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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소극성 / 고전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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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소극성 (고린도전서 13:1~13)


만물이 소생하고 약동하는 계절 5월, 가정의 달을 마지 하여 사랑하는 여러분의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먼저 보낸 편지 중에서 13장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기만 해도 기운이 솟아나고 마음이 맑아지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합니다. 수많은 시인들도 사도 바울 처럼 이런 대 걸작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평생을 문학에 매달렸지만 그것을 이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신경이 곤두서고, 실망하고, 낙심될 때 고린도전서 13장을 읽게 되면 당장 인생이 살아볼 가치가 있고, 얼마든지 우리의 가는 길에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표현의 아름다움보다는 그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몸과 마음이 병든 사람들, 이 세상에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바울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은 병든 사람이 아니고,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 무식한 사람이 아니고, 권력 없는 사람이 아니고, 사랑이 없는 사람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이 말씀을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지식입니까? 권력입니까? 명예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을 보니까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만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런 믿음을 가졌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닥 했습니다. 내가 방언을 해도, 내가 예언을 해도, 내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리고 내게 큰 믿음이 있어도 나는 여전히 아무 것도 아닐 수가 있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할지라도, 또 내 몸을 불사르게 순교하는 자리까지 내어준다 할지라도, 이런 온전한 희생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정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사랑의 요소를 제거해 보세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실 사도 바울도 사랑이 무엇이라고 명확하게 정의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누구도 사랑이 무엇인가 명확하게 정의할 사람은 없습니다. 꿀이 무엇인가 정의하라면 "꿀은 꿀벌이 만들어내는 아주 달고 끈적끈적한 물질이다"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꿀에 대한 충분한 정의는 되지 못합니다. 꿀을 한 통 주면서 맛을 보라고 할 수는 있지만 누구든지 꿀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무엇이라고 정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는 있습니다. 오늘은 사랑의 소극적인 표현을 생각하고, 다음 시간에는 사랑의 적극적인 표현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사랑은 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시기는 우리 모두가 구원받아야 할 또 하나의 죄입니다.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는 유명합니다. 둘째 아들이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받아 가지고 외지에 나가 허랑 방탕하다가 거지 신세가 되어서야 정신이 들었습니다. '우리 아버지 집에 있는 종들도 나 같지는 않은데'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거지 모양을 하고 돌아오는 둘째 아들 탕자를 껴안고 기뻐하며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짐승을 잡고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온 아들이요, 잃었다가 찾은 아들이라고 그렇게 기뻐했습니다.
맏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데 잔치 분위기인 것을 느끼고 하인에게 연유를 물었더니 둘째가 돌아와서 아버지께서 너무 기쁘고 좋으셔서 잔치를 배설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보고를 들은 맏아들은 화를 냈습니다. 왜요? "내가 여러해 아버지를 섬기는데 내게는 염소 새끼 하나라도 주어 내 친구와 즐기게 한 일이 없었는데 아버지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고 탕진한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해 송아지를 잡으셨어요?" 형에게는 동생에 대한 시기하는 마음이 한 구석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즐거워하기는커녕 어두운 구석에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가인이 왜 동생 아벨을 쳐죽였습니까? 동생 아벨이 드린 제사는 하나님 받으셨는데 자기가 드린 제사는 받지 않으신데 대한 시기심 때문입니다.
형제는 서로 사량해야할 대상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형제가 더구나 가정을 이룬 후 서로가 시기하므로 일어나는 가정의 비극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시기심은 누구에게나 파고듭니다. 성자라고 하는 사람에게도 생기는 감정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귀가 리비아 사막을 건너가다가 어느 성자를 괴롭히는 자기 부하들을 만났습니다. 마귀 무리들은 성자를 꾀어서 죄를 짓게 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마귀들이 꾀이는 제안을 할 때마다 성자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부하들이 실패를 거듭하는 것을 인상을 쓰며 지켜보던 마귀두목이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이 하는 일을 보니 너무 서툴러, 내게 맡겨" 그리고 마귀 두목은 성자에게다가 가서 성자의 귀에다 속삭였습니다.
"신부님, 동생이 방금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가 된다는구만요" 이 말을 듣자 성자의 그 청청한 얼굴에 금방 험상궂은 시기의 표정이 나타났습니다. 그때 마귀 두목은 승리감에 찬 어조로 그의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방법이 바로 이런 방법이야"

제가 지난 11월에 게 잡이로 유명한 영덕에 다녀왔습니다. 게 잡이를 하는 어부들의 말에 의하면 게를 담은 그릇에는 뚜껑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어떤 게 한 마리가 그릇의 둘레를 기어올라가면 다른 게가 끌어내린다고 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 것은 사랑은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기한다는 것은 물질에 기인합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어떤 정신적인 재능을 시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좋은 성품을 시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다른 사람의 지위나 부 같은 것을 시기합니다.

윌 맨슨의 물건을 파는데 성공하는 세 가지 작전이 있습니다. 이 작전만 쓰면 부하건 가난하건, 남자 건, 여자 건, 젊었 건, 늙었 건 다 사고야 만다고 합니다.
1. 운이 좋아서 비싼 물건을 싸게 사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라.
2. 그가 세상에서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하라.
3. 그가 그 물건을 가지면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시기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하라.
시기에는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자기 땅 옆에 붙어 있는 땅을 사지 못해 안달이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농부가 만족하려면 그는 세상에 있는 땅을 모두 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자체를 생각지 않기 때문에 만족합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림이라고 해도 사랑이 있으면 행복하고 풍요로운 느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사랑은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습니다.
시기가 도전의 한족이라면, 자랑이나 교만은 동전의 다른 쪽입니다. 이 두 가지가 다 옆의 사람보다 위에 서고자 합니다. 시기는 상대방을 끌어내리는 것이지만, 자랑과 교만은 자기 자신을 상대방의 위에 두려는 것입니다. 사랑은 겸손할 줄 알게 되고 겸양을 여러 가지로 배우게 됩니다. 겸양에 대한 인생의 지름길은 고통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위를 쳐다 볼 수 있도록 우리를 눕혀 좋으시기도 하십니다. 우리가 사랑의 미덕인 겸손을 배우는 것은 이렇게 밑에서 위를 쳐다보므로 배우게 됩니다.
아마추어 화가는 자기가 그린 그림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해서 자신이 그린 그림 앞에서 어깨가 으쓱해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 아마추어 화가를 한시간 동안만 헌트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대가들의 작품 앞에 세워 보십시오. 그러면 자만심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자랑하고 교만하기는커녕 더욱 더 노력해야겠다는 새로운 의욕이 불타게 될 것입니다.
신예 시인은 자기가 쓴 몇 줄의 시 때문에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교만한 마음을 품을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천재성을 과시하고 싶은 충동마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예 시인에게 호머나 밀톤이나 단체 그리고 셰익스피어 같은 이에게 돌아가라 해보세요. 그러면 자신을 부추기고 싶은 유혹은 금방 사라질 것입니다.
음악가가 베토벤이나 바하, 슈베르트나 헨델의 음악을 다시 듣기 전까지는 공연한 자기 과시를 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 자신이 우리 스스로를 높이 평가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이 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틴루터나 성 후랜시스나 성 어거스틴, 성 모욜라, 요한웨슬레, 데이비드 리빙스턴, 알버트 슈바이쳐 같은 이 더구나 우리 앞에서 서 계시며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스스로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설교가 필립 부룩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겸손해지는 지정한 길은 어떤 높은 인격을 가진 분 앞에서 자신의 참 높이를 깨닫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참된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넓히고 높이는 결과가 됩니다.
덴마크의 코펜하겐에 한 교회에는 스왈슨이란 조각가가 만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시는 모습의 예수님의 동상이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동상 앞에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뭐 그렇게 유명한 동상이라고 해서 와 봤더니 별 것 아니구먼"하며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실망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 동상을 잘 알고 있는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서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가까이 다가가서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올려다보셔야 그리스도의 얼굴이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는 주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릎을 끓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요한번연이 쓴 불후의 명작 '천로역정'에 나오는 목동 소년들만큼 겸손에 대하여 잘 표현한 이들이 없습니다.
밑에 있는 사람은 떨어질 염려가 없고
천한 사람은 교만할 이유가 없고
겸손한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을 안내자로 삼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작은 태도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사회에서도 성공하는 길 중에 특히 대인관계에서 예의 바르고, 절도 있고, 바른 몸가짐을 갖는 것은 아주 작은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신사답고 숙녀다운 행동과 인품을 갖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의바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의바른 행동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삼에도 축복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예의 바르게 살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고대로 우리 한국을 '동방예의지국'이라 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공적인 자리에서는 예의를 지키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우리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무례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예의바르게 대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예의 바르게 대해야 합니다.

내가 생활하는 가운데 상대방에게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점을 찾아보세요. 그리고 그것을 고치도록 힘쓰세요. 아주 작은 내 습성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에 부담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구나, 사랑은 자기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도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빅톨 유고의 '아흔 셋'이란 작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불란서 혁명 후 어떤 어머니가 두 자녀와 함께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이 부인은 며칠 동안을 산 속과 들판을 헤매었습니다. 부인과 아들은 나무뿌리와 풀잎을 먹으면서 연명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군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이들은 덩굴 속에 숨었습니다. 군인 상사는 덩굴 속에 인기척이 나는 것 같으니 수색해 보라고 병사에게 명령했습니다. 한참 후에 어머니와 아이들이 끌려 나왔습니다. 군인 상사는 그들을 보는 순간 아사 직전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상사는 너무 측은해서 긴 불란서 빵 한 덩이를 어머니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린 이리처럼 그 빵을 얼른 받아 두 조각으로 나누더니 한 덩이는 큰 아이에게 주고 또한 덩어리는 둘째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군인상사가 투덜거리며 말했습니다. "애 어머니 자기는 안 먹는 구나" 그 옆에 있던 사병이 "배가 안고픈 가보죠?" 그때 군인상사가 하는 말이 "아니다. 어머니라서 그렇지"
지난주 "어머니날 TV 프로"에서 이런 사연을 보았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아들이 범사에 짜증을 내고 불평하고 실망 속에서 좌절합니다. 어머니는 아무리 좋은 말로 아들을 위로해 주려 해도 아들은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가 아들에게 "얘야, 어떤 여자가 네게 눈 하나를 기증하겠단다" 그래도 이 아들은 한문만 보아서 무엇 하느냐고 짜증냅니다. 어머니의 간곡한 천고로 앞을 보지 못하는 이 아들이 병원에 가서 한 눈을 수술 받게 되었습니다. 치료기간이 끝나 수술은 성공적이 되어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감격은 무엇으로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내가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머니도 볼 수 있습니다'하고 소리치며 목소리로만 듣던 어머니를 보게 되는 감격 한 순간 어머니의 눈 하나가 바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항상 주려하고 또한 줄 것이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 사였던 디.엘.무디가 설교를 끝내고 내려 왔는데 어떤 사람이 찾아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디 선생, 선생이 한 설교 중에 문법이 열 한군데나 틀렸어요" 이 말을 듣고 있던 무디는 잃게 대답했습니다. "아마 그랬을 겁니다. 선생께서 아시겠지만 저는 제대로 기초 교육을 못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학교 공부를 좀더 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아는 문법을 총 동원해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누구에게나 결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지 않는 변명의 구실로 이 결점을 이용할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앉은뱅이 거지가 성전 문 앞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에게 구경하는 것을 보고 "내게 금과 은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라"하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했습니다. 베드로는 주고 싶어했고 주지 않을 구실을 찾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동지의식을 보여 준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사랑을 준 결과 이 이야기는 거지가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말했습니다. 없는 것만 찾지 말고, 내게 있는 것으로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끝으로,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 감정을 조절 할 줄 압니다. 앞서 말씀한 탕자는 비난받아 마땅한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문제는 그의 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방탕했던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 왔을 때 "그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했다"고 말씀했습니다. 형이 왜 동생이 잘못된 길을 걷다가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께 돌아 왔는데 집에 들어가기를 기뻐하지 아니했습니까? 형에게는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한 말을 주의해 보세요.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내 벗으로 즐기게 한 일이 없더니" 아들이 돌아와 기뻐하는 아버지에게 불평을 하면서 그는 동생을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부드럽게 이것을 고쳐 주셨습니다. 뭐라고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이 네 동생"이라고, 그런데도 형은 이 사랑의 관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시비 섞인 분노뿐이었습니다. 사실 버려진 아들은 동생이 아니라 형이었습니다.

성경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 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랑은 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사랑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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