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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나니아 이야기 / 행 9: 10-19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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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아나니아 이야기
본 문 : 행 9: 10-19상
설 교 : 김창인 목사 (광성교회)


  오늘은 사도행전 9장 10절에서 19절 상반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아나니아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이 대표적으로 두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는 예수를 믿고 망한 사람으로 등장으로 합니다. 별로 좋지 못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아나니아는 아주 모범적인 일꾼이요, 그리스도인으로 등장을 합니다. 오늘은 두 번째로 등장하는 아나니아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똑같은 내용인데 사도행전 22장 12절에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이 사람은 본래가 유대교인이었습니다. 얼마나 율법에 철저한지 '율법에 의하면' 이라고 하였습니다.

  '경건한 사람으로'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뜻이 있습니다. 기독교로 개종하여 예배를 위주로 했다고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경건하다'할 때는 '유세베이야'라고 합니다 '유'라는 말은 '좋다'혹은 '잘한다'라는 뜻이고, '세베이야'는 '예배하다'라는 뜻입니다. 예배를 잘 드린다는 뜻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좋은 예배를 드린다는 말입니다. 그 전에는 율법에 의해서만 살던 사람이 기독교로 개종해서 경건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끝에 가면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나니아에 대해서 사도행전 22장에서 좋은 기록이 요약되어 있는 것을 서론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따라서 아나니아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제자 된 아나니아 (10)

  선생이 있고 학생이 있습니다. 학생은 선생한테 배우는 사람이요, 선생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대개는 그것으로 끝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은 의미와 관계를 지어 말씀드린다면 선생 대신 스승, 학생 대신에 제자라고 하면 뭔가 감이 다르지 않습니까? 감이 다르면 내용도 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은 학생이라기 보다는 제자입니다. 선생에 해당되는 스승은 예수님입니다. 제자는 예수님에 의해서 즉 스승에 의해서 뽑혀진 자입니다. 그리고는 스승에게서 모든 것을 배웁니다. 생활도 배우고, 복음도 배우고, 인격까지라도 배우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을 닮아서 그대로 스승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제자를 보면 스승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은 이런 의미에서 아주 훌륭한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으로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행 22장 12절에 기록된 그 말씀은 아나니아에게 절대로 손색이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께 무엇을 배우고 끝나는 학생이라기 보다는 제자 된 사람이 되어 뽑히고 배우고 예수님을 하나 하나 닮아가야 하겠습니다.
  세상에서는 스승보다 제자가 더 잘 될 수도 있고 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경이 말하는 제자 된 우리는 스승 된 예수님 이상으로 크게 될 수가 없습니다. 가능하면 예수를 많이 배우고 닮아가야 합니다. 많이 닮을수록 잘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자 된 아나니아를 생각한다면서 아나니아 대신에 여러분들의 이름으로 전부 바꾸어 놓으시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제자된 나 아무개'라고 말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0절을 보면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라고 하는 말은 사울이라는 청년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 거꾸러지고 회개한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메섹에는 아나니아라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다메섹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인정을 받는 제자였기에 주님은 이 사람을 시켜서 사울이라는 청년을 잘 인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환상 중에 "아나니아야"라고 불렀더니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자세는 "무엇이든지 시키십시오. 내가 순종하겠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의 모습입니다.

  무디라고 하는 유명한 부흥사가 있습니다. 무디는 구두방의 점원으로 공부는 별로 못했기 까닭에 무식하다면 무식한 사람입니다. 나중에는 목사가 되어 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예수 믿게 하는 전도 집회를 많이 인도한 사람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무디는 평생에 백만 명을 예수 믿게 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입니다. 무디가 한번 부흥회를 간다 하면 차고 넘쳐서 자리가 없었습니다. 무디가 한번은 어느 중소도시에 부흥회를 갔습니다. 그 인근에 교인들까지 모여들다 보니 소년들로부터 비롯해서 어린아이는 들어오지를 못하게 했습니다. 무디가 저녁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교회 앞에 갔더니 소년 하나가 처량하게 울고 있었습니다. 옷도 그렇게 잘 입은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너 저녁을 굶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러면 집에서 쫓겨났느냐?" "아닙니다" "부모를 잃었느냐?" "아닙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처량하게 울고 있느냐?" "저는 무디 선생님을 그렇게 좋아합니다. 그래서 멀리에서 집회에 참석하려고 왔는데 받아 주지 않고 나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너무 속이 상해서 이렇게 울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무디가 손을 내밀어서 그 소년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안내하는 사람들 앞에서 보란듯이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무디가 성전 한 가운데로 걸어서 그 소년을 데리고 강대상까지 올라가서 옆에 있는 의자에 앉혔습니다. 그 소년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몸 안에 있는지 몸밖에 있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이 소년에게는 하나님 다음으로 무디가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디가 하는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전부 들었습니다. 소년이라도 무디가 하는 말을 전부 알아듣고 '이 다음에 나도 반드시 무디와 같은 목사가 되겠다'라고 다짐하였습니다.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무디가 인도하는 집회에는 갈 수 있는 거리라면 참석하여 한마디 한마디 듣고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무디를 닮아갔습니다. 마지막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어 그 교회에서 쫓겨난 지 15년 만에 그 교회로 부임을 했습니다. 첫날 설교를 하면서 "15년 전에 쫓겨났던 제가 15년 후에 목사로 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무디를 좋아하는지 무디를 배우고 무디를 닮아 목사 노릇을 잘 하여 아주 훌륭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도 존경하는 사람을 그대로 배워서 닮아 가는 것도 나에게는 플러스가 될 뿐 아니라 좋으면 좋았지 나쁠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배우고 만나고 그대로 본을 받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많이 닮을수록 예수 잘 믿는 사람, 제대로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가 그렇게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실 사울을 인도하는 사람으로 뽑혔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시시한 사람을 뽑았겠습니까? 아나니아는 이렇게 훌륭한 제자였습니다. 우리에게 아나니아와 같은 제자가 되라고 명하는 것이 본문입니다.

  둘째, 계시를 받는 아나니아 (11-16)

  '계시'라고 하는 것은 '숨겨진 정체를 열어서 보여준다'라는 뜻입니다. 한자로 열 계(啓)자와 보일 시(示)자를 씁니다. 계시는 무엇인가 숨겨진 존재를 열어서 정체가 이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계시,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계시는 무엇을 가르치는 지를 아십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은 후로 죄를 지은 인간에게 하나님은 숨겨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보여주는 것을 계시라고 하는데 계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자연 계시입니다. 자연 만물을 보면 하나님을 헤아려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우주만물을 만드신 분이 있다고 깨닫는 것입니다. 강대상 위에 있는 종을 보면 종이 우연히 생겼습니까? 우리가 헤아려 볼 때 분명히 만든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가하면 여러분들이 차고 다니는 시계가 우연히 생겼다고 보십니까? 분명히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우주를 만든 분의 목적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가령 종을 만든 사람과 시계를 만든 사람의 기술이 똑같습니까?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종을 만든 사람이 주물럭거리다 보니 종이 되었습니까? 분명히 목적이 있어서 종을 만들고 시계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우리가 살펴보면 분명히 만든 분의 목적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주의 능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 아름다운 솜씨 그리고 자연의 구석 구석을 보면 우리가 다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나간 주간에 우리 광야 선교회 회원들이 중국 장가계와 원가계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고 "장가계와 원가계를 보지 않고는 에덴 동산을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천하에 있는 사람들이 천하에 있는 돈을 가지고 모두 달려들어 저렇게 만들어 놓으라고 한다면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솜씨와 능력이 그렇게 위대합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거기에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자연 계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연 계시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거기에 십자가가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죄인인데 죽을 죄인을 속죄하신 하나님의 속죄가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연 계시는 불완전 한 것입니다.

  둘째로 특별 계시가 있습니다. 정확하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다라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을 특별 계시라고 합니다. 특별 계시는 예수 자신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특히 빌립이 "주님 우리가 하나님을 좀 보고 싶은데 하나님을 좀 보여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그 때 주님께서 "너 이제 뭐라고 했느냐? 하나님이 보고 싶다고? 아니 나와 함께 그 만큼 지냈으면 알 수 있었을 것이 아니냐?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거늘 무엇을 또 보여달라고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서야 제자들은 "예수님이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지만 하나님과 똑 같은 하나님이로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그 능력, 불한당을 만난 사람을 돕는 그 놀라운 사랑, 오천명을 먹이고도 남는 축복,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데 저것이 웬 일인가 했더니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사랑이었구나"라는 것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신성을 버리고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신성을 그대로 갖고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과 똑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바로 내가 하나님이다"라 하시어 하나님을 정확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문제가 생깁니다. 특별 계시 중에서도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객관적 특별 계시라 합니다. 그것은 곧 성경입니다. 그런데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을 믿으니 정확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예수님을 못 보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바로 믿겠습니까? 이때 계시를 못 받는 사람은 귀신 한 마리를 붙 잡아놓고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객관적 특별 계시가 성경이라는데 중요성이 있습니다. 루터가 "베들레헴에 나셔서 말구유에 누워 계시는 예수님은 오늘날 성경이라는 구유 속에 누워 계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했을 때 예수님을 보려면 다른 곳에 가서는 보지 못하고 그 여관의 그 말구유에 가야만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만나려면 다른 곳에 가서는 절대로 만나 보지를 못합니다. 성경이라는 구유 속에 계시는 예수는 성경 속에서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예수님의 본래의 모습이 무엇인지, 그 예수님은 본래 어떤 분인지, 그 능력과 사랑과 축복등 온갖 것을 다 볼 수 있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이외에서는 결코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객관적 특별 계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주관적 특별 계시가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예수를 믿지 않는 믿는 남편이 예수를 잘 믿으면서 열심히 구역장으로 봉사하는 아내를 얼마나 핍박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비도 오고 집에서 쉬기가 답답합니다. 그러다가 방구석을 보니 아내가 열심히 가지고 다니고 열심히 읽는 성경을 발견했습니다. 궁금해서 펼쳤습니다. 펼치니까 '예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시고 축복하시니 오천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맹랑한 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빨래를 하고 있는 아내에게 오라고 했습니다. 아내 되는 구역장은 남편이 성경을 읽고 있으니까 "주여 이번에는 거꾸러질 줄로 믿습니다"라고 기도하면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오라고 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모를 것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남편이 "모를 것 좋아하시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예수가 어쩌고 하니까 오천 명이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나 혼자 먹고도 모자라. 이런 맹랑한 소리를 믿고 돌아다녔어? 그 소리가 당신에게 밥을 먹여줘? 차라리 내가 돈을 벌어다 당신에게 밥을 먹여 주는 내 주먹을 믿어"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읽었는데 왜 예수를 발견하지 못합니까? 그런데 뒷집에 사는 김창인이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축복하시고 떼어 주시니 오천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더라'는 말씀을 읽고 "나는 이러니까 예수 믿는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 멀리서 온 사람들을 그냥 보내면 가다가 길에서 쓰러지면 안되니까 반드시 먹여서 보내시는 예수님의 사랑, 그 엄청난 축복, 그 능력등 이것이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있는가? 나는 거기에서 예수를 발견한 것입니다.
  만약에 성경에 이렇게 썼다면 김창인이는 어떻게 하겠는가? 한번 들어보십시오.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하늘을 우러러 아무리 축복하고 아무리 축복해도 혼자 먹고 모자라니라'고 썼다면 여러분은 그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저는 그런 예수님은 안 믿을 것입니다. 안 믿는 그 사람은 참으로 맞다고 그럴 것입니다. 그러면 앞집에 그 사람과 뒷집에 김창인은 무엇이 다릅니까? 성경 속에 예수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나 사이에 성령의 교통 이것을 성령이 감동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이 교통하면, 말씀이 내 가슴속에 들어와서 '믿습니다'하면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시간에 제가 하는 설교를 똑같이 듣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저 기둥 뒤에 앉아서 '동대문 시장에 가서 그런 소리하다가는 밥은 고사하고 죽도 못 벌어먹을 소리를 하고 있네'라고 생각하면서 앉아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기둥 뒤에 앉는 것이 좋습니다. 또 목사가 보기 싫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기둥 뒤에 앉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배당 뒤쪽에 기둥을 두 개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으려니 답답하고 나오자니 목사가 보기 싫고 그러니 나와서 기둥 뒤에서라도 예배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령이 교통하는 경우 제가 하는 설교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 그 말씀이 가슴에 부딪혀 오고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은혜 받고, 예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교통이 빠지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서자서 아자아 즉, 글은 글대로 있고 나는 나대로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말씀대로 있고 나는 나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 계시 중에 객관적 계시가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왜 예수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이 만난 예수, 베드로가 만난 예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바울의 예수요, 베드로의 예수요, 나의 예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객관적 계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관적 계시로 가면 성령이 내게 임하셔서 말씀을 통해 감동하시면 거기에서 예수를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고 믿음 생활을 바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관적 특별 계시입니다. 이 때 비로소 믿음이 바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성경을 매일 매일 읽는 중에서 하나님을, 즉 예수님을 매일 같이 만나야하는 것입니다. 계시는 매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0절 하반절에서 16절을 보면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으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간단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환상 중에 즉 예수님이 아나니아에게 나타났습니다. 아나니아는 환상 중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아나니아야?" "예" "저 다메섹 직가라고 하는 거리 알지?" "예 압니다" "거기에 가면 다소 출신 사울이라는 사람이 유다의 집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그 사울이라는 사람도 너와 똑 같은 환상을 보고 있어" "그 환상이 무엇인데요?" "바로 너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이 들어 와서 안수하여 기도하므로 자기의 눈이 번쩍 떠지는 것을 환상 중에 보고 있느니라" 주님께서 환상을 보낼 때 아나니아에게 보내고 사울이라는 청년에게도 보냈습니다. 두 사람의 환상이 주께서 보여주신 똑같은 환상이요, 주님의 계시입니다. 그리고는 "빨리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가 "주님 곤란합니다" "왜?" "얼마나 못된 놈인지 예루살렘에서 예수 믿는 사람을 붙잡아 가고 옥에 가두고 재산을 빼앗고 죽이던 사람이 아닙니까? 예루살렘에서 그 짓을 하다가 이제는 예루살렘 다음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 많은 곳이 다메섹이니까 대 제사장의 권위를 위임받아 우리를 붙잡으러 오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저를 제일 먼저 붙잡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붙잡고 옥에 가두고 재산 빼앗고 때려죽이려고 오던 사람입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사울이라는 저 청년은 이방인의 선교사, 이방인의 그릇으로 내가 택한 사람이야. 그가 얼마나 앞으로 복음을 위해서 고생을 많이 할지 몰라. 잔말 말고 가거라" 아나니아가 확실하게 주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주님을 만났고 나를 향한 주님의 뜻, 사울을 향한 주님의 뜻을 분명하게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가 가서 하라는 데로 했더니 그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항상 성경 속에서 예수를 만나고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을 늘 찾아보는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살면 그대로 된다고 하는 사실을 날마다 말씀을 통해서 계시 받아야 하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열매 맺는 아나니아 (17-19상)

  본문으로 돌아가서 17절에서 19절 상반절을 보면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나니아가 가라는 곳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순종을 먼저 했습니다. 가서 기도하라는 대로 기도했더니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지고 시력을 회복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엎드려 "나에게 세례를 주십시오"하고 세례를 받아 기독교로 완전히 개종을 하고 건강도 회복되었습니다. 순종하였더니 엄청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무엇인가 내가 먼저 받은 후에 순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죽을 때까지 순종하지 못합니다. 순종하고 나면 그대로 받는 열매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이 본문입니다. 베드로도 먼저 주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받았습니다. 받은 후에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처럼 순종을 먼저 하면 그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제자 된 아나니아입니다. 아나니아는 다메섹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많은 성도들의 지도자였습니다. 사울을 인도하는 자로 뽑혔습니다. 예수님을 배우고 닮아 그대로 살아가는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계시를 받은 아나니아입니다. 계시에는 자연계시와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특별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정확히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특별계시 중에는 객관적 계시로서 성경이 있고 주관적 계시로서 성령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바로 믿을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가 환상 중에 주를 만나고 말씀으로 계시를 받았기에 정확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로 열매 맺는 아나니아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먼저 순종한 베드로는 두배에 채우는 결과 즉,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우선 순종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열매로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의 순종 역시 좋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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