. 부모와의 갈등과 상처로 인하여 힘들어하는 분들은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탄식하시는 그분의 능력과 격려로 말미암아 회복의 능력이 공급되어질줄로 믿습니다.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령은 저와 여러분의 가정가운데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되게 하시는 역사를 일으켜 주실것입니다.

몇주전에 집으로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한 도시아이가 산골짝 외할머니집에 엄마에의해 맡겨집니다. 할머니는 전형적인 시골분이시구요. 말을 못하는 벙이리이십니다. 그런 할머니에게 아이는 병신, 벙어리, 바보라고 놀리며 요강단지걷어차고 무시합니다. 그런 아이가 할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에 변화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이에게 짜장면을 사주시려 말린 나물을 가지고 시장에 나가 말도 못하고 하루종일 팔아 아이에게 짜장면 한그릇을 사주고 당신은 먹지 않습니다. 그리고 초코파이를 사고나니 차비가 떨어집니다. 아이만 버스로 태워보내고 당신을 걸어서 마을로 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아이는 할머니의 사랑을 점점 알아갑니다. 그 아이가 이제는 서울로 돌아갈 때가 되었을때 할머니에게 두단어를 가르칩니다. 나 아퍼요. 나 보고 싶어요. 할머니 내가 떠나거들랑 아프거나 나 보고 싶으면 이거 써서 나한테 엽서보내면 얼른 올게. 떠나면서 하염없이 울며 영화가 끝납니다. 우리네 할머니들은 다 비슷한 것 같아요. 어디서 많이 본 할머니같았어요.

어릴적 저는 이해가 안되는 것이 왜 할머니들은 꼭 밥을 떠먹여주어도 당신 입에 집어넣었다가 주시는지 모르겠어요. 더러워서 못먹겠다고 투정했던 기억이 나구요. 참외를 깍아주시는 손을 보면 손톱밑에 쌔까만 때가 껴있는 손으로 그냥 잡고 깍아주시잖아요. 맛있는 사탕주시겠다고 꺼내시는 것을 보면 꼭 허리춤에서 꼬기작 꼬기작 꺼내십니다. 그런 할머니가 이제 생각이 납니다. 보고 싶습니다.

영화보고 나오면서 세가지 들었던 생각이있습니다. 첫 번째 생각은 이 영화 참 돈안들었겠다. (미친소에 돈이 제일 많이 들었을것같아요) 두 번째, 저도 이런 눈물과 감동이 있는 설교한편하고 싶다. 세 번째, 아 외할머니가 보고싶다. 이미 15년전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났습니다.한편의 좋은 영화를 보았는데도 할머니, 외할머니가 생각나구요. 죄송하구요. 눈물나도록 보고 싶었습니다. 성령께서도 이와같은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지금까지 내 가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서슴없이 상처주었고 무시했고 무관심했던 나의 부모들이 생각나게 하십니다. 보고 싶게하시고 찾아가게 하시고 치유케하시는 영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도우실것입니다. 죽을때까지 부모를 순종하며 살수 있도록 격려하실것입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하나님은 명령만 하지 않으시고 성령님을 보혜사로 보내주셔서 저와 여러분이 말씀대로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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