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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의 의미 /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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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자유의 의미
본 문 : 시편 23:1-6
설 교 : 이동원 목사 (지구촌교회)


이런 풍자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이 시절에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생각이 됩니다. 소련 모스크바에 살고있던 개 한 마리가 불란서 파리까지 왔어요. 그래서 파리 시내에서 불란서 개를 한 마리 만났습니다. 그래서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한 후에, 불란서 개가 소련에서 온 개한테 소련 실정이 어떠냐?  소련에서는 생활이 어떠냐? 이렇게 물었더니 소련 개가 아주 침을 흘리면서 고향 자랑 소련 자랑을 시작합니다. 소련은 사람뿐만 아니라 개에게도 완벽한 생활이 보장되어 있다 살 곳, 입을 것, 먹을 것, 걱정 없이 이렇게 살아간다고 자랑을 했어요.
그러니까 불란서 개가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그런데 너는 무엇 때문에 이 불란서 파리까지 왔느냐? 그러니까 그건 꼭 한가지 이유 때문에 왔는데 좀 실컷 짖고싶어서 왔다는 거에요. 실컷 좀 짖어대고 싶어서.
무슨 말인지 모르십니까? 네. 하하~~
이 이야기는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소중한 것, 어떤 의미에서는 의식주 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유다! 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다시 8.15 기념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일제의 그 점령 아래서 자유를 얻은 것, 그것은 56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미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56년 전에 얻은 자유가 아니라 오늘이라는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고있는 여러분과 저에게 참된 자유의 삶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자유하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인 들에게 있어서는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질문이라고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자유를 위해서 오셨다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서는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진리는 어떤 추상적인 철학적인 형이상학적인 진리가 아니라 이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그는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유명한 갈라디아서 5장1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주님은 이미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따라서 자유를 포기하지말고 종의 멍에를 지는 삶으로 돌아가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우리가 정말 그 주님을 만나 그리스도 안에 자유를 얻었다면 우리가 다시 나 자신을 향해서 되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정말 자유한가 라는 사실입니다. 
자, 옆에 있는 사람에게 한번 물어보시죠 "자유하십니까?" 이렇게 한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한 번 물어보세요 "자유하십니까?"  관상을 보니까 자유하지 않은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아, 물론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세상에서 말하는 자유와 상당히 다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사회에서는 자유가 어떤 무책임, 무질서, 무도덕의 성향으로 자유가 곡해되어 이해되기도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근본적으로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우리는 죄 사함을 받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의 출발점 이에요. 그래서 예수 믿고 우리가 죄를 사함 받았다. 이것이 우리가 자유의 출발점 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이 죄사함을 받은 것은 사실이고 내가 예수 믿고 자유를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오늘의 삶의 현장에서 자유인답게 정말 자유하게 살고있느냐는 이 질문에 대해서는 그 대답이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왜 대답이 쉽지가 않느냐? 우리가 죄로부터 용서함을 받은 것은 이미 사실이지만 죄가 초래해준, 죄가 가져다 준 어떤 결과에 대해서는 아직도 우리가 자유하지 못할 수가 있어요. 좀 역설적인 얘기지만, 우리가 자유하지만 자유하지 못한 내 모습을 볼 때가 많습니다.

한번 이런 그림을 생각해 보시죠. 우리가 요한복음 11장에 보시면 거기 기적을 체험한 사나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류 역사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그런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 어떤 사람입니까? 요한 복음 11장에 나타난 한 사람,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있잖아요? 녜 '나사로" 이 죽었다가 살아났다 이것보다 더 위대한 기적이 어디에 있어요?
자, 이 나사로가 죽어서 나흘이 되었을 때 이 사림의 죽음이 완전히 입증된, 사망이 선고된 이 사람의 무덤 앞에서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이 부활의 진리를 선포하신 후에 그의 무덤 가까이 그가 접근하시면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때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미 주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선포하시는 그 순간 생명의 주인 되신 그 분이 선포하신 그 순간 나사로는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이에요.  그는 죽음에서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새생명을 얻고 새로운 존재가 되어 지금 무덤에서 걸어 나오고 있어요. 그런데 무덤에서 나오고 있는 나사로의 모습을 성경이 묘사할 때 어떻게 묘사하는가 하니 그가 아직도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또 얼굴에는 수건이 싸 매여진 상태로 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장례식을 할 때 이 사람을 꽁꽁 결박했던 그런 그 베라든지 이런 것들이 이 사람을 결박한 상태대로 지금 나오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순간, 이순간 나사로의 모습은 자유를 얻었지만 아직도 자유하지 못한 사람이에요. 이해가 되십니까  이 그림이?
네, 새로운 생명을 얻고 나오지만 아직도 그는 결박되어 있었어요.
예수님이 그를 향해서 저 사람을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그때 비로소 그는 완전히 자유를 얻습니다. 그가 그렇게 선포하기 까지 그는 아직도 새로운 생명을 얻었지만 그는 베줄을 맨 결박된 상태 속에 있었던 모습을 우리가 바라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예수 믿고 우리가 죄 사함을 얻었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죄의 어떤 결과에서부터 우리는 어떤 자유하지 못한 내 삶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단 말이죠.

자,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우리가 온전히 자유하게 산다! 그것이 어떤 삶일까요? 어떤 삶일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위해서 저 유명한, 우리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시편 23편의 말씀을 같이 생각 할려고 합니다.
이 멧세지의 주인공인 이 사람은 정말 자유한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자, 이 주인공이 누굽니까? 이 시편 23편의 고백을 한 사람이 누구죠? 다윗 입니다.
성경 학자들은 다윗이 삶의 어떤 상황에서 이 시편을 기록했느냐를 가지고 논란을 벌립니다.  그리고 학자들이 정확하게 다 일치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특별히 다윗이 어떤 생의 시점에서 시편23편을 기록했느냐? 젊을 때냐 나이가 많을 때냐? 이런 논란이 많아요.
그런데 오늘 많은, 많은 그 학자들은 요즘 하나의  콘센서스(consensus)로 동의하고 있는 것이 뭐냐하면 아마도 이것은 다윗이 압살롬, 그 자식 가운데서 아들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아들이 반역을 하고 아들의 반역 때문에 아버지 다윗이 쫓겨 다녔을 때 이것을 기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학자들이 동의합니다.
만약 다윗이 정말 아들의 반역을 경험하고 아들에게 쫓겨 다니는  비참한 그 신세에서 비참한 상황 속에서 시편23편을 기록했다면 이 사람은 정말 굉장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도저히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없는 상황이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과 상관없이 환경과 상관없이 이 다윗은 정말 자유할 수가 있었던 사람이다 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그 다윗에게 있어서 자유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더 중요한 질문은 오늘을 살고있는 여러분과 저가 자유하게 산다, 참된 자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모해야 할 참된 자유의 삶, 그것은 어떤 삶일까요?

자, 첫째로 오늘 이 시편 23편은 참된 자유의 삶은 욕망에서부터 자유한 삶이여야 한다라고 가르칩니다. 이 참된 자유는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일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그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면서 말씀하시는 한 가지 중요한 음성이 있습니다. 멧세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뭔 줄 아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예수님 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이라고 고백을 했다면 "그래? 그렇다면 내가 너의 주인이 되었다면 너는 말이야 이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야! 너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야"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어보셨습니까?
우리가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또 그 그리스도가 내 삶에 주인이 되었고 그를 내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다.
이 한가지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쓰여진 신약성경에 책 한 권이 있어요. 그것이 골로새서 라는 책입니다.  골로새서.
골로새서는 일반적인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하는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골로새서의 키워드가 하나 있어요. 아주 중요한 열쇠 단어가 있는데 그것이 충만이라는 단어입니다. 충만.
희랍어로는 "플레이로마" 플레이로마 라는 독특한 단어가 쓰여지는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충만이시다. 너희 안에는 이 하나님의 충만이 이제 거하신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쉽게 말하면 이런 말입니다. 너희가 예수를 주로 믿느냐? 그렇다면 모든 것이 되시는 예수님을 너희들이 소유했다면 너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것이 되신다. 그러면 모든 것 되시는 주님이 내 안에 있다면 그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의 신성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면 나는 부족할 것이 없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게 느껴 보셨습니까? 나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다.
성령 충만할 때, 소위 우리가 은혜를 체험할 때는 그런 고백이 나올 거에요. "아~ 정말 주님은 모든 것이 되시고요 저는 부족함이 없어요 저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에요"
우리가 이런 고백을 하는 순간 아마 여러분은 불청객이 여러분 곁을 다가와서 속삭이는 이런 음성을 동시에 들었을는지 모릅니다. "부족함이 없다고? 웃기지 마라, 너 돈도 필요 하잖아 돈, 그리고 넌 좋은 직장도 필요하고 그리고 네 자식도 문제가 많찮아. 네 삶에 얼마나 필요한 것이 많은지 알아? 웃기지 마라"
여러분 이렇게 말하는 음성을, 이렇게 속살거리는 음성을 여러분 들어보셨습니까?  누가 하는 음성이에요 이게? 사탄이 하는 음성이에요. 우리의 대적 마귀인 사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음성.
만약 우리가 이 음성을 듣고 마귀에게 동의를 하면 그 순간부터 여러분과 저는 소위 욕망의 포로가 돼요. "그래 난 아직도 더 많이 소유해야 해" 그래서 소유의 길을 향해서 우리가 달려가는 그 욕망의 포로 된 우리자신의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어떻게, 그러면 우리는 이 욕망에서 정말 자유할 수가 있을까요? 그 대답이 바로 1절이에요. 시편 23편 1절이 그 대답을 그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있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읽습니다. 1절만 다같이 1절 시작,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 우리가 이 고백을 하는 것은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라는 말은 내가 양이라는 말이에요. 나는 양이다, 성경이 인간을 묘사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표현중의 하나가 우리는 양과 같다. 양은 문제가 많습니다. 우선 양은 자구책이 없어요.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아주  연약한 존재죠. 양은 깨끗해 보이지만 너무나 쉽게 더럽힘을 타는 존재. 거기다 또 양은 방향감각이 없습니다. 갔다 놓으면 어디로 가는지 몰라요. 집을 찾아오지 못해요. 자기의 먹을 것이 어디에 있는지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양의 이런 모든 문제는 딱 하나만 있으면 완벽하게 해결됩니다. 뭐에요? 목자만 있으면 돼요. 자, 목자가 곁에 있으면 보호해 주지 않겠습니까? 더럽히면 씻어주지 않겠습니까?  또 필요한 것 있으면 먹여주지 않겠습니까?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지 않아요?
그러니까 양에게 있어서 목자를 만났다, 이것은 굉장한 사건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 만물을 붙들고 운행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십니다 라고 고백을 하면 그 순간부터 목자 되신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것 이에요. 그가 책임져 주신다면 우리가 뭐가 필요한 것이 있겠어요?  뭐가 필요합니까?

저는 제 인생을 이렇게 돌이켜 보았을 때 가장 제 삶이 비참했던 계절, 결혼 직전 이였던 것 같아요 결혼 직전이에요. 왜냐하면 그때 너무 가난했습니다. 진짜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해야겠는데 살길이 없어 보여요. 그때 제가 전도사 였는데 전도사 그때 월급이 뭐냐하면 만원이 안 되었어요.  8000원인가 9000원 받았어요. 그러니까 결혼은 지금 하자고 그러는데 여자가, 하하하~~
이게 먹여 살릴 방법은 없단 말이죠. 그래서 좀 천천히 하자! 난 좀 어떻게 우리 생활의 조건을 만들어 놓고 하자, 그런데 뭐 하나도 걱정을 안해요, 여자가. 그래서 하는 소리가 "제가 기도해 보았는데요,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  "뭐라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대요"
야, 내 눈에는 엽기적인 그녀로 보였습니다. 하하하~~ 참 대단한 여자 있다, 이상한 여자가 있다.
그런데 또 어떻게 생각하면 또 굉장히 믿음이 많은 사람, 여자 같이 느껴졌고 그런데 또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까, 뭐 저도 신앙이 있는 사람이니까 정말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면 뭐가 걱정이겠는가? 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에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면 정말 뭐가 걱정이겠느냐?  그러면서 그녀 안에 있던 어떤 믿음이 나에게 전위되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 맞아! 그렇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면 뭐가 걱정이야?" 제 마음에 어떤 믿음이 생기더라구요. 그런데 그 순간부터 자유가 오더라구요 자유.
뭐, 제가 지금 욕심이 없다, 그러면 완전히 욕심이 없다 그러면 그건 뭐 제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고, 그것은 지나친 과장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사실 그 때부터 상당히 자유해 졌어요. 물질에 관한한, 뭐 별로 관심이 없어요. 자유에요. 뭐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니까 필요한 것 있으면 주시겠지 뭐, 뭐 안주면 하나님이 안 필요해서 안 주시는 거고. 뭐 자유에요 굉장히, 굉장히 자유를 느껴요 그 부분에 관해서는.

요즘 이 시편 23편이 그 경상도, 전라도, 또 평양 방언으로, 사투리로 크리스챤 인터넷 싸이트에 막 돌아다닌다고 그러면서 어떤 우리 교회 어린소녀 자매 하나가 목사님 보시고 웃으세요 라고 하면서 보내 주었더라구요. 그런데 제가 아주 재미있어서 은혜 받았어요. 이렇게 시작 되더라구요. 저는 뭐 표준말 쓰는 사람이니까 잘 못하지만,
경상도 버전으로 이렇게 시작 됩니다.
"하늘님이 내 목자라 카니 내사 마 답답할 끼 눈꼽만큼치도 없는 기라" 하하하~~
뭐, 전라도 방언으로는요. "앗따, 여호와가 시방 나의 목자 신디 나가 부족함이 있것냐?" 하하하~~
네. 피양, 피양 버전으로는 "아 여호와가 내 목잔데 뭐이가 부족 하간, 그저 시퍼런 풀밭에 쉬라딜 않나 목마르면 그저 물가로 데려가딜 않나 야, 뭐이가 부족 하간?" 하하하~~~

그런데 중요한 것은 2절과 3절에 주어가 중요해요. 이 주어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주어가.
자, 1절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 그 다음 2절에 보시면 "그가" 이 원문에는 "그가" 라는 단어가 계속적으로 튀어나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그가" 나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 하시는도다
3절에 "그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그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여러분 인생의 주인이 누구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이 누구세요? 하나님이 그가 내 인생의 길에 목자가 되어주시고 나를 인도하신다면 그분이 책임져 주시다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뭐가 더 필요하겠어요? 정말 문자 그대로.
그렇습니다. 이 하나님을 목자로 신뢰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본질적으로 여러분과 저를 그 욕망의 늪 속으로부터 자유케 할 수 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때 자유가 오는 거예요. 그때 자유가 오는 거에요. 이 참된 자유는 욕망에서부터의 자유여야 합니다.

두번째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참된 자유는 두려움에서의 자유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참된 자유란 무엇이냐? 두려움에서의 자유다
미국에 대 경제공황이 찾아왔을 때 당시에 유명한 미국 대통령이 였던 루즈벨트는 미국 국민들에게 보내는 메세지를 통해서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가 이 순간 정말 두려워 해야 할 것이 있다면 두려움 하나뿐입니다. 두려움을 제외하고 두려워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 해야 할 것은 우리의 삶 그 자체, 또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그 문제의 그 자체라기 보다도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두려움이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이란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한번 두려움의 늪 속에 빠져 버리면, 두려워 하게 되면 이 두려움이란 것은 우리의 지성을 마비시키고 우리의 감성을 마비시키고 우리의 의지 우리의 판단력을 두려움은 다 마비시켜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려워 하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에 서 버리게 돼요. 그러니까 두려움이란 것을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래서 인간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의 심리, 이 심리를 이용해서 발달하고있는 가장 현대적인 산업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보험업입니다. 보험업.
우리가 집을 잃어 버릴까 봐 두려워서 주택보험을 들잖아요. 회재날까봐 두려워서 화재 보험 들고, 건강을 잃어 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두려움이 의료보험 갖게 만들고 이 자동차 타고 다니다가 사고 나면 어떡하느냐? 그래서 우리가 뭐 보험 들고, 자동차 종합보험. 또 공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산재보험을 들기도 하고, 이 두려움 때문에 생긴 것 아니에요? 그런데 뭐 축구 선수들은 이 발이 재산인데 발을 못쓰게 되면 끝나는 것 아니에요? 그래서 뭐 발을 보험에 든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은 이 손이, 손이 재산이에요. 그래서 손 고장 나면 끝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손 보험. 손가락 보험을 든다고 그래요. 그래서 나는 무슨 보험을 들어야 되나? 나는 주둥이 보험을 들까? 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만. 하하하~~ 이런 두려움이란 것은 인생의 도상에서 피해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손님 하나를 만납니다. 그 손님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두려움.

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시편 기자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인생을 살다 보면 어느날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요. 여기서 음침하다는 단어는 사실은 그림자라는 단어로 바꾸는 것이 더 좋습니다. 사망의 세도우(shadow), 그림자가 있는 골짜기. 우리는 죽음 자체를 아직 경험 하지 않았지만 죽음을 예고해 주는 어떤 그림자들을 인생의 길을 걷다가 느끼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병 날 때 질병, 사고 또 어느날 거울을 보면서 문득 느낀 것, 아 내가 늙어가고 있구나,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구나! 이게 죽음의 그림자들 이에요. 그러니까 두려움이 있어요 그때.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나는 두려워 하지 않는다. 그가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밀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해서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 다음에 대답이 나오죠? 그 대답은 무엇 때문이 였습니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 이에요.
우리가 시편 23편은 처음에 하나님은 나의 목자다. 하나님의 이미지를 목자로 출발시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목자만 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인생의 길을 걸어갈 때 줄곧 나와 더불어 동행하는 동행자가 되어주신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같이 걸어 주시고, 같이 걸어가시면서 우리와 함께 해주시고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 지팡이라는 것은 주로 방향 제시용으로 많이 쓰여지는 것이라고 그러고, 막대기는 어떤 야생동물이 짐승들이 공격할 때 적들을 쫓아버리는 그런 보호용으로 쓰여진다고 합니다. 이 하나님은 방향도 제시해 주시고, 보호도 해주시고 위로도 해주시고 뿐만 아니라 그는 원수에서 이렇게 우리를 지켜주시는 그 정도로 끝내는 것이 아니에요. 여기 약속은, 하나님의 약속은 인생 길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주님의 약속은 우리가 위험할 때 원수에게서 지켜주시는 그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후반부에 보시면 원수의 목전에서, 그러니까 원수가 보는 앞에서 보란 듯, 풍성한 식탁을 베풀어 주시고 당당하게 우리의 잔을 넘치는 은혜로 채워주시는 그런 분, 그러니까 그렇게 되도록 우리의 삶을 계속 인도해 주시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들의 삶이라는 것은 그냥 예수 믿고 죄 용서 받고 그냥 가까스로 천국만 가는 그 정도의 삶이 아니라는 거죠.
우리가 요한복음 10장에 보시면 거기서도 예수님이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이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요한복음 10장10절에 "내가 온 것은" 이땅에 온 것은 내양 된 너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생명만 얻는 것이 아니에요 구원만 얻는 것이 아니에요. 생명을 얻게 하고 그 다음에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아주 풍~성한 삶을 약속해 주시는 바로 그분, 네.
저에게 보내준 이 사투리 버전에 보니까 피양 버전에는 이렇게 되어있어요 피양 버전에, 재미 있더라구요. "보라우 그 아구 악적 같은 웬수놈 들이디 아 그 놈들 보란 듯이 내 앞에다 그저 잔칫상을 벌려주지 않았간? 그저 잔이 콸콸 넘치게 따라주시면서 그저 귀한 손님 대접하듯 하는 기야 야, 기리니 끼니 그저 생각해 보라우 얼마나 이 속이 쉬원했간, 긴대다가 야, 또 보라우 기거이 한번만 그러는기 아니래야, 그저 평생 내 편이래 그럼"  하하하~
여러분, 이 선한 목자가 우리 인생 길에 동행자가 되어주시고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가 우리인생을 축복으로 채워주신다면 왜 두려워 하십니까? 왜 두려워 하세요.
자, 두려움에서의 자유 그 자유의 비밀, 그것은 하나님이 내 인생 길에 동행자가 되어주신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두려움에서 자유한 존재로 살아갈 것을 믿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시편은 참된 자유라는 것은 죽음에서의 자유이여야 한다라고 가르칩니다.
참된 자유는 죽음에서부터의 자유 이여야 한다.
우리가 한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 모든 것에서 자유 한다 해도 만약 죽음에서 자유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자유한 존재가 아닐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사망이라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이 아담이후로, 아담 이래로 지금까지 살고있는 모든 사람 위에 죽음이 왕 노릇 한다. 로마서에 보면 그런 표현이 나오죠? 죽음이 왕 노릇 한다. 죽음은 가장 강력한 지배자다. 죽음은 가장 강력한 독재자다. 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확률은 100% 입니다. 1:1입니다. 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아무도 예외가 없어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여러 해 전에 미국에 한 코메디언이 그 말을 해 가지고 미국 사람들 가운데 그 말이 굉장히 유행했다고 그래요. "여러분, 우리가 결코 피해갈수 없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금 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국에서도 얼마나 악착같이 세금을 거두어 내는지 그것을 풍자한 비유겠죠. 지금 우리나라에도 이 세금 때문에 고생하는 분이 많습니다마는 그러나 더러는 세금을 피해갈 것입니다. 약삭빠른 꾀로 세금을 피해 갈 수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죠. 아무도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어떤 두려움, 어떤 죽음에 대한 불안, 죽음이 가져올 삶의 종국에 대한 그 어떤 무엇이 우리의 삶을 항상 속박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이 죽음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면 우리가 자유하는 인생이 될 수 없어요.
자, 어떻게 우리는 죽음의 속박에서 정말 자유할 수가 있을까요? 그 대답이 무얼까요?
바울 사도는 그 대답을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절 이하에 보시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그렇습니다. 이 장막 같은 우리의 육체는 반드시 무너지는 날이 찾아옵니다. "만일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집이 있는 줄 안다" 바울은 그래서 죽음 앞에서 나는 낙심치 않는다, 내 겉 사람은 후패 하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죽음 앞에서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노래했던 바울 사도의 고백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뭐냐하면 영원한 집을 예비해 두었다는 확신입니다. 영원한 집.
성경에서 죽음에 대한 여러가지 다양한 설명이 나타납니다마는 탁월한 설명 가운데 하나는 죽음은 이사 가는 것과 같다.  우리가 살고있는 집이 지금 새기 시작합니다. 벽이 흔들립니다. 금이 갑니다. 어떻게 해야 돼요? 뭐 수리 해야죠. 그러나 수리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은 새 집을 예비 할거에요. 그리고 드디어 준비해 두었던 새집으로 이사 가는 날 우리는 헌 집에 대한 어떤 연민, 또 헌집에 대한 향수, 또 헌집에 대한 집착은 있겠지만, 그러나 뭐 새 집으로 이사 가는 날 절망한다던지 통곡한다던지 그런 사람은 없지 않아요? 예비된 새 집이 있는 사람은 좀 살아왔던 집에 대한 섭섭함은 있지만 집착은 있지만 오히려 새로운 집에 가서 살 것에 대한 어떤 설레임, 어떤 희망, 어떤 기다림이 오히려 그 마음을 흥분 시킬 수도 있습니다.
저 유명한 독일의 나치 히틀러와 맞서서 싸웠던 "본 헤퍼" 목사는 감옥에 있다가 이제 드디어 나오십시요! 그것이 마지막 순간인 것을 알았어요. 그때 같이 있던 자기 동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본 헤퍼 목사가 남긴 교수장으로 떠나기 전에 남겼던 유명한 말, "친구 여러분들, 걱정하지 마십시요 저는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 떠나갑니다, 저의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이것은 그 영원한 집을 준비해 둔 사람의 당당함, 당당한  고백이 아닙니까 여러분?

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할 때 그 여행 가운데 그 백성들에게 최고의 위로가 있었다면 그것은 회막 안에 들어가는 경험 이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하다가 한 장소에 정지하죠? 그러면 가운데다가 회막, 혹은 장막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을 먼저 set up을 해놓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12지파가 쭉 캠프를 칩니다. 그런데 한복판에 회막이 있어요. 테브나클 혹은 미팅 플레이스, 왜 회막 이라고 불리웠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해서 제사장이 회막 속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선하신 하나님 인자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과 능력을 회막 속에서 경험하고 나와요. 그러면 그들은 다시 광야를 계속 여행할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함을 받습니다.
다윗이 시편23편을 기록할 때 아직 성전을 없었어요. 그때는 회막만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절에  "내가 여호와의 집에" 할 때 여호와 집은, 바로 그 회막을 말하고 있는 것이에요. 여호와의 집에 거하리로다, 영원히 거하겠다. 그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셨던 하나님이 인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이 마지막 집을 예비하십니다. 집을 예비하십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미지에 대해서 성경 학자들은 세가지 이미지가 있는데 첫째는 목자, 둘째는 뭐냐하면 "동행자", 그리고 세번째는 "호스트" 하나님은 목자가 되시고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뿐만 아니라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동행해 주시다가 인생의 길이 다할 때 마지막에 집을 준비해 놓으시는 우리의 호스트, 그리고 그 집에 들어서는 우리에게 "수고 많았지?" 그리고 우리의 잔을 철철 넘치도록 은혜로 채워주시면서 "수고 많았어 이제 푹 쉬어" 그리고 우리에게 안식을 예비하시는 그 분.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막에 들어갈 때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선하심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이 회막은 여호와의 집이였어요.
그런데 이 땅에 있는 여호와의 집은 장차 그들이 거하게 될 그 영원한 진짜 영원한 그 집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이 지상의 그 여호와의 집을 넘어선 그 영원한 집에 대한 소망을 노래합니다. 지금까지 선 하심과 인자 하심으로 나를 인도하셨던 그분이 이제 영원한 집으로 나를 인도하신다.
자, 마지막 절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나의 평생에 선 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여러분 이 소망이 있습니까? 그 집에 영원히 나는 거할 것이다! 그것을 믿으십니까 여러분?  나를 위해 영원한 집이 예비 되어 있다! 그러면 뭐 섭섭은 하죠, 죽는 것이. 그러나 자유가 있잖아요. 그리고 또 다른 설레임이 있잖아요. 사랑하는 자녀들과 통곡할 필요까지도 없어요. 아빠는 하나님의 집으로 가는 거야, 다시 만나야지.그 영원한 집 앞에서의 당당한 소망을 말할 수 있는 신앙, 이 죽음 앞에서의 자유를 약속하는 이 복음의 신앙.

미국에서 어떤 소년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여러가지 해 주지만 그 위로의 한계가 있잖아요 어머니가 너무 안쓰러운 마음이어서 아들 곁에서 성경말씀을 읽어줍니다. 시편 23편을 읽어주면서 사랑하는 아들아 이 말씀을 꼭 기억해야 돼, 네가 힘들 때 아파질 때 이 말씀을 생각하라, 여호와는 너의 목자시다! 여호와는 너의 목자시다! 하나님의 너의 목자가 되고 나의 목자가 된다면, 그 하나님이 인도해 주신다면,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거야, 그러면서 영어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이 다섯 단어로 되어있어요. 다섯단어.  The Lord is my shepherd. 이 다섯 단어로 되어있어요 다섯 단어. 
그래서 엄마가 얘, 너 다섯 손가락처럼 하나님이 이 말씀을 주신거야 꼭 기억해, the Lord is my shepherd. 손가락을 이렇게 만지면서 하나님이 네 목자란 것을 기억해, 우리말로도 되더라구요.주, 여화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렇게 하니 되더라구요. 네.
그런데 어느날 너무 아파하는 것을 보고 엄마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준비했던 반지 하나 링을 끼워주면서, 링을 네번째 손가락에 끼워주면서 그런데 네번째가 제일 중요해, 주 여호와 는 "나의, 나의, 너의" my, my shepherd, "너의 목자야 너의, 하나님이 너의 목자다" 이것만 확신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거야. 어느날 아파하면서 잠자리에 들었어요 아들이. 병석에 들었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자는 줄 알았어요.그런데 새벽에 보니까 벌써 아들이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데 사랑하는 아들의 이렇게 얼굴을  보고 손을 보다가 엄마가 깜짝 놀랐답니다. 뜻밖에도 이 세상을 떠나간 어린 소년 아들은 오른손으로 자기 왼손에 엄마가 늘 짚어주던 손에 네번째 손가락, 링이 끼워진 그 손을 잡고 숨을 멈추었던 것입니다. "나의 목자시니, 나의 목자시니"
하나님이 내 목자가 된다면 우리는 죽음의 다리도 찬양하며 건너갈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 무엇을 두려워 하겠습니까? 이 진정한 자유, 복음이 주는 자유, 이 자유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니 우리 민족이 여러분 정치가 바뀔 때 마다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새로운 기대를 갖지만 우리는 늘상 실망합니다. 해답은 정치에 있지 않아요. 목자 되신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 분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복음 안에서 진정한 자유한 민족이 될 것 입니다. 그러므로 복음만이 아직도 이민족의 소망이요 남북한의 소망이라고 믿습니다. 복음을 통한 자유, 이 자유의 삶이 이땅에 임하도록 이 복음의 능력을 선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부자유한 속박된 우리의 이웃들을 향해서 그리고 이땅의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칩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 목자 되신 하나님 주시는 자유의 삶, 이 삶의 축복이 여러분과 저의 몫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우리 다 일어나서 함께 기도하십시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때로는 내가 결박된 것을 느낍니다. 결박, 무엇인가 나를 결박하고 있어요.이 결박의 근본적인 원인은 죄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지만 죄가 아직도 끼치고있는 어떤 영향력 때문에 우리가 아직도 자유를 얻지만 부자유한 내 모습을 볼 수가 있어요. 욕심의 노예가 되고 두려움의 노예가 되고 죽음의 노예가 되어서 살고있는 내 모습.
하나님은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그가 나의 죄를 담당하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는 그 순간 그 흘려진 피는 우리를 자유케 하는 피가 되었던 것입니다. 인류의 자유의 역사 속에는 항상 흘려진 피가 있었습니다. 우리를 본질적으로 자유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주신 바로 그 분,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그를 주로 고백하고 신뢰하는 자마다 자유의 삶이 약속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자유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살아계신 그 분을 바라보시고 그 분이 목자가 되어 내 길을 인도하신다면 우리는 정말 자유할 수가 있습니다. 그 분에게서 시선을 떼어 버리면 자꾸 세상 속에 빠져 버리면 우리는 또 부자유 해져요.
하나님, 주님만 바라보고 살 거예요. 자유하게 살고 싶어요. 진정 자유한 삶, 그 삶이 우리의 삶이 나의 삶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통성으로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축복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정말 우리의 삶이 십자가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이 자유의 인생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 축복해 주시옵소서
오, 하나님 성령으로 역사하시고 주의 권능으로 함께 하셔서 우리가 정말 우리 마음속에 놀라운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주의 이름을 높여드리며 주님을 찬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오 성령 하나님 주의 능력으로 역사하시고 권능으로 함께 하시사 우리의 삶 속에 임재 하시고 역사하시는 주님 따라 걸어가는 우리의 인생이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네. "예수 결박 푸셨도다" 우리 함께 같이 찬양하시겠습니다.

예수 결박 푸셨도다 모든 결박 푸셨도다
나의 결박 푸셨도다 나는 자유 해

소리 높여 할렐루야 소리 높여 할렐루야
소리 높여 할렐루야 나는 자유 해

모든 영광 하나님께 모든 영광 하나님께
모든 영광 하나님께 나는 자유 해

찬양하리 영원토록 찬양하리 영원토록
찬양하리 영원토록 나는 자유 해

할렐루야! 옆에 사람들 보고 인사하시면서 "자유 하십시다" 인사 하세요 "자유 하세요" 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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