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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먼저 변해야 / 창 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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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종교개혁주일] 내가 먼저 변해야

본 문 창 4:7-12

설교자 박봉수 목사 (상도중앙교회)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독일의 비텐베르그 교회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든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이 종교개혁주일은 단지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데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교회의 문제를 돌아보고, 교회를 새롭게 하고자 다짐하고, 나아가 구체적으로 교회의 개혁을 실천하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여러 분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개혁을 외쳐왔습니다. 예를 들어 정치권만 보더라도 지난 문민정부가 출범할 때 온통 구호는 개혁 일변도였습니다. 5년 동안 개혁을 외쳤지만 다음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자 또 개혁을 외쳐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국민의 정부 역시 5년 동안 개혁을 외쳐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면 마찬가지로 개혁을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이렇게 개혁의 필요성을 공감하면서 그렇게 강하게 개혁을 외쳤는데도 개혁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한 마디로 자기 개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개혁을 한다고 칼자루를 쥔 사람들이 자기 개혁은 하지 않고 남들에게만 개혁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개혁하던 사람들이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되면서 그 개혁하자는 구호는 허공을 치는 메아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공감했던 사람들 중에서 종교개혁을 외쳤던 사람들 중에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성공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루터의 종교개혁은 바로 자기 개혁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루터는 비텐베르그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면서 그렇게 거대한 종교개혁으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는 단지 토론해 보자고 신학적 논제를 열거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진지한 자기 개혁을 이룬 한 의인에 의해 제기되자 놀라운 폭발력을 내게 된 것입니다.

루터는 자기 안에 있는 죄 문제 때문에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보기 위해 당시 로마 천주교가 제시하는 갖가지 방법들을 다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1513년 어느 날 비텐베르그 교수 연구실 탑 골방에서 시편 강의를 준비하던 중에 일생일대의 회심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 때 그가 롬 1:17을 묵상하게 됐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인가 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 죄 문제를 해결할 길이 오직 믿음뿐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루터는 이 때의 심정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성경을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게 됐다. 기쁨이 찾아왔다. 새롭게 태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내가 활짝 열린 성문을 통해서 천국으로 들어간 듯했다. 순식간에 성경 전체가 다른 얼굴로 내게 다가섰다." 이 사건이 루터를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종교개혁은 이렇게 변화된 한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 루터에 의해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개혁은 바로 나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교육개혁을 아무리 외쳐도 학생과 학부모가 변하지 않으면 아무런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정치 개혁을 아무리 외쳐도 정치인 한 사람 한 사람, 유권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사회 개혁을 아무리 외쳐도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식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역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특히 내가 변해야 합니다. 내가 변해야 교회가 변합니다. 내가 변해야 가정도 변하고, 사회도 변하고, 나라도 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먼저 변해야 합니다. 자기 개혁이 성공해야 가정 개혁도, 교회 개혁도, 나라와 민족 개혁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개혁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꼭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변해야 하는데 변하지 않은 한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가인입니다.
그는 신앙생활에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예배를 거절하실 정도로 영적인 삶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예배도 드립니다. 기도도 합니다. 헌금도 합니다. 봉사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늘 자신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든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지금의 모든 문제는 다 동생 아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너그럽지 않으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더 큰 죄를 짓습니다. 자기 동생을 죽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십니다. 이 때라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기를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문제가 무엇인지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멸망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치매 증상 가운데 이런 것들이 있답니다. 집에다가 전화한다고 하구선 친구에게 전화해서 "어? 너 왜 거기 있니?" 하고 따져 묻는답니다! 그리고 미안해~! 하고 또 그 친구에게 걸어서는 어...너 아직도 거기 있니??

비디오를 빌려다 봅니다. 중간쯤 보면 내가 생각했던 각본대로 그대로 만들어져 갑니다. 그리고 흐뭇해합니다. '역시 난 작가적 소질이 있어~!' 그 때 아내가 바가지를 긁는답니다. 여보 이거 또 봐! 벌써 5번째야.
어느 날부터 남편이 갑자기 아내에게 잘한답니다. 전에 안 하던 짓을 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 아내가 다른 여자인줄 알았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다보면 도대체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면서 그것이 그렇게 심각한 줄을 모릅니다.
이것이 가인이 갔던 길입니다.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저만치 멀리 떨어져 나왔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이것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냥꾼이 어미를 잃어버린 새끼 사자 두 마리를 잡았습니다. 집에서 염소와 함께 길렀습니다. 염소의 젖을 먹으면서 염소 흉내를 내며 살았습니다. 점차 사자의 야성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잃어버린 새끼들을 찾아 헤매던 어미 사자가 사냥꾼의 집 가까운 들판에서 울부짖으며 소리쳤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새끼 사자들은 그동안 잃어버렸던 본성을 되찾고 그 길로 염소 우리를 박차고 어미 사자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사람들은 이 일을 빗대어 사람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는 소리를 '사자후'라고 부릅니다.

우리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사자후를 토하셨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 사자후를 듣고 깨닫고 주님께로 나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들이 새사람이 됐고, 저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자후를 듣고도 여전히 옛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여전히 세상 욕망을 따라 살고, 죄의 종노릇하며 살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았습니다. 저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자기 개혁을 이루려면 깨달아야 합니다. 시 49:20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 '이래서는 안되는 데...!' 양심의 고발을 받고 있지는 않은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았는지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씀에 붙들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두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7절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가인의 죄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8절을 보면 "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 다시금 가인의 죄를 지적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 말씀을 마음에 담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고 말았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대업을 이루는 과정에는 정말 수많은 난관이 있었습니다. 여러 차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끝내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 모진 박해와 난관을 뚫고 루터로 하여금 종교개혁을 이루어 낼 수 있게 했을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521년 종교개혁의 위업을 이루다가 체포되어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심문을 받게 되는데 그가 최후의 진술을 이렇게 했습니다. "나는 성경의 증거와 분명한 설명이 없이는 교황이나 공의회를 믿지 않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혔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포로입니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을 철회할 수 없습니다. 아니 철회하지 않겠습니다."

루터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로 하여금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의 갈 길을 인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개혁을 이루려면 말씀에 붙들려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 심령에 채워질 때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인도할 때 우리가 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경험이 앞장을 서게 되면 결국은 넘어지게 됩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대성 그룹 김영대 회장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이분이 믿음의 가정에서 자랐지만 긴 세월 자기 뜻대로 살았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 법대 출신인데다가 여러 가지 사업을 할 때마다 다 성공하게 되니까 정말 보이는 것이 없더랍니다.

그러다가 사업 상 큰 시련을 만나서 인생의 중대한 위기를 만났답니다. 도저히 길이 없더랍니다. 그러던 중에 미국 뉴욕주의 시라큐스에 잠시 머무르던 중에 한 교회에 참석해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답니다. 그 때 바로 주관준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하고 계셨는데, 설교 중에 '문을 두드리라 반드시 열릴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자기 심령에 큰 감동을 주었답니다.

그래서 호텔 방에서 그 말씀 의지해서 눈물로 기도를 시작하게 됐답니다. 실로 40년 만에 나이 50이 돼서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 기적처럼 그 사업상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셨답니다.

그 이후로 매사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사업도 하고 주의 일도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분을 만나면 예배드리자고 하시고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하시고... 제 인상도 이 분은 말씀에 붙들려있는 분이시구나 그런 생각에 깊은 존경심이 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말씀에 붙들려 살아야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하고, 그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자기 개혁을 이루려면 말씀이 내 심령 속에 가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심령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경건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줍니다.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했고, 그 말씀을 마음에 담아두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세상으로 도망치듯이 쫓겨가게 됩니다. 두려워 떨며 세상으로 쫓겨가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 한 복판에서 믿음 생활하려면 때로는 두려운 일도 많습니다. 그래도 철저하게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흔들리지 말고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대업을 이루어 가는 동안 여러 차례 위기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종교재판에 불려가서 심문을 받기 전날 밤이었습니다. 낙심하여 크게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그의 아내 카타리나가 검은 상복을 입고 루터 앞에 나타났습니다. "여보 이게 웬일이요? 누가 죽기라도 했소" 아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하나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루터가 놀라서 되물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돌아가실 수가 있단 말이요 말 같지 않은 말을 하지 마시오" 아내가 다시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당신이 그렇게 낙심할 수 있단 말입니까?"

루터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내 믿음이 죽은 것이다..." 새롭게 용기를 내서 당당하게 종교재판석 상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찰스 5세가 제국회의를 소집하고 루터를 소환했습니다. 분명히 이번에 소환돼 가면 다시 돌아오기 힘든 길이었습니다. 친구들이 가지 말라고 만류했습니다. 그 때 루터는 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갑니다. 가면서 남긴 말이 너무도 유명해서 오늘까지 두고두고 남겨져있습니다. " 그 보름스 회의 건물의 기왓장처럼 마귀가 많더라도 나는 가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 살다보면 믿음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유혹도 많고 시험도 많습니다. 고난도 있고 박해도 있습니다. 마치 바람 부는 벌판에 불붙여진 양초를 들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용기 있게 믿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저는 지지난 주 순교지를 탐방하다가 정말 큰 충격과 감동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특별히 전남 영광군 야월교회의 순교 이야기를 접하면서 정말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공산당 잔당들이 지리산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이곳 저곳으로 흩어졌는데 그 중에 일부가 당시 공산당 거물 김삼룡이 암약하던 이 지역으로 도망해 오게 됩니다. 이 때 기독교인들이 저들을 앞장서서 반대하자 박해를 가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야월교회는 교인이 65명이었는데 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전교인이 처참하게 저들에게 순교를 당했습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상 전교인이 함께 순교를 당한 경우는 이 교회가 유일한 케이스입니다.

공산당이 돌을 목에 메게 하고는 바다에 빠뜨렸습니다. 그 때 한 여집사가 어린 아이를 안고 바다에 빠뜨려졌습니다. 밀물 때라서 물이 차옵니다. 아이가 보챕니다. 엄마 추워! 엄마 숨쉴 수가 없어... 그 때 이 여집사가 아이에게 말합니다. 조금만 더 참자 조금만 있으면 주님을 만날 수 있어. 장 집사라는 젊은 집사는 물이 차 오르자 찬송을 부릅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지금이라도 예수를 부인하면 살 수 있는데 끝까지 주님 만날 것을 소망하면서, 찬송하면서 순교의 잔을 마셨습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킨 것입니다.

이분들이 목사도 아닙니다. 장로도 아니었습니다. 평신도였고, 서리집사였습니다. 아무런 직분도 없던 어린 아이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저들이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장렬하게 순교의 잔을 마실 수 있었을까요? 바로 이것이 순교 신앙입니다.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자신있게 대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오늘 제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조그만 바람에도 갈대처럼 흔들리는 제 믿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조그만 어려움이 닥쳐도 쉽게 타협하는 제 믿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우리가 자기 개혁을 이루려면 믿음을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순교 신앙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우리가 부단히 자기 개혁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이 더욱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늘 깨달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에 붙잡혀야 하겠습니다. 순교 신앙으로 철저히 믿음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 기도/
믿음이 새로워지게 하옵소서. 깨달음이 있게 하시고,
말씀에 붙잡혀 살게 하시고, 철저히 믿음을 지키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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