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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를 인하여 (추수감사절) - 합 3: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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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하박국 3:17-18절
제목 : 여호와를 인하여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어느 작가는 결혼 생활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20대에는 행복의 꿈에 부풀어서 신이 나서 살고
30대에는 서로에 대해 실망을 느끼며 환멸을 참으며 살고
40대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지못해 체념하며 살고
50대에는 서로 없어서는 안 되니까 의지하는 마음으로 살고
60대에는 서로 안 됐다 생각되어 가여워서 살고
70대에는 지금까지 참고 살아준 것만 해도 고마워서 산다.

이 작가의 묘사에 대해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 많은 분들이 공감하실 줄 압니다. 신혼 초에는 꿈에 부풀어 지냅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동화와 같은 나라에 왕자처럼 공주처럼 그렇게 하루 하루를 지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 그런 환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실망하고 때로는 쳐다보기도 싫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수 십년의 세월을 함께 살게 됩니다. 어쩌면 이 작가의 표현이 너무도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방법 말씀드린 내용을 적용해서 말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신앙의 20대에는 주님과 함께 하는 꿈에 부풀어 신나게 생활을 했는데
신앙의 30대에 접어들어서는 교회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실망하며 생활을 하다가
신앙의 40대를 맞이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지못해 체념하듯 교회에 나가다가
신앙의 50대 혹은 60대에는 신앙을 버릴 수는 없고 또 한평생 같이 살아 준 마누라가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됐다는 생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지난 월요일 저는 미국의 윌로우크릭 교회에서 목회하시는 빌 하이밸스 목사님의 강의를 듣고 왔습니다. 제목은 '비전과 리더쉽 컨퍼런스'였습니다. 많은 도전을 받았지만 그 중에 빌 목사님이 던진 질문이 아직도 제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신앙의 연륜이 더해져 가는 만큼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사실 너무도 평범한 질문이었지만 저에겐 상당한 도전이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처음 주를 믿었을 때보다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있는지? 아니면 멀어져 있는지? 에 대한 평범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평범한 질문에 자신있게 '예'라고 대답할 수 없었던 제 자신을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은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은 기간만큼이나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 있다고 생각되어지십니까?

왜 우리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있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는 것일까요? 어찌된 일인지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오래할수록 우리에게는 불평이 많고 원망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에서 하나님을 향해 불평했던 것처럼 우리도 감사보다는 불평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던져주는 말씀입니다.

먼저 본문 17절을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라고 했습니다.

지금 하박국 선지자는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침략을 받아 폐허로 변하게 될 것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박국 선지자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차례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질문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항의였습니다. 그 첫 번째 질문은 공의의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유다의 죄악을 징계치 아니하시며 의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침묵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점점 타락하여 겁탈과 강포를 일삼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무엇하고 계시길래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가만히 계시는가? 하는데 대한 항의였습니다. 우리는 하박국선지자의 질문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도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예수를 썩 잘 믿는 것 같지 않은데 세상적으로 형통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겨우 주일 한번 지키는 것 정도로 신앙생활을 할 뿐인데 그가 하는 일은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정직하지도 않고, 권모술수에 능한 것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도 이상하게 그 사람이 하는 일은 잘못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듭니까? "하나님은 도대체 무얼 하시는 것일까?" "도대체 신앙생활이 엉망인 사람에게 저렇게 많은 것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하는 생각입니다. 더불어서 "왜 나는 이렇게 힘든 삶을 살아야 하나?"하는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시편기자는 이런 일들을 지켜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73편 1절이하에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여기서 시편기자가 무엇 때문에 실족할 뻔했다고 했습니까? 악인의 형통함 때문입니다. 더욱 시편기자로 하여금 화나게 했던 것은 그들이 사는 동안에 형통했다면 죽을 때에라도 고통스럽게 죽어야 할텐데 그렇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몹쓸 병에 걸려 아주 고통스러워하다가 죽으면 그래도 '죄 값은 받는게지'라고 말할 수 있을텐데 죽을 때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한 것을 보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의 심정도 시편기자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온갖 악을 다 행하고도 화려한 인생을 산 사람을 보면 죽을 때에라도 좀 고통스럽게 죽어서 자기의 죄값은 조금이라도 치루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죄값이 치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가 행한 일에 대해 뭔가 응당한 처벌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말하던 분이 부도를 내고 수많은 회사를 파산의 지경에 이르게 하고서 자신은 잠적해 버렸습니다. 부도난 회사의 가족들은 고통속에서 한숨과 탄식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그분은 이제 '세상은 넓고 도망할 곳은 많다'로 바꾸어서 해외를 누비고 다닙니다. 이럴 때 우리가 하게 되는 말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하나님은 무얼하고 계시느냐?'는 것입니다. '왜 저런 자들이 형통하도록 그대로 내버려두느냐?', '왜 체포결사대를 보내지 않는 것일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박국 선지자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악한 바벨론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려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야단을 쳐도 자기보다 행동이나 모든 면에 있어서 모범을 보이는 사람이 야단을 치면 그래도 이해가 되고 수긍이 갑니다. 그런데 나보다도 행동이 엉망인 사람이 나에게 '왜 이것은 이렇게 했느냐? 저것은 저렇게 했느냐?'한다면 상당히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심지어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야단을 칠 때에도 자녀들은 부모의 행동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꾸중을 하면 듣고는 있지만 속으로는 '엄마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하는 반감을 갖게 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는데 그 도구로 바벨론을 사용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차라리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을 하시든지 아니면 적어도 자신들보다는 그래도 행동에 모범되고 뭔가 본을 보일 수 있는 민족이 도구로 쓰여진다면 이해가 되겠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여러분이라면 이 사실이 용납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그들을 통해서 심판하시는 모습이 어떻다고 했습니까? 본문 17절을 보면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라고 했습니다.

이 당시 무화과나무나 포도나무는 가장 값진 과목이었습니다. 이 나무들은 그들의 생계에 있어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나무들입니다. 이 나무의 열매 때문에 그들이 먹고 살았습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제주도에 감귤나무를 가지고 있는 집과도 같습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과거엔 제주도에 감귤나무 몇 그루만 있으면 자식 대학 보낸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감귤나무는 제주도에 사는 분들에게 아주 중요한 재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에 귤이 열리지 않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절망과 탄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자연현상이나 여러 가지 주변환경 때문에 열리지 않았다면 그래도 조금은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 말입니다. 처음부터 자연적인 재해나 어떤 영향 때문에 열매를 얻을 수 없었다면 그래도 스스로를 위로하며 견딜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그 정도 때문이 아닙니다. 바벨론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쳐들어와서 무화과나무며 포도나무며 감람나무, 이 모든 것을 다 망쳐놓게 될 것입니다.

시골에서 자란 분들은 가끔 남이 농사를 지어놓은 곳을 '서리'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콩서리를 해서 들판에 불 피워놓고 얼굴이 숯검댕이같이 되도록 열심히 불에 익은 콩을 까먹었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주인 아저씨가 '이놈들'하면서 잡으려 오면 먹던 콩을 버려두고 도망을 쳤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남의 집의 것을 '서리'하는 정도면 괜찮습니다. 애교로 봐 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은 서리정도가 아니라 무참하게 다 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얼마 있지 않으면 풍성한 과실을 거두어들일 판인데 왠 미친 황소 한 마리가 돌아다니면서 그 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면 그 밭을 지켜보는 농부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올해 남해 앞 바다에서 가두리 양식장을 하신 분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수년동안 양식을 해서 이제 막 출하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적조현상이 나타나 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수십만 마리가 하루아침에 죽어나갔습니다. 그 심정은 또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벌써 두 번째 그런 일을 당했으니 '절망'이라는 단어 외에 그들의 심정을 대변해 줄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그 정도에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밭에 식물이 없고, 우리에 양도 없고, 외양간엔 소가 없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들이 삶의 터전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소출이 전혀 없습니다. 바벨론의 침략으로 땅이 황폐화되고, 나무에서 과실을 얻을 수 없다면 다른 양식이 필요합니다. 가축이라도 있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엔 양이 없습니다. 외양간엔 소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생명을 보존할만한 대부분의 양식과 가축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상태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입니다. 악한 자를 심판하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상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젠 삶의 터전마저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중에도 불구하고 하박국 선지자의 다음 고백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18절을 보면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모든 것이 없는 상황에서도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하나님께 항의하는 듯 하던 하박국 선지자가 어떻게 이렇게 태도를 바꿀 수 있게 된 것일까요? 어떻게 그 엄청난 고통의 현실을 받아들이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일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부르는 찬송이나 읽었던 교독문의 말씀은 모두 풍성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삶을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지난해보다 나아진 것이 있습니까? 지난해 보다 올해 여러분의 생활 환경이나 삶의 질이 나아진 것들이 있습니까? "사실 지난해 보다 못하면 못했지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씀하실 분들이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경제가 좋지 못한데 여기서 더 나아졌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아마도 특별한 분일 것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여건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입으로는 풍성케 하신 하나님, 풍성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풍성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물론 농사는 잘 되어서 풍년을 이룬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풍년이 들었으면 기뻐해야 할텐데 더 고통스러운 것이 농민들입니다. 남아 돌아가는 쌀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더구나 내년부턴 추곡수매 가격을 낮게 책정할 수밖에 없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외국으로부터 수입해 오는 쌀과 경쟁력을 갖추려면 가격을 낮게 책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환경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업이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지난해 보다 수입이 많아졌습니까? 아니면 승진이라도 하셨습니까? 사업은 여전히 어렵지 않습니까? 신앙을 지키며 사업을 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런 나의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사업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점점 자라면서 교육비에 대한 지출은 많아지고 거기에다 늘어난 세금까지 감당할 것은 많은데 남편의 월급은 변동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리 떼고, 저리 떼고 해서 통장에 들어온 남편의 월급은 한달 생활하기조차도 버겁습니다. 그래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에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나아진 것이 없이 아무것도 없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감사해야겠습니까? "무르익은 저 곡식은 낫을 기다리도다"라고 찬양을 했지만 실제로 저나 여러분의 가슴에 어떤 감사가 있고 감동이 있습니까? 어쩌면 오늘 이 예배도 절기예배로만 생각하고 무덤덤하게 맞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하박국 선지자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 고통스러운 날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감사합니까?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자칫 잘못 들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하박국 선지자가 감사할 것을 찾다가 찾다가 겨우 찾은 것이 '하나님으로 인하여'라는 말로 잘못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는 비록 이런 고통스러운 일이 펼쳐진다 할지라도 오직 믿음으로 사는 의인답게 장차 있을 구원에 대한 확신과 소망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을 담대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령 이런 것들이 좀 없어지면 어떻습니까? 설령 지금 내 형편이 뚜렷히 나아진 것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하나님 그분 한 분만으로도 만족하며 그 분이 베푸신 구원에 대한 소망이 나로 하여금 감격하게 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지만 아무것도 나아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실제로 주변 환경 속에서는 나아진 것이 없다할지라도 오늘 우리에게 구원을 선포하신 주님으로 인하여 감사할 수 있는 이 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에게니라"(딤후4:7-8).

채워지지 않았는데 감동 없는 감사를 형식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나의 곁에 언제나 함께 계신 하나님, 나에게 구원을 허락하시고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 그리하여 우리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을 예비해 놓으신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않으면 어떻습니까?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면 어떻습니까?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식물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시는 은혜가 이 추수감사주일에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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