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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늘의 욥바 항구 / 욘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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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욥바 항구 <욘 1:1-3> 

- 김이봉 목사 (상도교회) -


□ 오늘의 욥바 항구  욘 1:1-3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
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
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 1:1-3>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항상 반복되는 실수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실행입니
다.
알면서도 그대로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였습니까?
그동안 얼마나 많은 기회를 놓치셨습니까?
몇 번이고 기회를 주었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말씀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나의
생각대로 행한 일이 한두번이 아닌 줄 압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선지자 요나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1.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Nineveh)로 가서 외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욥바라는 항구에서 다시스(Tarshish)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양심에 가책을 느끼면서도 요나는 선가를 주고 하나님의
명령에 정 반대쪽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배 삯을 지불하고 올라탔습니다.
그리고는 배 밑창으로 내려가 아예 잠을 청했습니다.
욥바 항구가 오늘 우리에게 상징하는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내 뜻을 내세우며 다른 길로 들어서려는 기로에 선 자리
를 의미합니다. 오늘도 이런 성도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고 하였습니까?
당시 니느웨는 어떤 곳이었나 하면, 앗수르 제국의 마지막 수도였습니다.
본래 <니느웨>란 여신을 의미하는데, 창세기에 나오는 함의 후손인 니므롯이 세
운 성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니므롯>은 장대한 호걸들이었습니다.
니느웨가 위치했던 곳은 티그리스강 상류, 현재의 {바그다드}로 부터 북으로
약 40km 떨어진 모슬 해안에 위치한 곳이었습니다.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요나 당시 인구는 약 60만명의 대 도시였습니다.
걸어서 3일 길을 걸어야 하는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대 도시의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은 이 성을 심판하기로 작정하
였습니다. 그래서 요나를 보내어 그 중에서도 몇 명이라도 구원 얻는 자들이 있
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요나로 하여금 40일 후면 이 성이 망할 것이라고 외치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바로 그것이 싫었습니다.
요나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나의 생각은 니느웨 성이 망하기를 바랬습니다. 
이스라엘의 원수의 나라, 그 놈들이 망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반대쪽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들에게도 항상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현실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다를 경우가 있습니다.
다를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나의 생각과 정 반대일 경우가 있습니다.

요나의 생각은 망하기를 바랬는데,
하나님은 그래도 저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회개를 촉구하라고 하였
으나, 요나는 바로 그것이 싫었다는 말입니다.
이미 망할만큼 죄를 범한 놈들에게 무슨 회개할 기회를 주라는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요즘도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북한에 대하여 우리 가운데는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놈들 만날 주어도 또 테러를 하는 놈들, 완전히 망해버리기를 바랄 수도 있습
니다. 과거에 우리 민족의 갈등구조에서 보면 마땅히 어느 한쪽이 망해야 할 것
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북한은 망하지 않은 채, 그대로 존속하고 있으니, 언제 통일이
될 것인가? 낙심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의 차이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대로 보면 이런 경우는 또 있습니다.
주 전 8세기경 하박국 선지도 이런 경우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하나님은 정의로운 하나님이신데, 왜 당신은 이 땅에서 불의
를 보시고 가만히 침묵하십니까?"
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하박국의 생각도 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당시의 강대국들과 또 나라 안에서 일
어나는 모든 불의한 일들을 당장 응징하거나, 벌을 내리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가만 있으니, 그것이 답답해서 물었습니다.

오늘도 바로 이렇게 답답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왜 내 기도를 들으시지 않습니까?
내가 원하는 길을 왜 자꾸만 막으십니까?
어찌하여 그 사람을 놓치게 하십니까?
사랑을 이룰 수 없어 눈물 흘리며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
니다.

2.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다를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이 믿는 사람들에게 항상 갈등을 느끼는 문제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나의 생각이 더 합리적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나의 생각은 당장에 내게 필요한 경우이고,
하나님의 생각은 나의 전 생애를 통하여 필요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나의 생각과 너의 생각은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나의 생각은 너의 생각 보다 높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어른과 아이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생각의 차이입니다. 어린이는 어린이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또 그래야 그것이 어린이기도 합니다.
만일 어린이가 어른처럼 생각하고 말한다면 그것이 어린이는 아닙니다.
사람은 피조물이요,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입니다.
창조주가 나를 보고 있는 것과, 내가 창조주를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
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입니까?
많은 경우에서 우리는 너무나 현실적인, 단기적인, 순간적인 것을 더 선호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의 뺨을 치는 자
에게 못 치도록 방어해야 하고, 나도 한 대 같이 쳐야 하는 것이 우리의 합리
적 사고입니다.
원수가 있다면 원수를 복수하는 것이 합리적 생각입니다.
그래서 "자식에게 아비의 원수를 갚아다오!"라고 하고 죽습니다.
그러면 그 자식은 평생토록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살아갑니다.
깊은 산 중에 들어가 무술을 연마하고 드디어 원수를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 결
국 복수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당연한 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라!,
겉 옷을 달라하면 속 옷까지 주라!,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 뺨도 돌리라!,
이런 말들은 모두 비현실적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지면서 살라고 하십니
까?
한 대 맞으면 두 대, 석 대로 보복해 줘야지, 왜 참으라고 하십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들입니다.

그리고 왜 우리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지 못합니까?
말씀대로 순종하면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당장에 이익이 있는데 왜 손해를 보는 일을 하라고 하십니까?
이것이 이해가 안 됩니다.
주일날 큰 바이어(buyer)가 찾아오는데,
이번 일을 성사시키면 내 팔자가 달라질 수 있는데, 주일이야 다음 주일도 있
고, 또 다음 주일도 항상 있는데, 하나님이야 언제라도 와서 뵈면 되지 주일을
꼭 지켜야 하는가?
그렇게들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런 사람들 만나기 위해서, 그런 기회를
포착하기 위하여,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의 차이란 말입니다.
내 생각에는 넓은 길이 있는데, 쉬운 길이 있는데, 빠른 길이 있는데, 왜 돌아
서 가라고 하는가? 이것이 이해가 안 가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 문제에 걸려서 교회에 못나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이 도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나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일생을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살지만, 하나님은 나의 전 생애
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십니다.
시작과 마침이 되셔서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3. 오늘도 욥바 항구에서 머뭇거리는 크리스천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따라 결단하기를 바랍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한 선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돌아가는 것 같이 보이고,
지금은 손해보는 것 같지만,
그게 정로(正路)임을 알기를 바랍니다.
요나 처럼 고래 배 속 까지 들어가서 회개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영
적 무지입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야 깨달았다면 그것은 영적 무지일 뿐입니다.

오늘도 인생의 욥바 항구에서 방황하는 사람들 있다면 결단해야 합니다.
지금 세상으로 향하는 배를 기다리는 분들은 없지 아니합니까? 청년 시절에 교
회 생활도 모범적이던 젊은이들 중에서, 오늘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생
각해 보기 바랍니다.
왜 안나옵니까? 무엇인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고래 배 속에 들어가서 진한 눈물을 흘리는 때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는 어디에서 만족을 누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
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에 고래 배 속에서나마 깨닫게 하였다면, 그런대로
그는 택한 백성일 것입니다. 진정으로 버리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고래 배 속에
서도 회개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 60을 지나면 이제는 사는 날 보다는 죽는 날이 가까워진 나이들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하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얼마
나 많습니까? 이런 사람들을 그대로 보고만 있는 가족들이 원망스러울 뿐입니
다. 저는 우리 권사님들 가운데, 아직도 남편들을 이끌어 오지 못하는 분들을
보면, 두가지 의문이 생기곤 합니다.
하나는 그들이 진정 남편을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아니
면 포기한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억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어찌 남편을 죽을 자리
로 가고 있는데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무엇인가 아직도 남편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단정하
고 싶습니다. 교회의 권사직을 맡았으면 최대한 노력을 하여, 남편을 감동시켜
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말로 천국과 지옥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말입니다.
아직도 남편들이 그렇게 무서운 존재들입니까?
아직도 남편 하나를 감동시키지 못 했다면, 이 후에 주님 앞에 설 때 무엇이라
고 할 수 있겠느냐 입니다. 남자들이란 단순한 존재들입니다.
여자가 하는 것만큼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 앞에 부끄러우면 이 다음에 주님 앞에서는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오늘도 욥바 항구에서 머뭇거리는 남편들을 이끌어 하나님께로 인도해 내야 하
겠습니다. 그것이 제일차적 사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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