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참 해방의 본성 / 롬 8:1 ∼ 9

  • 잡초 잡초
  • 407
  • 0

첨부 1


제 목 :  참 해방의 본성
본 문 :  로마서 8장 1절 ∼ 9절 


캐나다에 빅토리아 대학의 교수로 있는 K. R. Bradley 교수님께서 Slaves and Masters in Roman Empire 라고 하는 유명한 책을 저술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노예와 주인' 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그는 다년간 로마의 문화를 깊이깊이 연구하는 가운데 '로마의 문화라는 것은 곧 노예와 주인의 문화다. 그 관계에 있다' 라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당시 로마의 인구의 삼분의 일이 노예였습니다. 우리가 로마를 방문하면 2000년 전에 있었던 굉장한 문화 유산을 볼 수 있습니다. 원형극장을 비롯해서 그 많은, 엄청난 그 장엄한 유적들을 보면서 우리는 감탄합니다만은 한번 더 생각해보면 이건 전부 노예가 만든 것입니다. 노예가 설계하고 노예가 지었고요 이런 것들을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많은 노예가 죽어갔습니다. 우리는 그 노예들의 핏자국을 보는 겁니다. '인류가 무엇을 건설했다'고 볼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나'하는 그 처참한 모습을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올시다. 그 노예와 주인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fides 와 obsequium, 두 마디로 요약이 됩니다. '충성과 복종' 오직 '충성과 복종' 그것이 노예와 주인의 관계였습니다. 저들은 말할 수 없는 비인간적 대우를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철학자들의 글 속에도 나옵니다. '노예와 당나귀는 같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당나귀는 내 말을 못 알아 듣고 노예는 말을 알아듣는다' 이렇게까지 말했어요. 우리는 보기가 민망해서 혹은 그림이라던가 영화로 나올 때 보면 간단하게 옷을 그 치부를 가리운 옷을 입혀서 나옵니다만은 원래 노예는 옷이 없었어요. 신발도 없고 옷도 없이 그렇게 해서 일을 시키고 그리고 집이라고는 그저 움막 같은데 외양간처럼 만들어 놓고 지푸라기를 넣어 줬어요. 거기서 그대로 자야 했고요. 노예가 서로 말을 하면 거기서 또 문제가 생기니까요 일체 말을 못하게 했어요. 듣기만 하고 말을 못하게. 그래서 말을 아예 못 배워 버려서 그냥 "웅웅웅" 이렇게 했던거죠, 동물처럼. 말도 언어까지도 빼앗아 버렸어요. 오로지 '충성과 복종' 이것만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그같은 로마의 운명을 이루게 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말을 잘 안듣던가 하게 되면 뭐 체형을 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죽이거나 팔아먹던가 정 고약한 노예라고 하면은 일벌백계로 길거리에다 세워놓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어요. 수많은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이것이 노예입니다. 그의 지식도, 그의 건강도, 그의 정조도, 그의 도덕성도 다 주인의 것이요 생명까지도 주인의 것입니다. 마음대로 주인이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어요. 이것이 노예입니다. 생각하면 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노예생활 속에도 "노예 해방"이라는 말이 있었어요.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있었어요. 이것은 인도적 차원에서 말해주는 것이 아니고 보다 더 철저한 충성과 복종을 얻어내기 위해서 이루어진 수단이었어요.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아주 당근과 같은 거예요. 고분고분하게, 온유하게 또는 자발적으로 충성하고 철저하게 복종하면 주인이 자비를 베풀어요. 그 어느 순간에 좋은 주인을 만나면 노예에게 자유를 줍니다. 더구나 세상 떠나기 전에 자기를 위해서 한평생을 수고한 가장 충성된 노예에게 얼마간의 재산을 주면서 자유하게, "너는 이제부터 자유다" 이러한 노예 해방의 특권을 얻기 위하여 생각이 있는 노예들은 더욱더 충성을 다했다는 거죠. 한평생 충성을 다했어요. 자유의 길을 바라보고. 언젠가 자유의 특권이 주어지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충성을 했다. '그 충성이 오늘의 로마의 문명을 만들었던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럴 것 같아요.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수십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길들여진 노예가 있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문화화 된 노예. 이제 해방이 되었지요.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은 그는 절대로 자립할 수가 없었어요. 오로지 충성과 복종만 해왔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요. 아무 생각도 없어요. 그래서 모처럼 자유를 얻었다가도 자립할 수 없어요. 인격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자립할 수 없어서 다시 옛주인에게 가서 "나를 노예로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하고 다시 노예 생활을 했다는 거 아닙니까? 이 얼마나 비참한 얘기입니까? 또는 밖에 나와서 성공한 노예가 있었어요. 얼마간의 재산을 가지고 아주 힘써서 악착같이 일을 하고 수고해서 부자도 되고, 지위도 얻고,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가 아는 유명한 예술가들 가운데도 노예 출신이 있고요 심지어는 노예 출신 가운데 왕도 있어요. 자,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노예 생활에서 노예화된 노예의식 때문에 욕망과 무질서와 폭력과 나태, 방탕의 노예가 되는 거예요. 타락의 노예가 되요. 네로 황제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결국은 노예에서 황제까지 올라갔지만은 그 마음속에는 여전히 노예 근성이 있더라고요. 그는 자유인이 아니었어요. 자기도 말할 수 없이 괴롭고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죠.
오늘 본문에 보면은 인간의 노예상태를 간단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있다' 하는 겁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간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혹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비참한 것은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어 있더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자유인이 아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말입니다. 가난한 자는 자유인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자유하고 싶지만은 가난하다 보니 이 소중한 자유를 반납해 버리고 얻어먹을 수밖에 없잖아요. 무식한 자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유식한 자에게 매여 살 수 밖에 없잖아요. 더 중요한 것은 죄인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8장 34절에서 말씀합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 이라고요.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을 때, 회개하지 아니한 죄가 그 마음을 다스릴 때, 그는 저주 의식에 매입니다. 가책 의식에 매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다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그런 노예상태에 살아갑니다. 어느 사이에 거듭거듭 죄를 지을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말이에요. 그런 상황 속에서 끌려가게 된다는 말씀이죠.
실존주의 철학자 싸르트르는 '실존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네가지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투기적 자유입니다. 미래를 향해서 자신을 개방하고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미래를 향해서 자기 몸을 던져버릴 수 있는,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그 미래를 향해서 자기를 던지는 그런 자유, 통쾌한 자유지요. 그러나 여러분,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유인이 어디 있습니까?
또 하나는 선택의 자유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넓은 선택의 영역을 지니고 살아갑니까? 흔히 말하는 영어의 "I have no choice"라는 말이 있어요. 선택이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그 순간 노예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선택의 여유를 가지고 삽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하는 것은 내 마음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현재적으로. 간혹 그런 분들이 있더만요. 결혼생활을 하면서도요 '그저 할 수만 있으면 이 사람하고 안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어찌할 수가 없잖아.' 그리고 만부득이 살아갑니다. 그야말로 선택이 없습니다. 이거 뭐 팔자거니 하고 삽니다. 그건 자유인이 아닙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당신의 아내가 되겠소, 그게 바로 자유인입니다. 항상 현재적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현재적으로 아내를 선택하고 남편을 선택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미 선택한 데 대해서 나는 선택권을 포기하고 '에라, 모르겠다. 그냥 사는 데까지 살자.' 그건 자유인이 아닙니다. 벌써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걸 잊지 말아야 되요. 계속적으로 넓은 중에 자유롭게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세번째는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됩니다. 내가 선택했으니 책임을 지는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선택을 어정쩡하게 해놓고 책임을 안지겠답니다. 책임이 없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내 책임을 내가 넉넉하게, 그것도 기쁨으로 져야합니다. 그 사람이 자유인이요. 뿐만 아니라 연대성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 자유가 남의 자유를 속박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내가 자유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자유를 보장해줘야 됩니다. 그런 자유여야 참 자유죠. "나는 자유다" 하고 휘젓고 다니는데 많은 사람에게 억압을 주고 불행함을 주고 불편함을 준다면 그건 자유인이 아닙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명예욕과 지위욕과 물욕을 극복할 수 있으면 달인이 된다" 하는 말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요새도 보면 그 별것도 아닌 명예욕의 노예가 되가지고 어느 사이에 저렇게 비참해지는 것을 보고요. 지위욕, 그거 대단합니다. 좌우간 국회의원에 한번 출마했던 사람은 죽기 전에는 그 욕심을 못 버린대요. 아편보다 더 하다고 그러대요. 그 지위에 대한 정치적인 욕망, 여기에 노예가 되어가지고 처절해지고 제 명에 못 가는 사람 많죠. 어찌 생각하면 그것도 큰 병입니다, 이게. 물욕, 욕심이 그렇게 많아요. 이게 얼마나 비참한 것입니까?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이 네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여자와 술과 마약과 도박. 그 중에 제일은 도박이니라. 여러분 무슨 말인 줄 알겠습니까? 잘 모르시죠? 도박이라는 거, 생각하면 그 얼마든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잖아요. 안하면 그만 아니요. 그런데 아니치 못하는 거예요. 이거 한번 빠진 사람, 죽기 전에 못 고칩니다. 정말 힘듭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걸 못 고치는 거예요. 담배 그것도 그렇잖아요. 담배 하나 끊는 것, 아니 그까짓 것 안피우면 그만이지 뭐. 근데 그걸 못 끊는 거예요. 그리고 비행장에 가보면 한쪽 구석에 앉아가지고 요렇게 하고 빨고 있는 거 보면 불쌍하기도 하고 가련하기도 하고. 왜 이 모양이요? 사람들이 말이요…… 이게 노예가 된 거예요. 어찌 생각하면 우리 자유인으로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니요. 안하면 그만 아니오 그까짓 거. 그런데 그걸 못하는 거예요. 이것이 남의 얘기처럼 들립니까? 여러분 마음속에도 뭔가, 지금 당연히 그러지 말아야 할 일을 가고 있어요. 해서는 아니 될 일을 하고 있어요. 당연히 해야할 일은 또 하지 않고 있어요.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깊은 죄악이요.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요.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유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스스로 자유하지 못한다. 내가 이렇게 깊이 빠져 들어가서요 어느 사이에 이렇게 비참해졌는데 내 스스로 빠져나오지를 못해요. 의식이 노예화 되고 성품까지 노예로 바꾸어졌을 때, 다시 돌이키기가 어려워요.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1958년인가 봅니다. 그때 서울 안에 십자매 바람이 불었어요. 모조리 십자매를 키우면 돈 번다고 해서 제가 시무하던 교회에 여전도사님이 혼자 사는데 방안에다가 십자매를 엄청나게 많이 키웠어요. 그거 치우라고 그래도 "아이구 뭐 심심한데 뭐." 그러고 키우더니 이게 값이 떨어졌어요. 아주 망조가 들었는데 할 수 없이 십자매를 놓아주었지요. 새장 안에서 태어나 자라난 십자매를 이제 창문을 열고 나가라고 했는데 어떻습니까. 이 자유, 십자매가 새장 안에 있을 때는 쿠렁쿠렁 하더니 이걸 열어놓고 나가라고 그러니까요 나가 가지고 뱅뱅 돌다가 다 집안으로 다시 돌아 왔더라구요. 그리고 살지 못하더라고요. 이걸 알아야 됩니다. 어느 사이에 우리가 노예화 되어가지고 살았어요. 자유하지도 못할뿐더러 자유를 지킬 수가 없어요.
공산주의 치하에 있던 나라들을 방문해 봅니다. 공산주의 40년, 50년동안 했지요. 이제 자유를 얻었어요. 해방이 됐는데 왠걸요. 어느 사이에 인간성이 완전히 타락이 되어 버렸어요. 변질돼 버렸어요. 하나같이 게으르고 불신실하고 무책임하고. 공산주의의 이론이 뭡니까? 내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거예요. 가난한 자는 가난한 이유가 부자 때문이라는 거죠. 그게 바로 혁명이라는 거요. 혁명이 뭡니까? 내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그만 체질이 돼 가지고 자기 책임을 질 줄을 몰라요. 무책임해요. 그리고 소리만 지르면 뭐가 되는 줄 알아요. 우리도 간간이 보면은 나라를 향해서 뭐 달라, 뭐 달라. 그거 누가 주는 겁니까? 나라가 줄려면 세금 받아야지요. 주는 자 없이 어떻게 받는 겁니까? 기회의 평등은 잃어버리고 성과의 평등만 주장하는 거예요. 달라고 소리만 지르는데 뭘 가지고 주자는 얘기요? 일도 안하고 월급은 달라구요? 어디 이런 세상이 있습니까? 그 강도지! 이게 그만 체질화 되어버렸어요. 어느 사이에 성품화 되어버렸어요. 그 속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자유케 하는 자의 역할이 있고야 자유할 수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십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는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자유할 수 있습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결코 자유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8장 36절에서 인자가 자유케 하면 자유하리라. 아들이 자유케 할 때만이 자유하리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하나님의 율법적 요구를 충족케 하시고 비로소 자유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리고 성령과 말씀으로만이 자유를 지켜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는 얻기보다 지키기가 더 어려운 거예요.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하는 것이지 내가 스스로 자유하는 게 아니요. 그가 나를 자유케 하는 것이죠. 내가 스스로 자유할 수는 없는 것이에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바로 이 길 외에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사랑의 영입니다. 이 속에만 진정한 자유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나 자신의 자유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봅시다. 여러분은 얼마만큼 자유하십니까? 얼마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까?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까? 사랑의 자유가 있습니까? 내가 나를 이기는 확실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해방 56년 동안 자유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이것이 정치적인 자유라고, 경제적인 자유를 얻어보겠다고 '잘 살아보세'를 외쳐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유했습니까?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하기 전에는 자유는 어느 곳에도 없는 것입니다. 노예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었고요 감옥에 있으면서도 자유인이었습니다. 권력의 보좌에 앉아서도 그는 자유인이 아니었어요. 부자라고 자유인이 아닙니다. 유식하다고 자유인이 아닙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한 사람만이 자유인입니다.
여러분, 옛날을 잊어버리지 맙시다. 그러나 옛날에 매여서는 안됩니다. 옛날에 아팠던 사정, 그 과거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만은 그것에 매여 끌려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지불된 엄청난 대가를 다시 확인하면서 자유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에요. 진리의 길과 사랑의 길을 모르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에요. 진리와 사랑과 생명과 성령의 역사 안에 진정한 자유함이 있는 것을 확실히 알고 여러분, 세상이 어떻게 흔들려도 여러분의 심령에는 무한한 자유함이 있어요. 거기에 창조적 역사가 있는 것이올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시고 오늘의 이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아직도 얻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고 또 자유를 지키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주여, 시기와 질투, 그 많은 욕심, 분쟁과 그리고 교만과 나 자신으로부터 온전히 자유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은 이렇게 혼란하지만은 주께서 주신 자유를 끝까지 지켜가며 온전한 해방된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