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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꿈을 위한 서곡 / 민 13: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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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꿈을 위한 서곡
본 분 : 민수기 13:25-33
설 교 : 박근호 목사 (구미영락교회)


옛말에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그 다음에는 수고는 수고대로 하고 결과는 헛수고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시작이 절반'이라는 말도 바로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오라토리오나 오페라 등의 음악 세계에는 Overture, 서곡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헨델의 '메시야'나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등의 서곡은 너무도 유명한 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서곡이 뛰어난 작품치고 명작 아닌 것이 없습니다. 즉 첫 장을 어떻게 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음악의 세계에만 한정되겠습니까? 음악만이 아니라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될성 싶지 않은 인생을 가리켜 '싹수가 노랗다'는 표현을 씁니다. 싹만 봐도 벌써 그의 어두운 미래가 보이는 겁니다. 시작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어떠한 서곡이 울려퍼지느냐에 따라 밝고 희망찬 미래가 열리기도 하고, 어둡고 암울한 미래가 열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현대를 가리켜 '꿈을 상실해 가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요즈음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들은 하나 같이 공상과 꿈의 세계를 소재로 한 영화들입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우리 시대가 꿈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현대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체감적인 단어가 바로 권태와 체념입니다. 그 어느 시대보다도 물질적 풍요 속에 살고 있지만 정작 사는 재미라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차 권태와 체념에 빠져 삽니다. 유행이 얼마나 자주 빈번히 바뀝니까? 광고가 얼마나 자주 바뀌고 그 짧은 시간 동안 화면은 또 얼마나 자주 바뀝니까? 이러한 현실은 그만큼 한 곳에 마음붙이고 살만한 것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신앙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신앙인들 역시 권태와 체념에 익숙해져 갑니다. 아주 어두운 색상으로 오늘과 내일을 바라봅니다. 웬지 어제가 그립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신앙은 회색이 되어가고 미지근해 져 갑니다. 감격도, 흥분도, 기대도 사라져 갑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첫사랑의 뜨거움도 감격도 잃어버리고 점점 권태와 체념에 빠져버리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경고가 현실로 다가옴을 체감합니다. 그래서 이제 신앙인들조차도 권태와 체념에 익숙한 삶을 살아갑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 곧 절망'에 빠져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들을 향해서 희망을 말하는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이 담겨있는 민수기는 희망에 대해 가르치는 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의 세월을 광야에서 보내게 됩니다. 저들은 참으로 힘겹고 고된 시간을 보냈습니다. 애굽땅에서 폭군 바로의 억압을 받으며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 다음 저들은 광야를 거쳐 오랫동안 힘든 여행을 계속합니다. 광야의 메마름, 불볕 더위, 배고픔과 갈증을 겪습니다.
그 광야 40년 동안 저들은 참으로 많은 일들을 겪습니다. 그 긴 세월은 변화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훈련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연단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게됩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될 것이요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영적 결혼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십계명을 통한 그 계약 체결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큰 자유와 삶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평화를 누릴 새 땅을 약속받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걷는 광야 여정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됩니다. 그 여정 속에서 저들은 감동하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하고, 성실하기도 하고 배반하기도 합니다. 허기지고 갈증을 느낄 때 저들은 '차라리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배고프고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애굽에서 먹고 마시던 그 옛일들을 다시 생각합니다. 광야 40년의 생활은 저들에게 권태와 체념의 유혹이 끊임없이 밀려왔습니다.
그런 순간들을 지나 드디어 저들은 목적지에 이르게 됩니다. 네겝에 도착한 저들은 이제 바로 건너 편에 있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들이 조상적부터 수백 년 동안 꿈꾸어왔던 그 약속의 땅 가나안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 땅에 들어가기 전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 먼저 정찰대를 선발해 그곳에 보내게 됩니다. 약속의 땅이 어떤 땅인지, 그곳에 힘센 군대가 있는지, 정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지를 살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모세는 저들을 보내면서 '그 땅의 과일을 따오라'고 명령합니다. 백성들의 눈에 볼 수 있는 표징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찰대들이 그 땅의 풍요로움의 표시로 젖과 꿀을 가져오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농경지였습니다. 거기엔 곡식과 포도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그곳에는 젖과 꿀이 없는 겁니다. 젖과 꿀은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랫동안 지나왔던 광야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광야에서의 최고의 양식이 바로 젖과 꿀이었습니다. 유목생활을 하던 저들은 때로 가축에서 나오는 우유를 마시며 또 가끔은 초원에서 들꿀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새 땅에서 젖과 꿀을 얻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약속의 땅에는 많은 양의 젖과 꿀이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지금까지 저들이 얻을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양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정찰대는 저들이 기대했던 젖과 꿀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저들은 그 대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차 그 땅에서 먹을 미래의 열매를 가져옵니다. 저들은 두 남자가 겨우 들 정도의 무척 큰 가나안의 전형적인 열매인 포도송이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나는 곡식도 함께 가져옵니다. 젖과 꿀이 아닌 다른 것들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들이 앞으로 먹게될 양식인 것입니다.
이런 열매들이 젖과 꿀과 구별되는 점을 살펴보십시다. 젖과 꿀은 요리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직접 먹고 마실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 자체가 완전식품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쉽게 흘러 들어갑니다. 먹기도 편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갓난아이의 음식입니다. 하지만 포도주와 곡식은 어떻습니까? 그것들은 식탁에 올라오기 전에 수고를 요구합니다. 포도송이는 먼저 짓눌러져야 하고 곡식은 방아를 찧어야 합니다. 거기엔 땀흘림과 수고와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필요한 양식이 바로 포도와 곡식인 것입니다. 저들은 이제 새 땅에서 젖과 꿀을 먹는 게 아니라 포도와 곡식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민수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꿈은 우리의 편리나 우리의 바람이나 우리의 요구로서 이루어지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이것저것을 달라고만 요구하고 떼를 쓰는데서는 그 꿈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 요구만으로는, 수고없는 게으름만으로는 하나님의 꿈은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 가만히 앉아서 내 입에 젖과 꿀이 흘러들기를 원하는 것은 결코 꿈을 이루어가는 자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를 버리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그 약속의 땅은 나의 제안과 희망이 무조건 다 실현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과 논쟁함으로 가치관이 바뀌는 곳, 그런 갈등과 고민을 통해 재정립된 의식으로 참여와 책임이 요구되는 세계였습니다.
두 사람이 짊어지고 가야 할 정도로 큰 포도송이를 수확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약속의 땅이 가져다주는 엄청난 자연의 기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포도송이를 수확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네겝 저편에 이러한 약속의 땅이 저들의 미래로 실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큰 포도송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포도송이를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몇몇 정찰자들이 전해 주는 나쁜 소식만을 듣습니다. 그곳에 키가 장대같이 큰 사람이 살고 있다는 위협적인 소식에 자신들에게 닥칠 위험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이스라엘백성들의 마음을 서서히 갉아먹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말합니다. '안돼, 그 일은 불가능한 일이야... 우리는 그들은 물리칠 수 없고 그 땅에 들어갈 수도 없어... 안돼, 안된다구...'
저들은 모든 것을 어둡게 보고 그 땅을 악평하며 트집잡는 사람들의 말을 경청합니다. 그 결과 이제 그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땅으로 생각되기 시작합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주신 생명의 땅이 저들의 불신앙 속에서 죽음의 땅으로 변했습니다. 저들은 겁을 잔뜩 집어 먹습니다. 그래서 저들의 자아 수준은 바닥까지 내려갑니다. 자신을 스스로 작게 여김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아무런 능력마저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이런 면들이 없지 않지 않습니까? 우리 속에도 다른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고자 하는 고집스런 마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복음과 교회를 위해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생각만 그렇지 실제로는 그렇게 행동하지를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무력하게 생각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겁니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왜소하고 불신앙적으로 만드는 겁니까? 하나님과 함께 삶을 이루어가는 우리의 신앙이 오늘날 큰 위험에 직면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질이 없어선가요? 소유가 부족해선가요? 아닙니다. 인간의 삶은 언제 어디서나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위험한 것은 자칭 신앙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취하는 권태입니다. 이것은 곧 체념으로 이어집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꿈을 주어도, 새로운 비전을 심어주어도 그런 의식을 갖고서는 하나님의 꿈을 실현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런 행동 없이 장밋빛 같은 삶을 꿈꾸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것은 망상일 뿐입니다. 그것은 어린아이가 갖는 환상일 뿐입니다.

21세기와 함께 성년을 맞는 우리 교회에 하나님은 놀라운 꿈을 주셨습니다. 곰곰 생각해 보면 참으로 대단한 꿈과 비전입니다. 가슴 벅찬 일입니다. 남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입을 딱 벌리고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그 꿈에 대한 인식이 부족합니다. 권태와 체념의 모습도 보입니다. 새시대에 걸맞는 교회의 꿈을 하나님은 이 땅의 수많은 교회 중에서 우리 교회를 통해 열어가기를 원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그런 소명 앞에 방관하고 아무런 행동 없이 말만 앞세우고 명분만을 찾는다면 어떻게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속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미래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모세를 비롯해서 여호수아와 갈렙 등등 몇몇 그의 참모들은 그 꿈의 완성을 준비하고 대비합니다. 그러나 이와는 또 다른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애굽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는 움직임이었습니다. 미래에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에 대한 부정적인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때가 훨씬 더 좋지 않았니?... 당시에 우리는 서로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훨씬 더 가족적이지 않았나?... 그때가 좋았지, 훨씬 좋았다구... 그런데 왜 자꾸 골아프게 하는거야...'
그러나 모세는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꿈이 저들을 통해 이루어져야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들이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저들과 함께 하시며 동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함께 하리라...'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그 길을 걷기 위해서는 많은 땀과 싸움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땀흘림 없이 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수고 없이 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신앙은 분명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거기엔 인간의 노력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할 부분이 있고 인간이 해야할 부분이 있는 겁니다.
새천년을 맞으면서, 교회 창립 20주년을 지나면서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새 꿈을 달라'고... '주님, 이곳에 한국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제단을 세워주시고 오늘까지 돌보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하오나 지금 저희는 사방이 죄악과 음란으로 가득한 자리에서 많은 벽에 부딪혀 있습니다. 급변하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이제 성년이 된 저희가 해야할 몫은 무엇입니까? 차 한 대 변변히 세울 곳 없고, 열악한 교육공간에서 답답한 마음을 갖습니다. 마당은 물론 예배 후 잠시 머물 곳도 없는 현실 속에서 교회의 본질인 성도의 교제는 생각도 못하고 예배드리고 돌아가기에 급급한 현실입니다. 지역사회를 향한 사역도 여의치가 않습니다. 이 봉착한 현실 속에서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이게 창립 20주년과 새 천년기에 접어들면서 하나님께 드렸던 저의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4만 여평의 새로운 교회부지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이제는 우리가 감당해야할 몫이 남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또 기도합니다. '아버지, 저희에게 놀라운 은혜 베풀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하오나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가기에는 저희가 너무도 연약합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시옵소서. 오래 지체치 마옵시고 큰 역사를 이루게 하사 교회다운 교회로 이 지역 사회와 민족과 세계를 향해 발돋움하게 하소서...' 그때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응답은 '5병2어의 기적'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말씀입니다. '저들을 다 먹이려면 500 데나리온의 돈이 있어야 하는데요?...' '그래, 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문제는 이제 건축비입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너희 신앙 공동체가 2년 동안에 5억원을 준비해라. 나머지는 이 터와 다른 방법을 통해 내가 담당할 것이다. 너희 교우들이 합력하여 순수하게 5억원을 마련하면 이 역사는 수월하게 이루어져 갈 것이다. 그 정도는 너희가 할 수 있느니라...'
그러고보니 우리가 2년 동안 5억원을 마련하면 이 터에서 한 7억원, 그리고 또 다른 방법으로 한 5억... 그러면 약 20억원 정도의 역사가 그리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또 여쭙니다. '5억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 교우들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시는 주님께서 그 방법까지도 가르쳐 주십시오...' 이제 구체적인 하나님의 제시가 등장합니다. 여기서부터는 들을 귀 있는 분만 들으시기 바랍니다. '당회원들은 평당 200만원을 기준으로 5평 이상씩 감당하도록 하라... 그럼 1000만원이고 1년에 500만원입니다. 그럼 당회장인 저는 어찌하오리까? 너는 당회원들의 배인 10평을 해라. 10평이면 2000만원입니다. 그리고 안수집사들은 3평 이상으로 해라. 권사들은 2평 이상으로, 서리집사들은 1평 이상으로 해라. 그리고 평신도들은 각기 믿음 따라 할 것이니라...'
신기한 것은 그 기도 후 제가 우리 교회 제직 숫자와 교인 숫자를 놓고 두드려 보니 그렇게 하면 딱 5억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2년 동안 이렇게만 하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부지 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자라나는 2세들을 위해 그리고 지역 사회와 이웃과 민족과 세계를 위한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벌써 입을 벌리시네요. 그러나 어떤 서곡에 발맞추느냐에 따라 그것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한 평 감당하는 거, 200만원 크지요? 그러나 하루에 3000원씩만 모아가면 됩니다. 커피 한잔 절약하고, 찬거리 하나 줄인다 생각하면 못할 게 없고 안될 게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거 못하겠습니까? 우리 자라나는 자녀들을 위해 그거 못하겠습니까? 이웃을 섬기는 일을 위해 그거 못하겠습니까?... 그거 한 2년 하면 정말 아름다운 하나님의 꿈, 우리에게 유익한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안될 게 없습니다. 그 정도로 주님의 꿈이 이루어져 간다면 그건 엄청난 은총입니다. 이 100년 대개가 내게 주어졌다는 것에 대해 우리가 부담스러워 할 것이 아니라 기꺼이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 꿈을 위해 부담 좀 가지십시다. 교회 건축하려고 하나 밖에 없는 소를 팔고 대신 몸으로 한해 농사를 감당했다는 우리 신앙의 선진의 이야기는 결코 호랑이 담배피던 옛이야기가 아닙니다.
특히 교회학교에 다니는 자녀들 둔 집들은 풍성히 참여하십시오. 미당 서정주가 쓴 '침향'이란 시에 보면 질마재 사람들은 참나무 토막을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곳에 넣어둡니다. 침향이라는 아름다운 향을 만들기 위해섭니다. 침향은 참나무가 짧게는 2-300년, 길게는 천 년을 그 물 속에 있어야 만들어집니다. 그러니까 그 마을 사람들은 까마득한 후손을 위해 그 침향을 만드는 것입니다.
아이들 과외비는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의 영혼의 텃밭인 교회를 세우는 일에 우리가 인색해서는 안됩니다. 지난 번 부지 구입 감사예배 때 보니 아이들이 얼마나 신나게 뛰어다니며 좋아하는지요. 바로 이런 곳에서 교육이 이루어져야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냐? 돈? 아닙니다. 바로 권태와 체념과 냉소와 방관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솔솔 피어났던 불신앙의 독버섯이 문제입니다. 이게 솟아나면 아무 것도 안됩니다. 부정적인 서곡에 맞춰서 움직이면 아무 것도 되는 게 없고 이룰 게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관해 말씀하실 때 젖과 꿀에 대해서는 한번도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암시적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 빵과 포도주를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은 곡식과 포도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식탁에 오르기 위해서는 길고도 수고스런 노력이 요구됩니다. 밀이 빻아져야 하고 반죽되어져야 하고 구워져야 합니다. 포도송이를 따서 다듬어서 지하창고에서 오랫동안 발효시켜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도 바로 그런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삶이 성장하고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고된 길을 마다해서는 안되고 또 마다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찰자들은 말합니다. '안됩니다. 불가능합니다. 그건 우리에게 이룰 수 없는 꿈일 뿐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그로 인해 술렁이는 백성들을 향해 외칩니다. "올라갑시다. 올라가서 점령합시다. 우리는 충분히 점령할 수 있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이고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안될 게 없습니다..." 이 열 두 정탐꾼 중에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서곡은 언제나 장조와 단조로 울려 퍼집니다. 밝고 희망차게 울려퍼지기도 하고 어둡고 체념적으로 울려 퍼지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꿈을 위한 서곡 중에 여러분은 어느 서곡에 맞춰 춤을 추시렵니까? 어느 서곡에 맞춰 발걸음을 내디디시겠습니까? 세움받은 지도자 모세가 연주하는 희망가를 따르겠습니까 아니면 어느 한 구석에서 들려오는 절망가를 따르겠습니까?...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우리가 져야 할 것이고, 그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 각자의 몫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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