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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의 스코어, 9대1 /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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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스코어, 9대1
(누가복음 17:11-19)

우리 민족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월드컵 축제가 아름답게 끝났습니다. 성황리에 끝마치게 된 것을 주님께 감사하십시다. 내친김에 우승까지 욕심을 내봤지만 결국 전차군단 독일에 막히고 말았습니다. 월드컵 우승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것은 월드컵 우승만이 아닙니다. 감사생활도 그만큼 어렵습니다. 어떤 대중 가수 말마따나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감사 또한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9:1, 이것이 감사의 스코어입니다.

한 청년이 관절염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어 참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관절염에서 놓임을 얻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 기쁘고 감사하여 그 청년이 받은 은혜를 주일 낮 예배시간에 간증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시간이 되어도 청년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청년을 심방한 목사님은 이유를 물었습니다. 청년은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오랜만에 자유롭게 걷는 게 얼마나 좋은지 어제 친구들과 등산을 다녀왔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는 극단적인 예가 될지 모르지만, 그만큼 감사는 어려운 것이란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오늘 성경 말씀이 그런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서 갈릴리로 가시다가 문둥병자 10명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을 낫게 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주님은 율법을 따라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했고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다가 깨끗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만이 예수님에게 다시 와 감사를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감사가 어려운 것이란 걸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요구만 있기 때문입니다

10명의 문둥병자 모두가 일치하여 외칩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3절] 그런데 일단 요구가 이루어진 후에는 달라집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15,16절] 요구는 10명이 하였지만, 감사는 한 명이 하였습니다. 아홉 명은 요구만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드리는 기도를 한번이라도 분석해 보셨습니까? “주세요!” 하고, “감사합니다!” 하고 어느 단어가 더 많습니까? 당연히 “주세요.”가 많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생활의 현실입니다. 그러니 감사생활이 어려운 것입니다. 요구는 많은데 감사는 적습니다. EX) 하나님께서 두 천사를 땅에 보내 한 천사는 ‘기도’라는 바구니를, 한 천사는 ‘감사’라는 바구니를 주면서 채워오라고 했답니다. 며칠 후 두 천사가 하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기도가 들어있는 바구니는 넘치는데 감사가 들어있는 바구니는 겨우 몇 개만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비유지만, 성도들에게 요구와 감사가 어떤 비율로 자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요구만 있다면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죄 때문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만든 인간은 감사하는 인간이요, 찬양하는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인간관계에도 감사와 만족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으로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불평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지어 주니까 한 말은 [창2:23]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하면서 만족하였습니다. 이 때의 삶은 감사의 삶입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난 후는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왜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었느냐고 하시니까, [창3:13]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의 실과를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책임을 전가합니다. 책임전가는 불평의 다른 모습입니다. 불순종의 죄가 들어오자 감사는 불평으로 바뀝니다. 원래 사람이 감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나 죄로 인해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상태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롬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뒤집어 말하면 감사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죄 된 삶입니다. 주님은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눅18:8]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세의 삶을 이야기할 때 [딤후3:2]은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감사하지 않는 것은 곧 불신(믿음 없음)이란 말입니다.

욕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이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두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욕심이고, 다음은 습관입니다. 욕심은 항상 불평과 불만을 가져다줍니다. 불평과 불만이 있는데 감사할 수는 없습니다. 욕심과 감사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믿기는 하는데 욕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감사할 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욕심은 마귀의 근성입니다.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마귀가 하나님께 감사하게 가만 둘 리가 없습니다.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기면 걷고 싶고, 걸으면 자전거 타고 싶고, 자전거 타면 오토바이 타고 싶고, 오토바이 타면 승용차 타고 싶은 것입니다. 남과 비교하다 보면 욕심이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비교는 다른 각도에서 보는 욕심의 다른 이름입니다.

욕심을 쫒아내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욕심을 쫒아내려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갈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감사가 안 되는 것은 믿음이 없고 성령충만하지 않다는 결론입니다.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습관 때문입니다

과거의 습관 때문에 감사생활을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구원받기 전의 생각과 생활이 감사를 방해합니다.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은 감사를 할 수도, 할 줄도 모를 수밖에 없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던 습관이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제 신학교 동창 중에는 한 친구는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한지 불평이 많았습니다. 불평과 원망이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웬만하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것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첫 목회지에서는 고전했습니다. 아마 그런 그의 습관 때문이리라 추측해봅니다. 그러나 목회의 연륜이 쌓이면서 요즘 만나는 그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변화되었습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감사가 넘쳤습니다. 그는 자신의 못된 습관을 잘 고친 좋은 경우입니다. 지금은 아주 좋은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습관을 고친다 함은 다른 말로 배우는 것입니다. 요즘은 가정 시간에 아이들이 젓가락질을 배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젓가락질도 배워야 하는데 하물며 감사생활을 배우지 않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는 배우는 것입니다. 감사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감사할 수 있는데, 그것을 가르치는 게 바로 감사 배우기입니다.

EX) 감사목사라는 별명을 가진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주일날 비바람이 불고 날이 몹시 좋지 않았습니다. 한 성도가 그날은 목사님이 감사할 조건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년 365일이 오늘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같은 상항이라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음 주일은 올해 전반기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맥추감사주일입니다. 감사하지 않을 확률과 감사할 확률의 스코어는 9대1입니다. 그러나 아홉에 서느냐 하나에 서느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감사하지 못해왔다면, 아직 요구만 가지고 있고, 죄를 여전히 가지고 있으며, 세상에 대한 욕심과 잘못된 습관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월드컵 선수들이 다 진다고 하는데 이기니까 그 즐거움이 더하고 가치가 더욱 빗나는 것 아닙니까.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스코어는 즐거움을 배가시킵니다. 우리는 감사가 사라진 시대에, 아무도 기대하지 못했던 감사의 스코어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런 역사를 창조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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