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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 마 20:1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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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본 문 :  마태복음 20장 1절 ∼ 16절 


최근 베스트셀러 중에 하나인 'Overcoming the Rating Game' 이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작가는 임상 심리학자인 폴 호크라고 하는 분입니다. 이분의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이렇습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어려운 병이 바로 우울증과 열등감이라는 겁니다. 우울증이라는 병은 고칠 수 없는 병입니다. 적어도 약으로서 고칠 수 있는 병은 아닙니다. 수술로 고칠 수 있는 병도 아닙니다. 더 무서운 것은 자기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더 무서운 것입니다. 우울증의 결론은 자기가 죽던지, 남을 죽이던지 거기까지 갑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울증은 정신적으로 이미 자살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정신적 만성 자살 상태가 우울증입니다.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우울증과 열등감' 여기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이 현대인으로서는 없다는 겁니다. 정도의 문제가 있을 뿐이죠. 자, 그런데 문제는 이게 어디서부터 비롯되느냐 하면 끝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 평가하면서 이 비교의식에서 생긴다는 겁니다. 남과 나를 비교하고 있는 거예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스스로 자기를 불행하게 비하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현실 속에서 은혜를 생각해야 되고, 내가 처한 처지 이대로에요. 그 속에서 절대적 은혜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어느 사이에 다른 사람하고 비교하면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어요. 자기 존재를 잃어버린 거예요. 거기서 정신적인 이런 무서운 질병, 고칠 수 없는 상황에 온다는 것이죠.
어느 날 양이 말입니다. 비가 많이 오는 날, 나무 밑에 서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습니다. 아시는 데로 양은 털이 많지 않습니까? 비가 계속 와서 그 몸을 적시니까 그 몸이 무거워지고, 이거 추워서 견딜 수가 없는데 그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힘도 없고, 능력도 없고 또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그런 달리는 힘도 없고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 원망을 했더랍니다. 했더니,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네 말하는 걸 들으니 그럴 것 같다. 그러면 어떡하면 좋겠냐? 네게 옹이를 주어서 너도 남을 잡아먹으면서 살게 그렇게 해주랴? 아니면 입에다가 독을 넣어주어서 뱀처럼 한번 물면 상대방이 죽어 뻗어지는 그런 독을 넣어줄까? 아니면 뿔을 주어서- 날카로운 뿔을 주어서 들어 받고 그래서 싸워서 이기도록 그렇게 해줄까?" 했더랍니다. 했더니, 양이 가만히 생각해보다 하는 말이 "이대로 내버려 두십시오." "누구를 해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면 해치고 싶어져서 어려울 것이고요. 차라리 내가 손해를 보며 사는 게 낫지 남을 해치면서 사는 것은 괴롭습니다. 이대로 내버려 두세요." 그렇게 양이 하나님께 호소했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길 원하십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됐으면 좋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여 나를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주세요." 라고 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불만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은요, 자신에 대한 문제,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문제 이 비교하는 중에 아주 심각한 그리고 중요한 결론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문제를 볼 때는 주님과 나와의 문제를 볼 때는 공평합니다. 확실히 공정, 공평, 공의롭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되면 불공평합니다. 이게 맘에 안 들어요. 문제는 어느 잣대로 세상을 보느냐? 어떤 시각에서 나 자신을 평가하느냐에 있는 것이에요. 오늘 본문에는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것과 나 자신에 대한 것. 나 자신과 하나님께 대한 것 그것이 확실해 지고 극대화 되게 될 때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점점 작아집니다. 그런 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나와의 관계를 비교, 비교하기 시작하면은 어느 사이에 나와 주인과의 관계 그것마저 잃어버리고 원망하게 됩니다. 어느 사이에 원망 불평으로 그렇게 바꾸어지더라 하는 얘깁니다.
기회는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 평등하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인의 큰 뜻입니다. 큰 긍휼이기도 합니다. 이미 기회를 잃어버린 자에게 까지도 기회는 공정하게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이미 공평하게 주어지고 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옛날에는 포도원이라는 것은요, 지금도 그렇습니다마는 포도는 잘 열려가지고 마지막에 익을 때가 되면 포도원 전체에 그 포도 향기가 아주 진동합니다. 그때는 일조를 받아야 되는데 그 햇빛을 며칠 더 받느냐가 아닙니다. 몇 시간 더 받느냐에 따라서 당도가 좌우됩니다. 우스운 얘기입니다마는 제가 한번 비행기를 타고 미국을 가는데 비행기 안에서 일하는 전무님이 계세요. 그분이 저희 교회 교인은 아닙니다마는 저희 교회에서 내놓는 설교테이프를 많이 듣는데요. 자기는 비행기 타고 다니기 때문에 주일을 잘 지키지 못하는데 "내가 목사님의 설교테이프를 열심히 들어서 제는 절반은 소망교회 교인입니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 제게 포도주를 한 병 주더라고요. 그래 포도주를 주면서 "목사님 이거 얼마나 귀한건지 모를 것 같아서 제가 설명을 할랍니다. 이거 몇 년이라고 딱 써있어요. 이게 몇 년이라는 게 참 중요합니다, 이게. 요해가 일조가 제일 좋았거든요." 그 포도 똑같은 포도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해에 만들었느냐가 왜 중요하느냐? 그 해에 날씨가 좋았어요. 일조를 많이 받아서, 햇빛을 많이 받아서 당도가 높은 거예요. 그러면서 한참 설명을 하고 제게 준 것을 기억을 합니다. 이래서 말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될 수만 있으면 햇빛을 많이 받아가지고 아주 당도가 높도록 기다려야 되는데 이게 문제가 있어요. 바로 뒤에 우기가 따라오고 있어요. 이스라엘 나라는 겨울이 우기거든요. 그래서 우기가 따라오니까 만일에 조금 더 기다리다가 그대로 비바람이 몰아치면 농사가 다 망치는 거예요. 일찍 포도를 따자니 당도가 낮아서 안 되겠고 좀 기다렸다가 따자니 비가 오면 다 망치겠고 . 아주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이제 포도를 딴다 할 때가서는 그야말로 온 동네가 다 드러나서 포도를 따게 되는 거예요. 이것만으로는 손으로 해야 되니까, 모두가 온 동네가.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니까 주인이 다급하게 거리에 나서서 일꾼을 구하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너도 가서 일해라. 너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이렇게 재촉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새벽에 나갔다.' 하는 말이 몇 시 인지 모르겠고 그 다음에 제 삼시, 제 육시, 제 구시, 제 열한시. 이렇게 되어 있는데 '제 삼시'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시간으로 말하면 아홉십니다. 시간을 우리 시간으로 잠깐 바꾸어서 생각을 하면 새벽, 그리고 아홉시, 열두시, 세시, 다섯시 마지막 포도원에 들어간 사람은 1시간 밖에는 일하지 못했습니다. 한 시간밖에 없는 그 사람에게도 주인은 말합니다. "내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 한 시간 남았으니, 그까짓 거 . 그거 아니란 말이에요. "한 시간도 소중해, 남은 시간 한 시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이렇게 재촉을 했습니다. 이미 일거리를 놓치고 시간을 다 보냈는데, 한 나절을 다 보낸 이 사람들에게 주인은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상당한 것을 주리라." 말합니다. 이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이미 젊은 사람도- 새벽에 일하는 사람이죠. 다섯시라고 하게 되면 이제 조금밖에는 남지 않았어요. "너도 일하라."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현재라고 하는 입장에서 공평한 것이요. 나이 많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이나 지식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현재라고 하는 입장에서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한 데나리온을 주마." 하고 약속을 했습니다. 자 이제 문제가 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한 다음에 이 사람들의 풍속은 저녁에 품꾼들을 다 불러가지고 품값을 당석에서 주게 돼있어요. 그런데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주었다 이겁니다. 문제가 여기 있어요. 맨 나중에 온 사람 1시간 밖에 일안했는데 한 데나리온을 주었어요. 그 다음사람도 한 데나리온, 그 다음 사람도 한 데나리온 .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저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니까, 적어도 우리에게는 서너 개 주겠지.' 하고 기대했는데 그도 한 데나리온이에요. 여기서 원망을 하는 거요. 원망할 만하잖아요? "우리는 하루 종일 일했는데 왜 한 데나리온 . 왜 저 사람들은 잠깐 밖에는 일하지 않았는데 왜 역시 한 대나리온 입니까?" 이게 불공평한거라 이거죠. 원망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주인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원망할 것 없어요. 애당초 약속이 한 데나리온이니까 그렇잖아요? 그것도 9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으로 생각해보면 난 반나절밖에는 일하지 않았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고마워요? 주인과의 관계에서 보면은 이 놀지 않고 하루일하고 품고 품삯을 받았다는 것만을 가지고 만족하고 감지덕지 하거든요. 그러나 다른 사람, 나와 똑같이 대우받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요. 그게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비교하다 보니까 원망하게 되었죠. 심리학 이론 중에 '교류분석'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상을- 인간의 모습을 네 가지로 분류해서 생각합니다. 첫째는 자신에 대해서는 긍정적이고, 남에게 대해서는 부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감이 있는가 하면 남을 멸시하는 교만이 있어요. 자신에 대한 문제는 다 긍정적이고 남은 항상 부정적으로 봐요. 이 평가기준 때문에 이 사람은 불행합니다. 또 하나는 자신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은 항상 남을 부러워하며 살아요. 남의 처지만 좋아보여요. 남이 먹는 떡만 커보여요. 남의 자식은 잘된 것 같고 내 자식은 잘못된 것 같아요. 심지어는 남편도 남의 남편이 훨씬 좋고 내 남편은 '어쩌다 저런 게 걸렸나?' 이렇게 생각한데요. 항상 불평이라는 거예요. 항상 내 것은 나쁘고 남의 것만 좋아. 그것도 베네 병신이죠, 저거요. 이거 문제라고요. 그러나 많이 있어요, 이런 게요.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뭐냐면 자기에게 대해서도 부정적이고 남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에요. 이 사람이 염세주의자에요. 항상 이 사람은 불평 원망이죠. 세상 다 망했어요. 비관적이죠. 그런가하면 자기에 대해서도 긍정적이고, 남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사람이 있어요. 나 자신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봐요. 그리고 남을 부러워 할 것도 없고 더 불어 행복할줄 아는 사람이에요. 이런 네 가지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대단히 귀중한 말씀이 있어요. 두고두고 생각하십시오. 주인은 말씀합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무슨 말입니까? "네가 받은 것이 은혜라고 왜 생각을 못하느냐? 내가 너를 부르지 않았다면 너는 하루 종일 장터에서 놀고 공쳤을 거 아니냐? 내가 너를 불렀기에 하루 일했고 또 품값도 받는 것 아니냐? 네 것. 그것이 많던 적던 내가 본래 너와 약속한 가 아니냐? 너와 나와의 약속이 한 데나리온이다. 이것은 정당하게 받은 것이다. 합당하게 받은 것이요 또 은혜롭게 받은 것이다." 그 말이죠. 얼마나 중요한 얘깁니까? 또 중요한 말씀이 있어요. "내가 늦게 온 사람들에게도 은총을 베푸는 것이 내 뜻이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못하겠느냐? 내가 선함으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여러분 얼마나 강한 말씀입니까? 내가 선함으로 왜 네가 악하게 보느냐? 결정적인 말씀이에요. 깊이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은요.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과 참 중요한 시간에 만나서 대화를 하는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양을 먹이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물으시고, "네가 나를 위해서 장차 큰 핍박을 받고 어려운 고난을 당해야 되겠다." 이렇게 예언의 말씀을 하십니다. 베드로가 그때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베드로는 멀리 도망갔었어요.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으나, 요한은 재판정에서도 끝까지 따라갔고 십자가 밑에 서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장면을 다 지켜보았어요. 그게 요한이었어요. 그래서 베드로가 생각하기를 '나는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으니까 '장차 죽을 고생을 할 것이다.' 하는 것 같고, 요한은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으니 어떻게 될까?' 해서 그때 딱 한마디 물어봅니다.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머무르게 할지라도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와 무슨 상관이냐? 요한은 요한의 길을 가는 것이다. 너는 네 길을 가는 거야. 너와 무슨 상관이냐?" 아주 중요한 말씀이에요. 우리는 종종 이 때문에 문제가 되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절대적 은혜, 다시 한번 확인해 보세요. 우리는 다른 사람이 더 받든 덜 받든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우리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재밌는 말이 있어요. 불란서 사람들은요, 유머를 우스갯소리를 하면은 벌써 생각이 많아서 말하기 전에 벌써 웃는데요. 영국 사람들은 말을 다 듣고 나서 웃는데요. 독일 사람들은 다음날 웃는데요. 한국 사람들은 다른 사람 웃는 것 보고 웃는데요. 뜻을 알고 웃는 게 아니에요. 남이 웃으면 따라 웃는 거야 . 그것 참 한국사람 형편없네요. 웃는 일 하나만도, 내가 웃고 내가 기뻐해야죠. 다른 사람에게 따라다녀요. 제가 잘 아는 연세대학교 교수님 두 사람이 언젠가 그런 얘길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직 우리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집을 팔고 멀리멀리 이사했다고 그래요. 두 친구 교수가 어려운 월급을 모아가지고 연세대학교 가까이 집을 두 채를 지었어요. 그런데 이집에서 타일을 깔면 이집에서 타일을 깔고 이집에 카펫을 깔면 이집에 카펫 깔고 이집에 침대가 좀 커지면 저쪽 침대가 커지고 . 두 집에서 경쟁을 하는데 완전히 부도났데요. 이러다가는 살림 망치겠다고, 두 마누라가 서로 경쟁을 하는데 "아이고, 아이고 안 되겠다고 ." 다 팔아가지고 아주 멀직하니 가버렸다고 그래요. 여러분 다른 사람의 집에 어떻게 했던 그거 너무 따라가지 마세요. 우리는 이래서 문제에요. 개성 있게 삽시다. 남이 가졌다고 내가 가져야 될게 뭐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남이 못가진거 내가 가진 것도 있잖아요. 행복은 질적인 것이에요. 은혜는 절대적인 것이에요.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직 은혜로 내가 있습니다. 잃어버린 기회도 꾸짖지 아니하시고 새로운 기회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오늘도 주는 말씀하십니다.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이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어찌 생각하면 일을 했으니 돈을 주는 게 아니고요, 돈을 주기 위해서 일을 시킨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한 시간밖에 일을 안한 사람에게도 "이 사람아 처자식이 있는데 놀고 있어서 되겠나? 한 푼 벌어야 살게 아니겠는가?" 이 주인의 마음이 얼마나 귀합니까? 여러분 잃어버린 기회, 만회할 길이 없어요. 우리 인간으로서는 다시 만회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고 또 은혜를 베푸십니다. 새로운 은혜를 베푸십니다. 현재라고 하는 시점에서 기회는 공평합니다.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 내가 오늘 얼마나 절대적 은혜에 감사하면서 사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내가 사는 현재, 현재 이 현시점 이 현실 이대로가 내게 주신 은혜요. 내가 주신 가장 큰 은혜요.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 역사 합니다. 이 기회를 통해서 역사 합니다. 사도바울은 늘 간직하고 있는 신앙이 있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 내게 향하신 경륜, 내게 주신 사명 . 아주 지극히 절대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입니다마는 그 속에 사도바울의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가 뭡니까? 그것을 소중히 여기세요. 이미 주신 모든 것이 내게 주신 최상의 은사임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주는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받은바 은혜가 너무 크고 소중하건만 때때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보며, 환경을 보며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에서 은혜를 저버리고 어느새 원망하게 되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하시는 말씀 다시 한번 듣게 하시고, 내게 주신 것, 그것이 가장 소중한 것임을 깊이깊이 깨닫는 이 아침 되게 해주시고 내게 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아무 원망도 불평도 없이 주님의 뜻을 조용히 이루어 가며 감사 감격한 그런 생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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