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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려움이 없는 삶 /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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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 없는 삶 <시 23:1-6>

-김이봉 목사 (상도교회) -


□ 두려움이 없는 삶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편 23편 1-6절>

오늘 읽은 이 시편은 세계의 모든 크리스천들이 애송하는 시입니다.
다윗의 대표적인 신앙고백의 시이기도 합니다. 
이 시편 23편이야말로 많은 문학작품 등에 인용되었고,
특히 음악가들에 의하여 여러가지 형태의 곡조가 붙여져 노래하고 있는 시편이
기도 합니다.

이 시편은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의 심령에 새로운 쉼과 활력소를 일으켜 줍니다. 아마도 이 시편을 능가하는 시가 다시 나올까 하리만큼 우리의 심금을 울리
는 시이기도 합니다.

옛날 번역으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렇게
번역하였지만, 요즘 새로 번역된 성경에 보면,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이기에,
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나, 내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는 말이나, 그게 그 말
인 것 같지만 느낌은 다릅니다.
후자의 번역이 더 적극적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목자이기에 내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모자람이 없다는 것
보다는 더 적극적인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좀 깊이있게 들여다 보면,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고, 너무
나 모자라는 것이 많고, 너무나 불안한 것이 많고, 너무나 두려운 것이 많은 것
을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만족함보다도 불안과 두려움에서 사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1. 누구나 사람들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두려움이란 육체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정신적인 두려움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두려움은 모두 질병과 죽음에 연결된 두려움입니다.
내 몸에 죽을 병이나 생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이러다가 내가 죽지나 않을까 하는 그런 불안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예 검사도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들은 평생 가슴에 불을 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것이 화병(火病)이 되어 평생을 그늘 속에서 살아갑니다.
어느 누구인들 만족함에 살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모두 삶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서 살고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몰라서 방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젊은이들 가운데는 실연으로 인하여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아 비관하고 자살하
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두 따져보면 생에 대한 결핍과 두려움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사람은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시며 산다고 하였습니
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우리 인간의 실존(實存)의 밑 바탕은 바로 허무(虛無)라
고 하였습니다.
허무라는 깊은 심연(深淵)위에 놓여 있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 삶의 바탕은 항상 불안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심연을 들여다보지 않고 일상생활에 파묻혀 사는 것 뿐이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다
가 그 심연을 들여다보는 순간, 절망할 때에 자신의 실존을 회복하는 계기가 된
다고 말합니다.
아무튼 인간의 삶은 바로 이 <죽음>이라는 밑 바탕 위에서 살아야하는 존재들이
기 때문에 두려움이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살았다고 하는 것은 뒤집어보면,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 가
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의 삶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 필요는 없습니다.
참된 신앙인의 삶은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죄의 값이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은 죄에서 해방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죄에서 구원받고, 사망의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길은 다른 길로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내게 어떤 존재이며, 그가 나와 어떤 관계임을 깨달아야 합니
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신앙이란 말입니다.

2. 우리에게서 신앙이 왜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보통 일상적인 삶에서 신앙은 없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집니다.
모두 잘 나갈 때 남의 도움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아니 인생은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릅니다.
누구의 도움을 받던지, 도움을 받으며 사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돕고 계시는가?
나의 심각한 문제들 앞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을 오늘 생각해야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신앙이 왜 필요한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평범한 삶에서는 공기(空氣)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기 없이는 살 수 없는 것 같이, 우리에게 신앙이 없으면
죽음이 깔려 있는 세상에서 힘 있게 살 수 없습니다.

인간 개인은 나약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신앙의 사람은 세상이 그를 어
떻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로마의 창검 앞에서 당당하게 살고 간,
신앙인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다윗도 바로 그렇게 살고 간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는가?
그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함께 하였는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3. 다윗은 야훼의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영어 성경에 보면,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라고 하였
지만, 요즘 새로운 영어 성경에 보면 The Lord is my shepherd; I have
everything I need 라고 하였습니다.
직역을 하면 '주께서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
다'고 했습니다.

즉,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은 나의 필요한대로 채워 주시는 분이란 고
백입니다. 그래서 그런 분이 하나님이요, 그런 하나님은 나의 목자가 되신 분이
라고 하였습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는 한 폭의 그림에서 보는 그런 낭만적인 관
계가 아니라 생사(生死)를 함께 하는 생존(生存)의 관계입니다.
즉 양은 목자가 없으면 죽습니다.
양은 목자가 없으면 초장을 만날 수 없습니다.
양은 목자가 없으면 어느 순간 맹수의 밥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목자가 있을 때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갑니다.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갑니다. 이것이 목자와 양과의 관계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목자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목자가 양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을 그렇게 비유하였습니다.
비록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
심을 믿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위대한 힘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을 총 정리하면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의 평생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전(殿)
에서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움이 없는 삶입니까!
다윗은 이러한 신앙을 가졌기에 그가 겪은 기막힌 인생의 좌절의 골짜기에서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러한 역경의 삶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별을 보면서 노래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신앙입니다.
저는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어느 목사님의 글을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가 공부한 그 학교에서 존경을 받는 어느 노 교수의 얘기이었습니다.
그 교수의 명성은 특히 외국어를 열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그것으로 학생들
에게 존경을 받는 교수이었습니다. 그는 영어, 불어, 독어, 스페인어는 기본이
었고, 라틴어, 아람어, 희브리어, 그리고 동양어 중에 몇 나라 말도 할 수 있었
으니 실력으로 학생들에게 권위를 인정받는 교수이었습니다.

특히 희브리어 원전으로 이 시편 23편을 눈을 감고 리듬에 맞추어 읽는 것을 보
고 너무나 감동이 커서 그래서 어느 날 물었다고 합니다.
"교수님! 어떻게 그렇게 희브리어에 능통하게 되었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그 노교수는 친절하게 자신의 일생을 얘기해 주더랍니다.

그가 지금은 모교의 교수가 되었지만, 자신이 학생 시절에 한 방을 함께 쓰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와 매우 가깝게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가끔 이상한 말로 중얼거리는 것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는 유대인 학생이었습니다. 그가 중얼거리던 말은 시편 23편을 암송하는 것이었
습니다. 그는 이것을 암송하노라면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자기도 친구와 함께 이 시편 23편을 희브리어로 암송하기 시작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치의 비밀 경찰들은 그에게까지 손을 뻗치기 시작하
였습니다. 그는 얼마동안 숨어서 지내다 결국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잡혀가는 날 그 소식을 듣고 친구가 탄 트럭을 따라가면서 친구의 얼굴을 한번
이라도 더 볼려고 자전거 페달을 힘있게 밟았습니다.

이 친구는 바로 그때 이 시편을 암송하면서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하더랍니다. 교수는 그때 친구와 함께 희브리어로 소리를 질르며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행할 때에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울면서 친구를 보냈습니다.

전세는 더욱 악화되어 이 교수도 징집되어 독일군으로 전쟁터로 나갈 수밖에 없
었습니다. 결국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총살형이 집행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교수는 죽음의 행렬에서도 의연하게 시편을 암송하던 유대인 친구를 생각하
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행관에게 한순간의 여유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대
학시절 친구와 외웠던 시편 23편을 희브리어로 암송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겨눈 총구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감동적으로 크게 "내 영혼을 소생
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연합군의 러시아 장교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높여 같이 시편 23편을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도 희브리어로 말입니다.
바로 이 연합군의 장교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장교는 곧바로 교수님을 풀어주라고 명령했고 사형 중지 서류에 사인을 했습니
다.
놀라는 자기를 보면서 장교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가 비록 악마의 제복을 입고 있다해도 하나님의 백성인 것
이다"라고 하면서 놓아주더란 것이었습니다.
이런 말을 한국에서 온 학생에게 하면서 눈가에는 잔잔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얼마나 감동적인 말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국경과 국적이 달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두려움이 없는 신앙의 사람들이 되어 오늘의 처한 나의 삶의 현실에
서 이렇게 노래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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