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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러나, 이후로는 (마 26:6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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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후로는 (마 26:62-68) 97, 375장


나는 몇 일 동안 '그러나'라는 단어를 수없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는 '그러하나'가 줄어든 말이다.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이 서로 상반될 때 '그러나'라는 접속 부사를 사용한다.

"그러나"라는 말은 말의 강세에 따라서 의미 차이가 있다. 부드럽게 하면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된다. 강하고 세게 "그러나"라고 하면 상대방의 의견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내가 말할 때는 잘 듣는 것 같다가 "그러나"라고 반론을 펴는 사람은 나와 뜻을 같이 할 수 없는 반대자이다. 하지만 내 앞에서 "그러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다 나의 반대자는 아니다.

그들 가운데는 진정한 친구가 있고, 애정 어린 충고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끼리 서로 대화하는 데 '그러나'라는 표현을 자주하게 되면 상대방에게 거부감을 주고 대화의 분위기가 딱딱해 질 수 있고, 더 나아가면 다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윗 사람이 아래 사람에게, 선생님이 학생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그러나'라고 하면 올바로 가르치기 위한 도구가 될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런데 죄인이 판사 앞에서, 노예가 주인에게, 신하가 왕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도전이 된다.

예수님은 붙잡혀서 대 제사장인 가야바 앞에 끌려 가셨다. 대 제사장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맹세하도록 시켰다. 이전 까지는 주님께서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주저함 없이 대 제사장의 질문에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냐?"라는 질문에 "네가 말하였느니라"고 답변하셨다. 그리고 계속해서 대 제사장인 가야바에게 '그러나'라고 하시면서 말씀을 시작하셨다.

이것이 대 제사장에게 도전이 되는가? 가르침이 되는가? 우리는 신앙적으로 볼 때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아무리 대제사장일지라도 피조물인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세상적으로 볼 때는 갈릴리의 촌뜨기,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 감히 대 제사장에게 도전한 것이 되었다. 대 제사장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그러나"라고 하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하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대 제사장인 당신의 경멸과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보게 될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당신이 보게 될 것은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로 인해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갈보리에서 십자가에 매달 것을 구체화 한다. 이것은 이미 그들의 마음 속에 품어 왔던 것이었다. 그들은 법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주님이 신성을 모독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자 율법에 능통한 제사장들이 '사형에 해당하는 신성모독이라고 소리쳤다'. 예수님은 이렇게 인간들 앞에서 수모를 당하시고 결국은 그들이 소리치던 대로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내 자신이 '그러나'라는 말을 수없이 생각하는 동안 새로운 것을 경험했다. 나의 생각과 경험과 지식으로부터 벗어 나는 경험을 했다. 사람들은 생각이 복잡하고 마음이 지쳐 있을 때 자신을 그냥 방치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그러나'라고 선언을 하게 되면 그러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생각이 복잡하고 마음이 지쳐 있더라도 '그러나' 찬송해야 한다고 결심을 하게 되면 은혜를 받는 삶이 된다.

마음에 고통과 근심이 가득할 때도 '그러나' 주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 내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흐르게 된다. 이와 같이 내 자신이 나에게 '그러나'라고 선언함으로써 나의 생각과 겸험과 습관과 말과 행동을 정지시키고 새로운 삶을 열어 놓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그러나' 하나님 나라로 방향 전환이 항상 필요하다. 예수님의 '그러나' 선언은 세상을 향한 것이었고, 우리를 향한 것이었다. 대 제사장은 세상을 대표한다.

그들은 땅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제사장들은 빌라도를 등에 업고 있었고, 빌라도는 로마 군대를 등에 업고 있었다. 이렇게 거대한 권력 앞에 누가 대항 할 수 있겠는가?

술수와 권력이 만나면 무서운 결속력이 나타난다. 이들 앞에 주님은 과감하게 '그러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내가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예수님은 강하셨다. 강하셨기 때문에 침착하고 담대하셨다. 강하셨기 때문에 평안하셨고 확신하셨다. 강하셨기 때문에 인내하셨다. 주님의 말씀은 진리였기 때문에 대 제사장 가야바가 분노의 불길에 휩싸여 있었더라도 그에게 당당하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소유자하신 성도님들에게 이를 갈고 분노하는 사람을 만난다 하더라도 무슨 상관이 있는가? 우리가 가진 믿음을 악평하고 주님을 대적하는 일에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을 만난다 하더라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권능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 대 제사장 가야바가 주님을 심문하시는 장면은 세상의 어두움과 진리가 대결하는 것이다. 세상의 어두움은 권력을 등에 업었지만, 인간을 구원하는 진리는 초라하기 이를 데가 없다.

세상의 눈으로는 구원의 진리를 볼 수 없다. 예수님의 진리는 빌라도처럼 군대를 의지하는 것도 아니고 대 제사장이 입은 옷처럼 화려하지도 않다. 당시 율법 종교처럼 제도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말해보라?"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비록 비천한 모습을 하고 계셨지만 세상이 말하는 진리를 인정하시지 않으셨다. 이것이 '그러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이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세상이 주장하는 어둠의 진리에 대해 반박하시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진리를 입증하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한다. 세상의 진리는 과학적이어야 한다.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세상의 진리는 사람들이 그것을 진리라고 인정해야만 성립된다. 본문에는 세상이 주장하는 진리를 입증하기 위해 악한 노력을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어두움이 스스로 어두움을 입증하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다는 것은 아니다. 주님 앞에서 세상의 악한 방법은 60절에 "거짓 증인"을 많이 동원했다는 것이다. 어두움의 성질이 무엇인가? 빛을 가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짓 증인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거짓된 목적을 두고 비난과 공격을 가한다. 거짓 증인들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는 증언을 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이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신 적이 없었다. 요2:19절에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결코 자신에게 성전을 헐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주장하신 적이 없다.

주님은 파괴자가 아니다. 주님의 말씀은 성전을 파괴할 수 있는 저들의 힘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러면 주님은 거짓 증인들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63절에 주님은 침묵하셨다.

그들의 거짓 증언의 목적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것을 정정해 주는 일이 무익한 일임을 잘 알고 계셨다. 그들은 주님을 죽이겠다는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모인 사람들이다. 이런 곳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서 "그러나"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의 진리가 어떻게 증명되든 주님 자신이 메시야임을 말씀하셨다.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이 말씀은 메시야를 예언하는 다니엘 7:13절을 주님께서 인용하신 것인데 메시야가 인자의 모습으로 오신 다는 것이다.

주님의 '그러나'는 세상의 관념에 대해서도 "그러나"이다. 세상의 관념은 하나님의 성전을 사흘만에 지을 수 없다는 결론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주님이 일으키신 성전은 건축이 아니라 죽은자를 죽음 가운데서 살리신 것과 같이 승리를 말하는 것이고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관념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합리주의에 의해 이미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이었다. 바로 눈 앞에 있는 것 그 너머에 있는 비전은 전혀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물질적인 것 그 이상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념도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흘만에 성전을 건축하신 것은 아니지만 요한복음의 말씀대로 분명하게 사흘만에 성전을 일으키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관념은 물질적인 외형에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관념은 눈으로는 볼 수 없더라도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확신하며 소망하는 것이다.

나가서 주님의 '그러나'는 세상의 질서에 대해서도 '그러나'라고 반박을 하신다. 세상의 질서의 대표자인 대 제사장을 통해서 주님에게 요구한다.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이것은 맹세를 시키는 법적인 형식이다. 대 제사장이 주님께 맹세를 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서도 진실을 말한 것 때문에 원치 않는 고초를 당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대 제사장이 맹세하도록 함으로써 주님께 강박감과 두려움을 심어 주려고 한다. 세상의 질서는 위로부터 아래로 누르고 있기 때문에 진실이 감춰지는 경우가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의 질서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셨는데 "너희에게 이르노니"에서 '이르다' 는 말은 '계산하다, 셈하다'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그래서 '이르다'는 말은 정확하고도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정확하게 말한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보면 주님의 이 말 속에는 세상의 질서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이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로서 세상의 이치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세상의 힘 때문에 무서워 하거나 염려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세상 질서에 대해서 "그러나"라고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세상이 추구하는 욕망에 대해서도 "그러나"라고 말씀하셨다.

58절에 베드로는 주님께서 붙잡히신 이후에 그 결말을 보려고 대 제사장의 집 뜰까지 하인들과 함께 있었다. 여러분! 긴장하고 상기된 베드로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연민에 잠기는가?

여러분도 가끔 베드로의 자리에 가 있지는 않는가? 우리도 베드로처럼 내 자신이 당사자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마치 방관자처럼 행동한다. 베드로가 하인들과 함께 있었던 것처럼 나 자신도 성도의 길을 가끔 버리고 세상 속 깊이 숨어 있는 경우가 있다.

베드로는 주님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 장담을 하였지만 도망하였다. 그러나 수치를 느끼고 돌아왔지만 하인들 틈에 숨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하인들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자신이 떨어져 있다는 것을 소극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베드로는 결코 믿음으로 주님께 복종하는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자신이 도망했다는 것에 수치를 느꼈기 때문에 그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말하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던 것이다. 베드로는 열정적으로 주님을 따랐지만 구경꾼의 자리에 가 있는 것처럼 우리 자신들도 신앙은 내 세우지만 종교적인 방관자로서 처신 할 때가 있다. 그러면 비록 주일날 예배하는 자리에 있더라도 베드로가 가야바의 하인들 틈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베드로는 하인들과 함께 있었지만 주님은 그 자리에서 세상을 향해 진리를 선포하고 계셨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그 진리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수치와 염려와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을 뿐이다.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종교적인 방관자들의 자리에 앉아 있는 다면 하나님의 전에 임재하시는 영광과 선포되는 진리와는 무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가엾은 사람들은 자신의 콧잔등 밖에 내다보지 못한다. 하나님의 진리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쾌락과 부에 의존한다. 그것도 당장 얻어내지 못하면 안심을 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신속한 승리만이 중요하고 진리는 하찮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영원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58절에 베드로는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하였다. 베드로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어두움도 우리의 비참한 결말을 보고 싶어하는 강한 욕구가 있다.

우는 사자와 같이 입을 벌리고 우리를 삼키려 한다. 요7:7절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악하다고 증거하셨기 때문에 세상이 주님을 미워한다고 하였다. 갈1:4절에서도 악한 세상이라고 하였다.

세상은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실 것을 만장일치로 부인한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에 대하여 악한 욕망을 품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는 베드로에게도 주님은 말씀하신다.

비참하게 실패할 것만 같은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을 보리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권능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데에 악한 세상은 아무런 방해도 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은 아무리 낭떨어지 같은 상황으로 떨어져 가는 것 같은 일이 벌어질지라도 우리 주님은 권능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주님은 친히 우리 인간의 가장 깊숙한 어두움인 죽음에까지 내려 갔다 오신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의 손은 우리가 아무리 깊은 낭떨어지에 떨어져 있어도 우리를 건져내시기에 충분하시다. 죄에 자리에 있더라도 회개하는 자를 붙들어 주시고, 슬픔의 자리에 있더라도 위로해 주신다.

주님은 또한 세상의 권위에 대해서도 "그러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는 말들 가운데서 '권위적'이다라는 말이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들리는가? 자기보다 아랫사람들의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본문에 이러한 세상의 권위를 가장 잘못 사용하는 부분이 있다. 대 제사장이 주님을 향하여 "그는 사형에 해당하느니라"고 한 것이다. 세상의 권위는 힘에 의존한다. 주님은 이 세상의 권위에 대해서 '그러나' 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권위를 보여 주신다.

주님은 참된 권위를 가르치심에 있어서 말씀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신다. 그들은 주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기까지 하였다. 어쩔 수 없이 당한 것 같지만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참 모습이시다.

주님은 이들이 이렇게 하도록 힘이 없어서 내 버려 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실 때 옆에 있던 제자중의 하나가 칼을 빼어 대 제사자의 귀를 상하게 하였다.

주님은 그에게 칼을 거두라고 하시면서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고 꾸중하셨다. 대 제사장의 집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이 힘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그 힘을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 상에서 다 쏟아 놓으셔야만 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참된 권위는 죄인을 사형시키는데 사용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는데 사용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러나"가 성도님들의 삶과 여러 분의 생각과 습관과 말과 행동에 적용되시길 바란다. 주님의 "그러나"에 여러 분을 내 맡길수록 여러 분은 이 땅에서 천국을 여행하게 될 것이다.

세상이 내게 고통과 슬픔을 안겨다 줄 때도 주님의 "그러나"는 내게 기쁨과 평안을 안겨 줄 것이다. 주님은 "이후에"라고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확실한 보증을 해 주셨다.

주님이 세상의 주관자이기 때문이다. 은혜로서 우리를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멸시받고 거절당하는 사람들과도 당연히 동행한다. 그들에게는 주님이 약속하신 "이후에"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 분! 오늘 성경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그러나, 이후에"라는 말씀에 깨달음과 실천이 있으시길 바란다. 여러 분은 아무리 진리가 패배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진리의 편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란다.

혼자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진리를 고백하는 일을 주저하지 마시기 바란다. 잘못된 권위에 눌려 절망하지 말고 분노를 사는 일이 있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상대편이 많다고 해서 동요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진리는 인기가 없을 수 있지만 영원하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갖고 있는 진리는 조롱과 무시를 당할 수도 있지만 우리를 대신하여 당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으로 보답해 주실 것이다.

주님이 하신 '이후로' 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의 말씀이다. 만약 여러 분이 주님을 섬기며 세상에서 선한 일과 정의와 진리에 충실했다는 이유로 오해를 받거나 진의가 잘못 전달되거나 욕을 받고 있더라도 걱정하지 말라!

여러 분의 명분을 입증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권능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께 맡기라!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라! 주님이 나를 향해 "그러나 이후에, 이후에"라고 말씀하셨다.

여러 분이 주님의 진리를 믿고 옳은 일을 행하기로 결심했다면 가난이나 질병, 고통이나 역경이 길고 날카로운 가시를 우리의 마음과 육체를 깊이 찌르고 있더라도 "이후에"라는 장래의 소망이 빼내어 줄 것이다.

그렇게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약속된 영광이 여러 분 안에 그리고 여러 분 주위에 충만하게 나타날 것이다. 주 안에서 진리를 따르는 여러 분의 수고가 아직도 헛되다고 생각하는가?

자신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기위해 수고했지만 보답이 없는가? 서두르지도 초조하게도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는 말씀을 생각하라.

사람이 보기에는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많은 주의 종들에게 주님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25:21)"라고 격려해 주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 분! 주님을 끝까지 신뢰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마지막에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기쁜 음성을 모두가 들으실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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