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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 주신 은혜 (갈 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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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신 은혜  (갈2:6-10 )


미국의 월리엄 헐스트라는 사람은 신문사 편집인으로 있으면서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했고, 돈이 모이는 데로 취미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골동품 수집가였습니다. 귀중한 세계적인 미술품과 골동품을 수집하고 그것을 즐기며 사는 것을 마치 생의 목적처럼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진귀한 미술품이 있다고만 하면 세계 어디라도 좇아가서 그것을 사들이곤 했습니다. 이미도 많은 귀중한 것들은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유럽에 왕가에서 사용했던 도자기하나가 있다는 것을 정보에서 알게되었습니다. 잡지에서 그 그림을 보는 동안 그는 마음이 뛰었습니다. 아주 그 정신을 빼앗겼습니다. '저것을 내가 꼭 사들여야겠다.' 그리고 구라파를 여러 번 여행을 했고 추적을 해보았지마는 종적을 알 수가 없습니다. 누가 가지고 있는 건지. 이 귀중한 물건이 어디가 숨어있나. 그렇게 안타까워하고 심지어는 실망을 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잡지를 보는데 잡지에 골동품에 대한 이야기가 났는데 그 골동품이 미국인에게 팔렸다 라고 써 있습니다. 깜짝 놀라서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굴까? 하고 이름을 자세히 보았더니 자기 이름입니다. 벌써 그 소장품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었지마는 그것을 가져다 두기만 했지 살펴보질 않았습니다. 자기가 가지고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다니면서 찾아보려고 그렇게 애를 썼던 거지요. 자기가 소장하고 있는 것,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의 소중한 가치를 모르는 바로 그 어리석음을 지칭하는 말씀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은혜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자기자신, 가장 소중한 자기건강, 자기가 지금 처하고있는 이 현실의 귀중한 의미를 내가 깨닫지 못한다면 은혜도 은혜 될 수 없고 복도 복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멀리서 부러워할지 몰라도 자기 자신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은 나만 같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지만 나는 나 됨에 대한 만족이 없습니다. 은혜가 은혜 되는 것은 은혜를 은혜로 깨달아야 합니다. 은혜로 느껴야합니다. 은혜로 감격해야합니다. 그리고 은혜로움 그 안에서 만족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은혜 된 현실을 보면서 은혜 앞에 자기자신을 위탁해야 됩니다. 이 큰 은혜의 사니 더 바랄 것이 없이 은혜에다가 자기 운명을 그냥 던져버리고 삽니다. 바로 그러한 생이 그리스도인의 생이요 바른 생이요 행복한 생입니다.
핼렌 켈러 여사, 그는 삼중 장애자입니다. 눈도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고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불행을 딛고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하게 귀중한 일들을 많이 하며 심지어는 저술까지 하면서 살았습니다. 말년에 어떤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런 육체적 고통과 함께 한 평생을 살아왔는데 당신은 하나님을 원망해 본적은 없습니까?" 헬렌 켈러 여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헤아리는 것으로 만도 시간이 없는데,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하는 것으로도 부족한데 어찌 원망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감사하고 그 은혜를 기뻐하는 것으로도 시간이 부족해요." 원망할 시간이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남들은 그를 불행하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세상 떠날 때에 그는 이렇게 유언을 합니다. "나의 일생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이 어찌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내게 주신 은혜를 앎으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방 땅에서 태어납니다. 사실 이것은 나그네의 생활 속에서 그리 행복한 생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뒤늦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도 은혜였습니다.
두 가지 언어를 다 할 수 있도록 태어나는 것 그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헬라어와 히브리어 두 말을 다 합니다. 이것이 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내게 주신 은혜라고. 그래서 그는 이방인에 사도의 자격이 충분합니다. 그렇게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는 택정함을 받은 엄청난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감격해합니다.
그뿐 아니라 직접적으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또 다른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오래오래 참아주셨다는 겁니다. 잘못된 길로 갈 때,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할 때, 다메섹으로 갈 때 그가 계속 잘못될 때에도 오래오래 참아주셨어요. 기다려 주신데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하구요. 그뿐 아니라 자기의 진실을 알아주셨다는 겁니다. 내가 교회를 핍박했어도 몰라서 한 일이요. 스데반을 죽였어도 딴에는 율법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한 일이었습니다. 그 마음속에는 확실한 진실이 있었습니다. 충성이 있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충성. 잘못된 길로 가고 있지마는 그가 진실되다는 것을 인정해주신 하나님,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특별히 강권적으로 그를 불렀습니다. 사도바울을 설득한 것이 아니요. 다메섹 도상에서 강제로 그를 붙들어 포로 했습니다. 강제로 붙들었다는 것, 강권적인 소명, 굉장한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래 하나님께 감사하고 자기자신을 포기하고 그의 뜻을 따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장 12절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그가 나를 잡았어요. 포로 했는데 포로한 그것을 나의 목표로 삼고 좇아가노라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의 약점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 허물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약할 때에 강한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역설적입니다. 내가 인간적으로 세상적으로 약할 때에 은혜로 강해집니다. 이 은혜 삶으로 사명의 현장에서 승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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