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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이웃 /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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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참된 이웃
본 문 : 누가복음 10:25-37
설 교 : 김형준 목사 (동안교회)
 
 
제가 목회를 시작할 즈음, 당시 목회자에게 구두를 맞춰 주는 유행이 있었습니다. 전도사 때 어떤 집사님이 구두를 맞춰 주겠다고 저를 교회 앞에 있는 구둣방에 데리고 갔습니다. 옛날 구두는 신으면 요즘 구두처럼 부드럽지 않아서 뒤꿈치가 몇 번 까져야 익숙해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저를 만날 때마다 구두만 보면서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맞춰준 구두를 신고 왔는지를 확인하면서 말입니다. 뒤꿈치가 까져도 집사님을 만날 때면 그 구두를 신어야만 하는 상당히 행복한 고민 속에 빠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마다 관심 분야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오셔서 함께 예배드리지만 각자 특별하게 관심을 갖는 부분이 다 다릅니다. 자기가 관심을 갖는 부분이 좋으면 교회 전체가 다 좋게 보이지만, 안 좋으면 모두 나쁘게 보이는 것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디에 가장 큰 관심을 두고 계실까요? 주님의 가장 큰 관심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주님께서 주신 계명을 통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정통한 학자와 더불어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타락한 이래로 인간들에게 끊임없이 제기 되어온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질문,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는 질문을 율법에 정통한 학자가 예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묻습니다. “율법에는 무엇이라 적혀 있느냐?” 율법 학자는 자신감을 가지고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그렇게 살아라.” 라고 하십니다. 그 때 학자에게는 이런 의문이 생겼습니다. “예수님 제가 하나님 사랑하는 것은 알겠는데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 입니까? 또 내 이웃이 누구 입니까?” 이에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 우리가 왜 이웃을 사랑해야 되는지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 몇 가지 생각해 보는 동안 메시지가 끝날 때쯤이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진실한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우리가 이웃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 중 가장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주셨습니다.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종 모세를 보내셔서 애굽땅 종 되었던 곳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탈출하고 홍해를 건너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질문하십니다. “나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애굽땅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한 나를 너희 조상이 섬겼던 것처럼 너희의 하나님으로 섬기겠느냐?” “우리 조상의 하나님을 나의 삶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졌습니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너희를 존귀하게 여길 것이며 너희는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민족이 될 것이다” 하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대신 10가지 계명, 바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 삶 속에는 노예처럼 살던 습관이 깊이 배어 있어 이 땅의 삶이 전부인 것 마냥 사는 희망이 없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을 지킬 때 하나님 백성다움이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민족임이 나타나며 왕 같은 제사장의 족속으로서 쓰임 받음이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은 누구를 위해 주신 것입니까?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이 땅의 썩어질 것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운명 가운데 하나님 백성된 삶의 원칙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0가지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크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2장 28~34절 서기관과 예수님의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30절과 31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복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많은 계명 중에서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6절과 40절에도 비슷한 대답이 나옵니다.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하는 율법사의 질문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시고 계시고,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온 율법이라 한다면 이 두 가지는 우리에게 주신 모든 율법의 요약이며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의 강령이라 한다면 구약 성경의 선지자를 통해 여러 시대, 수많은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가르치시기를 원했던 것의 핵심 되는 요점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중요한 계명이요,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싶은 하나님의 뜻이요,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기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땅에 속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하늘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크게 두 가지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 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하게 될 경우에 죄라고 받아들입니다. ‘도적질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등, 하지 말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행하기 때문에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는 것이 쉽습니다만, 성경은 그 이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죄란 하지 말라는 것을 행하는 것에 더해 해야 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동일하게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7절 말씀을 보면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나하면 죄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웃 사랑이란 계명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의 상황이 아닙니다. 계명을 이행할 때 나는 그리스도다운 모습이 되는 것이요,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가장 큰 관심을 이루어 드리게 됩니다.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할 때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이 드러날 때는 수치감이 찾아오게 됩니다. TV 뉴스에 가끔 죄를 지은 사람들이 옷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수사에 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혹여나 카메라가 가족을 비추기라도 하면 가족들도 부끄러워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얼굴을 보여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장면을 보며 사람들은 쉽게 비난하기도 하고 조롱하기도 하지만, 그들을 비난하기 이전에 오늘 우리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못했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다면 하나님 주신 가장 큰 계명을 어기고도 정작 우리는 부끄러움을 모르고 있는 무딘 마음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가끔 정치인들을 생각해 봅니다. 때로는 원망도 합니다. 조금만 더 잘해주었으면, 저렇게 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 하기도 합니다. 정치인이 없어도 나라가 돌아 갈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선민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더 돌아봐야 할 책임과 의무 보다는 자신들의 입장에 서서 술수와 모함을 만들어 내는 수많은 사건 앞에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순간 적으로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내가 조롱하고 비난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작은 계명을 어긴 저들을 향한 비난 이라면 어쩌면 내게 주어진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 하나님의 가장 큰 계명을 어기고도 내가 저들을 정죄하고 저들을 비난하고 조롱할 만한 자격이 있는가? 돌아보면서 내 삶 속에 하나님께서 기대하시고 바라보시는 일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왜 이웃을 사랑해야 됩니까? 그것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가장 기대하는 삶이기 때문 입니다.

둘째,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는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본문은 내가 생각하는 이웃과 진정 돌보아야 할 이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참된 이웃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의 이웃이 누군가 하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제 친구 중 하나는 한경직 목사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분의 성품, 습관, 사모님에 대한 이야기, 책, 좋아하는 음식 등 참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그래 너는 한경직 목사님을 아는 것 같은데 한경직 목사님은 너를 아니?” “아니 몰라. 나만 그분을 알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조차 기준만 조금 바꿔버리면 하나도 모르는 것이 되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제 친구를 모릅니다. 

우리의 이웃이 누군가 하는 기준은 지금까지 나에게 있었습니다. 사귐을 갖고, 이야기 하고, 생각을 표현하고, 함께 음식을 나누고, 더불어 활동하고 했던 다양한 이웃이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그것은 나 중심적입니다. 이웃에 대한 기준을 이렇게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강도 만난 사람에 있어 이웃은 누구인가?’ 강도 만나 곤고하고 어려운 사람이 생각할 때 내 이웃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진정 참된 이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개나 돼지 취급을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는데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 피 흘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평소 유대민족으로부터 받던 대접을 생각하며 ‘잘 됐다’하며 그냥 지나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서운함과 섭섭함을 느끼기 이전에 누군가 지금 돌보지 않으면 죽을 지도 모르는 불쌍한 사람으로 여겼고, 그를 도와줍니다. 이 사람이 바로 참된 이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하는 이웃의 개념은 무엇일까요? 내게 이익과 기쁨을 주고, 사귈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을 이웃이라 하지 않으셨고 아무 상관이 없으나 곤고하고 어려울 때 구체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참된 이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를 싫어하고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느낄 때에 나를 진정 이웃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내나 남편이 정말 여러분을 참된 이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내가 곤고할 때는 전혀 모르고 자기입장에서만 계속 이야기 하는 남편.  같이 살고 있지만 시간과 공간적으로 같이 살고 있지만 이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웃의 개념을 설명해 주실 때 몇 사람이 함께 등장합니다. 첫째, 우리에게는 강도 같은 이웃이 있습니다. 원하지 않을 때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와서는 가장 소중히 여기고 귀중히 여기는 것을 빼앗아가 버리는 강도 같은 이웃 말입니다. 

어느 행복했던 가정이 있었습니다. 가장에게 불치의 병이 찾아오면서 그 가정의 행복과 꿈은 여지없이 무너져 버립니다. 아름다운 가정이라는 꿈을 질병이 빼앗아 간 것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사업이 잘 되어 이제는 여유를 갖고 하고 싶은 다른 일들을 해 보겠다며 계획을 세웠지만, 어느 날 부도가 나고 맙니다. 가족 모두는 뿔뿔이 흩어지고 빚쟁이에게 쫓겨 다니며 매일의 양식을 걱정하며 살아야 되는 이와 같은 우리 삶의 모습들은 분명 강도를 당한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강도는 우리의 입술과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입술과 말로 다른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내고 고통을 주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자녀에게 아빠와 엄마라는 이유 때문에 나무람으로 꿈과 인격을 여지없이 짓밟아 버리고 두려움만 심어주는 부모가 될 때가 있습니다. 이는 부모라기보다는 강도된 이웃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제 비유가 좀 심했을까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강도 같은 이웃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고 그 강도가 바로 나 일수 있다는 사실을 주님은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둘째,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과 레위인 같은 이웃도 있습니다. 두 사람이 특별히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들에게는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두고 갔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제가 1부 예배시간에 임박하여 차를 몰고 오는데 앞에 어떤 차가 사고를 당해 피를 흘리며 살려달라고 손을 내젖고 한 사람을 목격했다고 가정 해봅시다.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너무 안됐다. 내가 도와줘야 할 텐데! 하지만 다른 사람이 와서 도와주겠지. 나는 4천명 가까이 되는 교인들이 말씀 듣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시간이 없다! 빨리 가야지.’ 분명 이러했을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이 무어냐?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이 사람을 살리는 것도 중요하다.’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대제사장이 저와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주 구역장님으로부터 구역보고서를 받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특별 사항 란에 빽빽이 적힌 보고서가 맨 앞장에 놓여 보고 되었습니다. 자기 구역식구 중에 위급한 구역원이 있어 교회에 부탁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광고는커녕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아 속상하다는 내용과 함께 약간의 항의성 편지였던 것입니다. 그 구역장님 글 중에서도 계속 제 마음에 남는 글귀가 있습니다. ‘교회가 그분에게 힘이 되어 주지 못해 그분 보기에 부끄럽고 죄송했습니다.’ 그 글을 처음 받아볼 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많은 교인을 돌보면서 어떻게 이 한사람에게만  관심을 가질 수 있는가. 그리고 담당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계시는데 왜 내가 이 이야기를 들어야하지?’ 하는데, 순간 바로 이 본문이 걸렸습니다. ‘대제사장이 바로 나구나!’ 어찌되었든 그 구역원에게 있어서 나는 선한이웃, 좋은 이웃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자주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될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이러한 모습은 누구나에게 있지 않습니까? 나의 일이 너무나 바쁘고 중요해서 꼭 해야 될 중대한 일,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지 못하고 지나칠 수밖에 없는……. 강도만난 사람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어 손을 뻗치지만 해야 할 바쁜 일 때문에 우리는 그냥 지나칠 수 있습니다. 결국, 이유가 어떻든 간에 주님이 말씀하시는 참된 이웃은 못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질문이 얼마나 예리합니까? ‘강도만난 사람의 참된 이웃은 누구냐?’

‘너희가 스스로 참된 이웃이라 생각하는데, 강도만난 사람이 생각할 때 그의 참된 이웃이 누구냐?’

이 질문 앞에 우리가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내 구역의 힘들고 지친 이웃에게 어떻게 진정한 이웃으로 서야하는지 질문하십니다.

셋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는 참된 이웃이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어떠한 도움과 사랑도 줄 수 없는 것이 냉정한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모두들 제 입장에서만 보았기 때문에,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강도만난 사람을 보면서 오히려 자신들에게 같은 일이 닥칠까 두려워하며 그냥 지나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향해 불쌍한 마음을 가져야만 참된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란 단어의 원어 표현을 보면, 내장이 끊어지는 것과 같은 괴로운 심정을 가지고 아파하며 그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를 바라보는 주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죄와 사망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세우셔서 정결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왜요? 주님은 우리를 향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끝난 인생을 다시금 일으켜 세우셔서 새 삶을 주시고 희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우리의 참된 이웃입니다. 
 
마태복은 9장 36절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저희가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고생하며 유리함이더라.’ 백성들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다는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마태복음 14장 14절에 벳세다 광야에서 빈들에 나온 백성을 볼 때 불쌍히 여겼다 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에 주님은 그들을 하루 종일 가르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일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 34절,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에 소경들이 예수님께 불쌍히 여겨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이 눈 하나 볼 수 없어 겪는 많은 수모와 괴로움과 아픔과 그들의 지침……. 여느 사람들은 단순히 ‘시각 장애인이구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 이면 속에 괴로움과 고독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장 7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긍휼히 여기셔서 죄 사함 받는 구원을 알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를 구원하시지도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7장 13절,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아들을 살려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바로 하나님 마음입니다. 기적의 마음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마음입니다. 생명의 마음이며 풍성함을 주는 마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가졌던 마음으로 강도만난 사람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참된 이웃이 되기 위해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냉랭한 마음? 단순한 동정의 마음? 그것이 아닙니다. 내 아픔처럼 느껴지고 내 일처럼 생각될 때 비로소 참된 이웃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있어야 구역과 이웃을 섬길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 있어야 전도가 가능해 진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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