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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독교 윤리의 기본 원리 / 마 5: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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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기독교 윤리의 기본 원리
본 문 : 마 5:38-42
설교 : 박봉수 목사 (상도중앙교회)



사람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공동체 안에 태어나 공동체 안에서 살다가 공동체 안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한문에서는 이런 사람의 사회적 특성을 생각해서 사람을 인간(人間)이라고 했습니다. 사람 인(人)과 사이 간(間) 즉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사람다움은 바로 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결정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자기의 도리를 다하는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규범을 성실히 잘 지키는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답지 못한 사람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자기의 도리와 규범을 윤리라고 부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공동체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다움 역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결정됩니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 지켜야 할 규범을 잘 지킬 때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자기의 도리와 규범을 우리는 기독교 윤리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 안에서 기독교 윤리의 기본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도리와 규범의 기본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자기의 도리와 규범을 지키라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38절에 나오는 법입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법입니다. 이 법은 '렉스 탈리오니스'(Lex Talionis) 즉 동해 보상법이라고 알려진 법입니다. 동일한 대가로 보상을 하라는 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39절 이하에 나오는 법입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오리로 가게 하거든 십리를 동행하고..." 이 법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의 법입니다. 사랑으로 도와주라는 법입니다.
이 두 법을 비교해 보면 너무도 달라서 상충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동해 보상법을 버리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의 법을 따라야 할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먼저 동해 보상법을 살펴보겠습니다. 38절 말씀의 원문인구약성경의 내용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출 21:2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 지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누구에게 주신 말씀입니까? 벌금을 낼 사람이 누구며 동해 보상법으로 갚아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가해자입니다. 그러니까 남에게 피해를 입혔으면 반드시 걸맞는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의 법을 살펴보겠습니다. 누구에게 주신 말씀입니까? 뺨을 맞은 사람, 송사를 당한 사람, 강요를 당한 사람, 도움을 청한 사람 즉 피해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피해자는 가해자를 사랑으로 용서하고 도와달라고 청을 받았으면 사랑으로 도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가해자가 지켜야 할 도리가 있고 피해자가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법은 상충되어 둘 중에 하나를 택할 것이 아니고 상호 보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동해 보상법은 가해자가 지켜가야 할 법인데 비해, 사랑의 법은 피해자가 지켜가야 할 법이라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교회생활을 잘하는 부부가 부부싸움을 합니다.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부싸움하면서도 말씀대로 합니다.
남편이 먼저 시비를 겁니다.

"여보 분명히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말씀했는데 당신은 왜 사사건건 남편 말에 토를 달고 대들고 반대하느냐고?"

아내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그러는 당신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말씀하셨는데 자기 밖에 모르고 그렇게 이기적이냐고?"

이 부부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말씀을 거꾸로 적용한 것입니다. 남편은 남편이 들어야 할 말씀은 듣지 않고 아내가 들어야 할 말씀만을 붙잡고 시비를 걸고 있고, 반대로 아내는 아내가 들어야 할 말씀은 듣지 않고 남편이 들어야 할 말씀만을 붙잡고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남편이 자기가 들어야 할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만 하면, 아내도 자기가 들어야 할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만 하면 이 부부는 행복한 부부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거꾸로 말씀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둘이서 말다툼을 하게 됐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한 사람이 상대방 뺨을 때리게 됐습니다. 싸움이 커졌습니다. 그 때 서로 말씀을 들이대며 시비를 겁니다.
뺨을 때린 사람이 말합니다. "당신 오른 뺨을 맞았으니까 이제 왼 뺨을 내어 놓이시오. 성경에 오른 뺨을 맞았으면 왼 뺨을 대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뺨을 맞은 사람이 말합니다. "무슨 소리요 내가 오른 뺨을 맞았으니 당신도 오른 뺨을 내어 놓이시오. 성경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 말처럼 오른 뺨에는 오른 뺨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 윤리의 기본 원리는 자기의 도리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가해를 입혔으면 반드시 보상을 하고, 피해를 입었으면 용서하고... 가해를 입힌 사람이 상대방에게 용서를 강요한다든지, 피해를 입은 사람이 상대방의 보상을 강요하는 것은 세상의 윤리일지 모르지만 기독교 윤리는 아닌 것입니다.

2. 악을 선으로 이기라
39절 이하를 보면 악한 자를 만나서 피해를 보았을 때 대처하는 구체적인 사례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뺨을 맞았을 때입니다.
본문을 보면 악한 자에게 오른 편 뺨을 맞았다고 했습니다. 악한 자는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든 가족들 앞에서든 가리지 않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으며 뺨을 후려쳤을 것입니다.

게다가 오른 편 뺨을 맞았습니다. 보편적으로 뺨을 맞을 때 왼편 뺨을 맞게 되어있습니다. 오른 편 뺨을 맞게 될 때는 두 가지 경우입니다. 하나는 때리는 사람이 왼 손잡이일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른 손잡이가 손바닥이 아닌 손등으로 때린 경우입니다. 일반적인 경우를 상정해 볼 때 손등으로 뺨을 맞았을 확률이 큽니다.

악한 자에게 그것도 손등으로 뺨을 맞았습니다. 이것은 맞은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모욕과 수치를 당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이럴 때 다른 편 뺨 그러니까 왼편 뺨도 돌려 대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서서 싸우거나 피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또 때리더라도 가만히 맞아 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때론 너무도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모욕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이 때가 중요합니다.

사 53:7을 보면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는 모습을 예언해 놓은 것입니다.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모욕과 수치를 당하시면서도 너무도 억울한 일을 당하시면서도 마음의 평정심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전혀 흐트러짐이 없으셨습니다.

이것입니다. 우리가 모욕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입을 다물고 흐트러짐이 없이 그 모욕과 수치를 다 당할 때 악을 선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이 때 입을 열고 변명하고 억울함을 호소해 봐야 똑 같은 사람으로 치부되면서 악에게 지고 맙니다.

둘째, 송사를 당했을 때입니다.
악한 자가 소송을 걸어서 속옷을 빼앗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속옷이 무엇입니까? 겉옷 안에 받쳐있는 옷을 말합니다. 흔히 under wear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남성용으로 말할 때 런닝, 팬티, 내복 같은 것들입니다. 옛날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속옷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속옷 한 벌 빼앗자고 소송을 걸고 재판을 걸어온 것입니다. 이 얼마나 치사한 일입니까? 이렇게 치사한 일을 당했을 때 일일이 대응하지 말고 차라리 요구하지 않은 겉옷까지 다 내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창 26장을 보면 이삭이 우물 문제로 그랄 사람들과 다툼을 벌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삭이 우물을 파면 물이 나오는데 그 때 그랄 사람들이 자기 우물이라고 생떼를 씁니다. 이삭이 싸우지 않고 그냥 주고 물러납니다. 다른 곳에서 또 우물을 팠는데 또 쫓아와서 그 우물도 자기들 것이라고 생떼를 씁니다. 또 물러났습니다. 다른 곳에 가서 우물을 팠는데 또 물이 나옵니다. 이번에는 저들이 물러섰습니다. 다음에 또 다른 곳에서 우물을 팠습니다. 이번에는 아비멜렉의 종들이 와서 시비를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막아주셨습니다. 그 우물이 풍성해서 거기서 큰복을 누렸습니다. 바로 이 우물이 브엘세바입니다.

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때로는 치사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 억지를 부리고 말도 안되는 강짜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때 시시비비를 가리겠다고 휘말리면 똑같은 사람이 됩니다. 그럴 때 그냥 하자는 대로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브엘세바의 축복으로 해결해 주십니다. 이것이 악을 선으로 이기는 길입니다.

셋째, 오리를 가지고 강요받았을 때입니다.
본문을 보면 악한 자가 와서 부당하게 오리를 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골고다로 올라가실 때 구레네 시몬이 로마 군병에게 억지로 주님 대신 십자가를 지게 했던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생각해 보면 내게 오리를 가야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내가 가야 하는지 타당한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평하고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럴 때 십리까지도 가 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부당한 의무를 강요받을 때가 있습니다. 꼭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이고,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의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억울하고 속이 상합니다. 이 때가 중요합니다.

주님은 이럴 때 우리가 남을 위해 봉사할 특권을 가졌다고 생각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강제된 상황이라기 보다는 봉사할 기회요 오히려 섬길 수 있는 특권을 받은 것이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악을 선으로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3. 사랑을 베풀라
42절을 보면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우리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온 사람들을 만났을 경우입니다.

여기서 먼저 네게 구하는 자와 네게 꾸고자 하는 자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내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큰 어려움을 겪게 될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내 도움으로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도움을 구하는 양상이 달라졌습니다. 불특정 다수에게 도움을 구하는 일들이 생겨났습니다. 도움 구하는 일이 하나의 직업화되는 현상이 생겨났습니다.

예를 들면 지하철을 타러 가다보면 출입구에 도움을 구하는 분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분들은 거의 매일 만나게 됩니다. 외면하고 지날 때 오늘 본문 말씀이 무겁게 마음을 누릅니다.
또 저 같은 경우 도움을 청하는 편지와 E-mail을 셀 수 없이 많이 받습니다. 제가 전혀 모르는 분들입니다. 읽어보면 정말 딱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진위를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알고 보면 제게만 보낸 게 아니고 때론 전국 중견교회 목회자에게 다 보냈습니다. 모른 척 하자니 본문 말씀이 무겁게 마음을 누릅니다.

이런 일들을 겪다보면 시대적인 흐름이 이렇다고 핑계를 대면서 도움을 청하는 손길을 외면하고 모른 척하는 일에 익숙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자비를 베푸는 일에 마음이 굳게 닫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정말 큰 문제입니다.
우리가 거절하지 않기 위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도움을 청하는 모든 사람을 다 도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돕는 일을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도와야 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도우라고 보내신 사람인지 여부를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선을 구하는 사람들을 보면 많은 경우 악기 연주를 하는데 대부분 찬송가를 부르곤 합니다. 이 때 찬송가를 부르면 몇 푼 적선을 하고, 다른 노래를 부르면 적선을 하지 않고 이런 식이면 곤란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도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도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시고...

둘째, 사랑의 의지를 키워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에 빠진다고 표현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정이 생겨나고 그 정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나도 몰래 저절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연애 중인 남녀 사이에 이런 일들이 생겨납니다. 가족들과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이런 일들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일들입니다. 이런 사랑을 에로스나 필레오 또는 스토르게 라고 대상에 따라 다르게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베풀어야 하는 대상에게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 속에서 정이 솟구쳐 오르고 돕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불 일 듯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지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의지로 사랑하는 사랑을 아가페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내게 도우라고 보내신 사람들에게 의지적인 사랑의 손길을 펴서 돕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도리와 규범이 있습니다. 즉 기독교 윤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 기독교 윤리의 기본 원리 몇 가지를 제시해 줍니다.
우선 자기의 도리를 지켜야 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입혔으면 반드시 용서를 구하고, 적절히 보상을 해야 합니다. 또한 남에게 피해를 입었으면 이해하고 용서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그리고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합니다. 악한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억울한 일, 부당한 일, 기막힌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가야 합니다.
다음으로 이웃을 도우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펴며 살아야 합니다.

기도/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마땅해 해야 할 도리와 규범을 지키며 살게 하옵소서.
    악을 선으로 이기게 하옵소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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