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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를 찾으라 / 암 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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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여호와를 찾으라 (11/3)

본 문 아모스 5:4-6

설교자 박봉수 목사 (상도중앙교회)



아모스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던 선지자입니다.
아모스라는 이름의 뜻은 “무거운 짐을 진 자”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의 뜻 그대로 아모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다는 것은 정말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7:14-6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그는 원래 드고아라는 촌에서 양을 치던 목자고, 그나마 뽕나무까지 길러야만 했던 가난한 농부였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급작스런 부르심을 받아 말씀을 외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모스는 선지가가 되는 정규 코스를 밟지 않았습니다. 마치 어부였던 베드로가 주님의 수제자로 발탁된 것처럼 뜻밖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쫓겨났습니다. 외면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아모스에게는 견디기 힘든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이 아모스의 무거운 짐에서 하나님의 더 무거운 마음의 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북왕국에 수많은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인정받던 선지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들 대신 들에서 양을 치고 뽕나무를 배양하던 아모스를 택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점점 심각한 죄 가운데 빠져들었고, 이제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1:2를 보면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는다는 말은 원어성경에서 ga'v(shaag)이라는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은 사자가 먹이를 잡으려 달려들며 포효하는 동작을 묘사할 때 쓰는 말이다. 이런 뜻을 살려서 현대어 성경에서는 이 암 1:2를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산 위에서부터 마치 굴속에서 나오는 무서운 사자처럼 부르짖으셨다.”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 하나님의 찢어지는 심정, 하나님의 울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안타까움의 근본 원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실종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세우 놓은 선지자들은 마치 고장난 축음기처럼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아모스 선지자는 8:11에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그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기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자기 뜻대로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마치 가뭄에 타들어 가는 논바닥을 보며 농부의 마음도 타들어 갔던 것처럼 저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타들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합니까? 오늘도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시고 계십니까? 아니면 아모스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기갈 상태에 있지는 않습니까?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채 내 뜻대로 매 멋대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안타깝게 해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스라엘의 죄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기갈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죄 한 가지가 지적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죄가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죄였습니다.

5절을 보면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찾던 곳이 벧엘과 길갈과 브엘세바였는데 이곳에서 드리는 제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조금 더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남북왕국이 나뉜 후에 북왕국 이스라엘 사람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제사드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북왕국 정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을 대체할 제사 처소를 세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제일 먼저 세웠던 것이 벧엘입니다. 벧엘은 야곱이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가던 일종의 민족적 성지였습니다. 북왕국 여로보암 1세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항하기 위해 이곳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 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 대신 이곳에서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교적 중심지로 또 하나 선택했던 곳이 길갈입니다.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 요단 강 바닥에서 가져온 돌을 쌓고 첫 번째 제사를 드린 곳이고, 이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가나안 정복을 이루어 냈던 매우 역사적으로 뜻깊은 장소였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전을 대체할 또 하나의 종교적 성지로 발굴하여 이곳에서 제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브엘세바입니다. 이 브엘세바는 뜻밖의 곳입니다. 왜냐하면 이 곳은 남왕국 영토 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브엘세바는 그 옛날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제단을 쌓았던 곳입니다. 그리고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 만나주셨던 곳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은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너무도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북왕국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대항할 또 하나의 성지로 자기들의 조상들이 하나님께 제사하던 이 곳을 찾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대항해서 하나님께 제사할 곳을 찾았지만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런 곳에서 드리는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왕상 9:3에 보면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이곳에서만 제사를 받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벧엘이니, 길갈이니, 브엘세바니 하는 곳들은 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편의를 따라 정한 곳일 뿐입니다.

요사이 주 5일 근무제가 거론되면서 발빠른 교회들이 이에 대응한다고 독특한 발상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선 토요일 또는 금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이틀 동안 주말을 즐기라는 편리한 발상입니다. 이들의 논점은 어쨌든 예배만 잘 드리게 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여행지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관악산에 가보면 주일마다 예배드리는 교회 아닌 교회가 있답니다.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그 이후 시간에는 산에서 즐기라는 것입니다. 아예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보다 이렇게 라도 예배를 드리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는 궁색한 발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과연 이런 예배를 받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배 드렸다는 자기 위안은 될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일 것이냐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만족을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실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내가 예배에 나와서 영적인 만족을 얻고, 은혜를 받고, 새 힘을 얻고... 이런 것들은 예배의 부차적인 목적이지 결코 우선적인 목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둘째, 우상숭배가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벧엘이나 길갈이나 브엘세바까지 찾아가서 제사를 드려보지만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니 그 예배가 산 제사가 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니 그 예배는 영적인 감격도 하나님과의 만남도 없는 껍데기만 남은 형식적인 예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형식적인 제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영이 병들게 되고 저들의 신앙이 무너지면서 그 자리는 우상 숭배의 자리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호 4:15를 보면 하나님의 집이라는 이름의 벧엘이 나중에 우상의 집이라는 벧 아웬이라고 고쳐 불려지고 있는 점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조상 때부터 하나님을 만나던 거룩한 자리가 이제 우상을 숭배하는 자리가 되고 만 것입니다.



루이 14세 때 있었던 실화입니다. 프넬론이라는 대주교가 시무하는 교회에 주일이면 왕과 가족들이 그리고 왕족들이 빠지지 않고 출석을 했답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너무 많은 교인들이 몰려와서 주체할 수가 없었답니다. 대주교의 마음에 ‘과연 이들이 참 예배를 드리는 참 교인인가?’라는 의심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시험을 해 보았답니다. 주보에 ‘다음 주일에 왕이 못 나오십니다’라고 광고를 했답니다. 다음 주일 왕과 그 왕족들이 교회에 와보니 교회가 텅 비었더랍니다. 그저 대주교만 왕을 맞더랍니다.



진정한 예배는 교회만 찾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사람들만 만나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살 길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길을 제시해 주고 계십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6절에 다시 반복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길은 딱 한 가지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호와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히브리어 원어 성경을 보면 vr"D:(darash)라는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은 크게 두 가지 어원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밟다, 자주 가다, 따르다라는 뜻입니다. 마치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 열심히 현장을 쫓아다니고 그 현장에 자주 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은 여호와 앞에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갈고 닦는다는 뜻입니다.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 땀 흘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은 여호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땀 흘리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은 일단 여호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몸이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 예배 현장에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마음이 내 중심이 여호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기도라는 형식이 됐든, 예배라는 형식이 됐든, 찬양이라는 형식이 됐든 상관없이 내 마음이, 내 심령이 여호와를 만나기 위해 여호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왕하 18:5-6장을 보면 그에 대한 평가가 기록되어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한 마디로 여호와와 연합한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나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여호와와 연합했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이런 평가가 나왔는가 궁금했습니다. 그렇다고 히스기야가 다른 일 하지 않고 신앙생활로만 소일한 것은 아닙니다. 왕이었기에 정사를 보아야 했고, 가족을 돌봐야 했고, 자기 개인의 생활도 즐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호와와 연합했다는 평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 평을 받은 단서를 몇 가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1을 보면 “히스기야 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라고 말씀했습니다. 앗수르가 침공했다는 황급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때 저가 보인 태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즉시로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하나님의 성전으로 달려갔습니다.

왕하 20:2를 보면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죽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히스기야는 바로 벽을 향해 낯을 돌리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몸이 불편해 성전으로 나가지는 못했지만...

바로 이것입니다. 히스기야는 늘 그 마음이 여호와께 가 있었습니다. 문제만 생기면 제일 먼저 여호와께 달려갔습니다. 여호와께 의논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마치 우리 눈이 외부로부터 무슨 자극이 오면 반사적으로 눈을 감아버리듯이 히스기야는 무슨 문제만 생기면 반사적으로 여호와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결국 살았습니다. 앗수르로부터 나라도 구했습니다. 죽을 목숨도 건져서 15년이나 더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살길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여호와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 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호와께 나아가되 얼마나 빨리 나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히스기야처럼 반사적으로 나아갈 때 즉시 살 길이 열립니다. 하다 하다 안 돼서 마지막으로 나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고생고생 다 하고 나중에 살길을 겨우 찾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경기도 양지에 가면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이 있습니다. 진입로에 초대교회의 교부 터툴리안의 저 유명한 글귀가 바위에 새겨져있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니라” 기념관 정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두 그림이 아래위로 나란히 결려져 있습니다. 아래는 1866년 평양 대동강변에서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이 땅에 최초로 들어온 선교사 토마스 목사의 순교 장면을 그려놓은 그림이 걸려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위에는 한국 기독교 100주년 선교대회 100만 명이 집회하는 사진이 걸려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씨앗이 되어 100년 만에 1천만 성도를 자랑하는 그래서 100만 명이 집회하는 거대한 교회로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부흥과 가문의 번성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축복은 맨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거룩한 씨앗이 심겨질 때만 가능합니다. 거룩한 씨앗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하여 놀라운 축복의 열매를 맺습니다.

훌륭한 목사님들의 과거를 조사해 보면 예외 없이 거룩한 씨앗을 심었던 일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눈물의 기도로 거룩한 씨앗을 심었다든지, 본인이 하나님을 감동시킬 봉사와 헌신으로 거룩한 씨앗을 심었습니다.

크게 부흥한 교회들을 조사해 보면 예외 없이 주의 종들과 교인들이 거룩한 씨앗을 심었던 일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큰 기업과 가문을 조사해 보면 예외 없이 선조 때부터 거룩한 씨앗을 심어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의 미래를 위해, 우리의 자손들을 위해 오늘 거룩한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눈물의 기도, 피의 헌신, 땀의 봉사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복된 삶을 사는 것이 과거의 씨앗의 열매라면 우리의 미래와 자손들의 앞날은 오늘 우리가 심는 거룩한 씨앗의 열매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살길이 여기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를 푸는 길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하나님 앞에 크게 복 받는 비결도 여기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를 찾는 것입니다.

# 기도/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케 하옵소서.

          힘을 다해서 여호와를 찾게 하옵소서.

          여호와 앞에 나아가게 하옵시고, 여호와의 마음을 얻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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