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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홉은 어디 있느냐? /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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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은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17:11-19)

  -박삼우 목사 (잠실중앙교회) -

  유대인의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지금 감사하는 사람이다.'  참으로 진리요 지혜로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지금 감사하고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가 어떤 형편에 있든 감사하고 있다면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하기에 감사합니다.  감사 자체가 바로 행복의 고백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이 가졌다 하더라도 족한 줄 모르고 더 못 가진 것으로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다면 그 가진 것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제 아무리 많이 가지고, 제 아무리 모든 일에 형통해도 불만과 불평 가운데 있다면 그는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왔다가 불평의 문으로 나갑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십시다.  여러분은 지금 감사하고 있습니까?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실로 많은 것을 받았고 또 누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떠합니까? 

  우리가 감사하지 않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가장 큰 이유가 은혜를 너무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잊어버리는 것, 바로 망각이 문제입니다.  생각해보면 망각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망각은 필요한 것이요 중요한 것입니다.  망각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난 날의 괴로웠던 일, 고통스러웠던 일, 잘못된 일들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고통과 아름은 잊어버려야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연주를 할 때 틀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실력 있는 사람도 실수할 수 있습니다.  실수했을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실수했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빨리 그것을 잊어버려야만 남은 연주를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틀렸다는 것을 자꾸 생각하고 후회하고 자책하고 괴로워하고 거기 매이면 나머지 연주도 다 망쳐버립니다.  인생이 그러합니다.  잊어야 할 것은 잊어야 남은 생애를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사람들은 거꾸로 합니다.  잊어야 할 것은 잊지 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가 내게 괴로움을 주었고, 누군가는 내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어느 것을 기억하고 어느 것을 잊어버립니까?  은혜는 다 잊어버리고 상처받은 것은 두고두고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말에도 '은혜는 모래 위에 기록하고 상처는 바위에 새긴다'고 했습니다.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이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상처 받은 일, 좋지 못한 일들, 괴로운 일들은 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 입은 것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가슴 깊이 새기고 새겨서 감사해야 합니다.  여기 하나님 기뻐하시는 모습이 있고,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열 사람의 문둥병자가 나옵니다.  문둥병자라고 했는데 요즈음 문둔병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고 나병 혹은 한센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열 사람은 나환자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나환자,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 중 하나입니다.  지금도 나환자들 불쌍합니다만 주님 당시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완전히 버림받아 비참하게 죽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나병을 죄로 인해 저주받은 병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슬픔과 비극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나환자들이 멀리 서서 큰 소리로 "예수 선생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 저들을 보시고는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말씀 하셨습니다.  당시의 법에 의하면 나환자가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는 것은 자기 몸이 깨끗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확인하는 경우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직 병을 고쳐주시지도 않았으면서 마치 저들의 병이 다 나은 것처럼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열 명의 나환자들이 모두 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순종해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러 가는데, 가는 길에 모두 병에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순종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열 명이 깨끗함을 받았지만 그 중 주님께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열 사람 중에서 한 사람만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때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탄식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나병이라는 공통적인 슬픔을 당했었습니다.  여기 주님께 돌아와 사례한 한 사람이 사마리아인이라고 한 것을 볼 때 이 열 사람의 나환자 중에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섞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상종도 하지 아니 했는데 나환자의 세계에는 그러한 구별이 없었습니다.  나환자에게 유대인이 무슨 소용이 있고 사마리아인이면 또 어떠하겠습니까?  나병이라고 하는 공동비극이 저들의 모든 신분과 계급의 차별을 없애버린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저들은 나병으로 말미암아 눈썹이 빠지고 손톱이 빠지고 발가락이 뭉개지고 온몸이 썩어 마침내는 죽게 되는 처참한 비극 아래 있었습니다.

  나병의 공동 비극,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죄 아래 있는 모든 인생의 공동비극을 상징한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성경은 언제나 나병을 영적으로 죄 문제에 결부시켜 교훈하고 있습니다.  죄 아래 있는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나환자입니다.  민족, 신분, 지위에 구분 없이 모든 인류는 '죄'라고 하는 나병 때문에 썩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니 저들은 똑같이 주님으로부터 멀리 서 있었습니다.  당시 나환자들은 모세의 율법의 제재를 받아 마을 밖에 거해야 했고 사람에게 가까이 감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옷을 일부러 찢어야했고 머리카락을 풀어야 했습니다.  길을 가다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입을 손으로 가리우고 스스로 '나는 부정한 사람이다'고 외치므로 다른 사람들이 저들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의 위치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쫓겨 난 것입니다.  마을에는 즐거움과 행복이 있지만 저들은 그 즐거움과 행복으로부터 격리되어 어두움과 슬픔 가운데 비참하게 살아야만 했습니다.  나환자, 저들이야말로 고통과 저주 가운데 비참하게 살다가 영원히 멸망당할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저들에게 가장 소망이요 생명이었습니다.  주님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에 많은 나환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많은 나환자들 중에서도 저들이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주님으로부터 긍휼을 얻었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똑같이 병에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나병으로부터 깨끗함을 받은 이 열 명의 나환자, 저들은 바로 오늘 세상의 수많은 영적 나환자 가운데 주님을 만남으로 죄에서 구원함을 받은 우리를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다.  우리의 원래 처지가 이 열 명의 나환자와 같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죄로 인해 썩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나환자였습니다.  그런데 오직 은혜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영원한 멸망의 나병에서 고침 받는 복을 누렸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질병, 가난, 실패, 환난, 여러 가지 나병에서 주님께 부르짖었고 주님은 우리를 고쳐주셨고, 구원해주셨습니다.  지난날을 한 번 되돌아보십시오.  우리 모두가 한결같은 은혜와 복을 받았습니다.  '나는 복 받지 못했다' '나는 은혜입지 못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날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그 때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문제는 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지금 감사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열 사람이 똑같이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사마리아인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은 열 사람인데 감사하는 사람은 한 사람입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 바로 우리의 배은에 대한 주님의 탄식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토리 목사님께서 한 번은 시카고에서 설교를 하면서 당시 있었던 한 미담을 예화로 들었습니다.  내용인즉 미시간 호수에서 큰배가 파선이 되어 많은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그 중에 헤엄 잘 치는 한 사람이 혼자서 열 일곱 명이나 생명을 구해 주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말씀하면서 이러한 헌신과 용기를 그리스도인이 배워야 한다고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나자 그 설교를 듣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손을 들고는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토리 목사님은 반가워하며 그를 불러 강단 위에 세워놓고 소개하면서 극구 칭찬하고, 마지막에 이런 선한 일을 하고 나서 무슨 느낀 바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조금 생각하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뭐 특별히 느낀 바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내가 그 때 열 일곱 사람을 구해주었는데 그 이후 나를 찾아와 고맙다고 인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생명을 구해주었는데 그 은혜를 잊어버리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은 은혜를 받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은혜는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생각해보십시다.  열 사람의 나환자가 주님께 고쳐달라고 부르짖을 때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아마 마음속으로 온갖 다짐과 서원을 다 했을 것입니다.  '고쳐만 주시면, 고쳐만 주시면... 내가 이렇게 하겠다, 혹은 저렇게 하겠다' 다짐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했지 않습니까?  '살려만 주시면,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시면,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소원이 이루어진 다음, 그 문제 해결된 다음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은혜를 구할 때, 긍휼을 구할 때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다음 그 열매를 증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때 그만 소홀히 합니다.  긍휼을 구할 때는 큰 소리로 부르짖지만 은혜를 받은 후 감사할 때의 소리는 들리지도 않습니다.
 
  예수 믿는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외나무다리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마침 비가 많이 와서 다리 아래로는 붉은 흙탕물이 무섭게 굽이치며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외나무다리를 꼭 건너가야만 하기에 조심스럽게 조용조용 다리를 건넙니다.  아래를 보면 겁이 나서 안 되겠기에 아래를 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리를 건너는데 조금 가다 그만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보니 황톳물이 무섭게 소용돌이를 치는데 아 무서워 다리가 딱 오그라듭니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데 꼼짝 못하겠습니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죽었구나 싶으니 기도가 저절로 우러납니다.  "하나님 살려만 주십시오.  이 다리만 무사히 건너게 해주시면 전 재산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하고 나니 좀 용기가 납니다.  그래서 다시 다리를 조심조심 건넙니다.  절반쯤 왔습니다.  절반을 와서 생각하니 재산 다 드린다고 기도 한 것이 후회가 됩니다.  아까는 너무 겁이 나서 실수했구나.  재산을 다 드리면 나는 어떻게 하라구.  다시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재산 다 드린다고 한 것은 취소합니다.  다리를 무사히 건너게 해 주시면 재산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다리를 건넙니다.  이제 3/4쯤 왔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여기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재산 절반이 아깝습니다.  다시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삼 세판 아닙니까?  한번만 더 기도하겠습니다.  재산 1/4을 드리겠습니다."  아 그런데 그렇게 기도를 끝내자마자 미끄러져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 물에 빠지면서 외쳤습니다.  "아이구, 하나님 농담도 못합니까!"         

  생각해보면 우리의 모습입니다.  눈물나는 자리에서 절망적인 자리에서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은혜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도 슬그머니 변합니다.  점점 변합니다.  나중에는 부르짖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립니다. 
 
  호세아 13:4 이하에 보면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탄식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구원하였고 광야 마른땅에서 권고하였거늘 너희가 먹이운 대로 배부르고 배부름으로 나를 잊었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오기 위해 스스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 보살펴주셨습니다.  태양 볕에서 구름 기동으로 보호하셨고 밤의 추위에서 불기둥으로 지켜주셨습니다.  농사 한번 짓지 않았는데 40년 동안 하늘의 만나로 먹여주셨고, 원수의 위험에서도 지켜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하나님께서 그 땅을 정복하도록 도와주셨고 그래서 이제 기름진 가나안에서 잘 살도록 은혜 베푸셨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잘 살게 된 것,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을 이렇게 어려울 때 보살펴주었는데 이 백성이 배가 부르게 되자 하나님을 잊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배부를 때가 언제이겠습니까?  절박한 괴로움이 없을 때요, 평안할 때요, 잘 살 때입니다.  가난할 때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는데, 잘 살게 되니 그만 그것 잊어버리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삶이 부유해지면 부유해질수록 하나님께 보다 감사해야될텐데 정반대 현상이 나타납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할 때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는데 이제 일용할 양식을 위해 별 신경을 쓰지 않게 되더니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어려울 때는 기도하고 부르짖었습니다.  문제 해결되고 나면 감사하지 않습니다.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내 스스로 잘 살 수 있을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섭섭하다는 뜻입니다.  이럴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을 섭섭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주님은 감사하기 위해 달려온 한 사람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주님 한 사람의 감사에 정말 기뻐하셨습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감사하는 이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때 하나님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언젠가 어느 목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 대학부 학생들이 수련회에 참석해서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집회에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학생들이 수련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그 동안 속 많이 썩여드려서 죄송합니다.  이번 수양회에서 많이 깨달았습니다.  특별히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 동안 속 썩힌 것 죄송합니다.  이제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부모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부모님들이 그렇게 기뻐하더라는 겁니다.  '효자 났다'고들 좋아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이 자녀들이 부모에게 돈 보따리를 가져왔습니까?  아니면 무슨 출세를 했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좋아합니까?  '부모님 고맙습니다.'  이 한 마디가 효도입니다.  한마디의 감사가 효도입니다.  부모가 자녀가 알아달라고 자녀 사랑하고 자녀 위해 희생하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부모의 그 은혜를 알고 감사할 때 부모에게는 그 이상의 기쁨이 없습니다.  그 동안의 수고 다 녹아버립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때 이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 가장 큰 영광 받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감사할 때 그에게 은혜를 더하십니다.  감사를 기뻐하시니 그에게 복을 더하십니다.  감사를 기뻐하시니 감사할 수 있도록 계속 은혜를 베푸십니다.  시편 51:14에 말씀하셨습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감사하는 자를 환난 날에 다시 건져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본문에도 주님 감사하는 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감사하는 한 사람, 그는 이제 구원의 복까지 받습니다.  아홉은 병에서는 고침 받았지만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한 사람 그는 구원까지 받습니다.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감사하는 자가 더 큰 은혜 더 큰 복을 누리는 것입니. 

  스펄전 목사님은 말씀했습니다.  "우리에게 별빛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 하나님은 달빛을 주시고, 달빛 주시는 은혜를 찬송하면 하나님 우리에게 햇빛을 주시고, 우리에게 햇빛 주시는 은혜를 찬양하면 하나님 우리를 달빛, 햇빛 다 소용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빛이 비추이는 곳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이다."

  여러분, 2002년도 감사절이 다음 주일로 다가왔습니다.  다시 한번 주신 바 은혜를 헤아려야겠습니다.  나환자가 고침을 받은 것 이상으로 우리 모두가 넘치는 사랑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큰 은혜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뜨거운 감사의 마음들을 하나님 앞에 드리십시다.  이 시간 주님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그 아홉 어디 있느냐?"  내가 아홉 중 하나가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진실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께 큰 영광 돌려드리고, 그래서 더 큰 은총, 더 풍성을 복을 누리시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감사하지 아니한 아홉에 대해 탄식하셨지만 감사하는 한 사람에 대해 기뻐하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저희들이 은혜를 잊어버리는 아홉 중 하나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돌아와 감사했던 사마리아인처럼 은혜를 감사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뿐 아니라 주님의 더 큰 은혜를 누리는 저희들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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