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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결혼의 의미 / 마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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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결혼의 의미
설교 본문: 마태복음 19: 3-9
설교자 : 이동원 목사 (지구촌교회)

저는 지난 주일에 인생을 모험이라는 관점에서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모험 가운데 가장 치열한 모험이 있다면 저는 그것이 결혼의 모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양 격언에 바다로 갈 때에는 한번 기도하여라. 전쟁터로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여라. 그러나 결혼식장에 나갈 때는 세 번 기도하여라. 이런 말이 있습니다. 결혼이라는 사건은 바다의 항해보다도 포탄이 나르는 전장보다도 더 치열한 더 위험한 모험의 장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노르웨이 극작가인 입센은 "결혼생활 이 거친 바다를 헤쳐갈 나침반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결혼의 제도를 처음 만드신 창조 주 하나님께서는 결혼의 바다를 항해할 그의 자녀들을 위해 정확한 나침반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통해 결혼의 명확한 의미를 알고 우리가 이 모험을 시작한다면 결혼의 모험은 단순히 불안한 모험이라기 보다는 좀더 기다려지는 좀더 설레이는 더할수록 흥미진진한 모험이 될 수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땅에서 결혼하는 모든 커플들 가운데는 세 커플 중에 한 커플은 결혼의 모험이 이혼이라는 비극으로 끝나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지켜 보아야 하는 가슴 아픈 시대 속에 살고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아~몇 달 전에 통계를 보니까 이 땅의 이혼율이 이제는 32.4%로 증가되었다는 이런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접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의 세대가 그렇게 안전한 세대가 아니라는 염려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누군가는 결혼이라는 단어를 정리하기를 결혼이란, "결, 결국. 혼, 혼자되는 것" 이라고 그렇게 정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하하~~
누군가는 푸시킨의 시를 이렇게 곡해 하여 읽기도 했습니다. "오늘 사랑하는 사람이 내일 남이 된다 하여도 그대는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지 말라 그것이 조물주의 뜻이라면" 
그러나 그것은 조물주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러나 오늘 이혼의 행렬 가운데 적지않은 그리스도인들 조차 가담 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비극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삶의 주인 되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결혼의 의미를 확인할 필요를 느낍니다.
이 교훈은 앞으로 결혼할 사람들을 위해서도 또 이미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결혼의 항해를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나머지 인생이 건강한 항해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할 숙제라고 믿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그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고 있었던 일종의 로마에서 임명된 분봉왕이었던 헤롯왕의 이혼 사건으로 전국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잘 아는 유명한 침례 요한, 세례요한은 그의 이혼과 불륜을 비판하다가 목숨을 잃어버리는 아픔을 겪기도 했었습니다.
그 당시 유태인들은 또 유명한 그 학자들이 힐렐과 샴마이라는 두개의 학파로 나뉘어져 논쟁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소위 힐렐 학파는 이혼에 대해서 좀더 관용하는 입장이였는가 하면 샴마이라는 학파는 절대로 이혼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이혼의 이슈를 갖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질문을 던집니다. 그것은 어떤 해답을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정치적 곤경 속에 몰아넣기 위한 위험한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태복음19장 3절에 "바리새 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라는 이혼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주님은 결코 이 질문을 피해가지는 않으셨습니다.
8절에서 예수님은 이혼은 인간의 죄성 때문에 허용될 수 밖에 없었던 필요 악과 같은 제도라고 주님은 분명히 밝혀 주십니다. 8절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8절입니다.
다같이 시작,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뜻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완악함 때문에 인간의 죄성 때문에 허용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제도가 이혼이었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절에서는 간음, 음행의 연고 외에 어떤 이혼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 일 수 밖에 없다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자, 9절을 한번 더 읽겠습니다. 9절 다같이 시작.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그러나 주님은 단순히 이혼이 가능한가 불가한가 이런 이슈에서부터 이혼의 문제를 접근하시기 보다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좀더 확인해야 할 중요한 물음은 그러면 애초에 처음에 결혼의 제도를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결혼의 의미, 그것이 무엇인가를 주님은 이 본문을 통해 밝혀주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5절에서 그 대답을 발견합니다. 자, 5절을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다같이 5절 시작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 가운데 세 가지 중요한 동사가 나타난 것을 발견합니다. 바로 이 동사 속에 우리는 결혼의 의미를 발견해 낼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처음에 "떠나" 그 다음에 아내에게 합하여. 두 번째 "합하여" 라는 단어가 강조됩니다. 그 다음에 한 몸을 이룰지니라 "이룬다"는 세 번째 동사가 강조되고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결혼의 의미, 이 말씀에 의하면 무엇일까요? 첫째로 결혼은 떠나가는 것입니다. 결혼은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결혼의 사회적 혹은 법적인 의미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부모를 떠나간다는 것이 의미하지 않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말은 우리가 부모를 버리거나 혹은 부모를 소홀히 여기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이 말씀의 좀더 깊은 의미는 결혼은 새로운 하나의 가정을 만들기 위한 제도적인 독립의 사건이라고 주께서는 강조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부모를 의존하고 살아왔던 자녀들이 이제 당당한 하나의 새로운 가정을 건설 하기위해서 무엇보다 요청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부모로부터의 심리적인 그리고 경제적인 독립의 필요성이라고 주께서는 가르쳐 주신 것 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결혼을 하면서 이렇게 선언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 그 동안 부모님의 은혜로 잘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여인을 만나 혹은 이 남자를 만나 우리가 결혼하며 우리의 힘으로 인생을 헤쳐나가고 살아나가겠습니다. 이것을 법적으로 선언하는 사건이 바로 결혼의 의미인 것입니다.
혼인신고서라는 것은 바로 이 법적인 독립이 이루어진 것을 사회적으로 선포하고 그리고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자녀들이 만약 계속해서 부모의 도움을 기대한다든지 혹은 부모가 자녀가 안쓰러워 계속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면 이것은 자녀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도 부모 의존적인 삶의 패턴을 형성할 것이고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를 벗어나있는 것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의 도움을 계속해서 구하고 있는 자녀들의 가정 혹은 자녀들이 안쓰럽다고 해서 계속해서 자녀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있는 그런 자녀들의 가정치고 여러분 건강한 가정을 보신 일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만일 우리 중에 누가 결혼을 하고도 부모를 계속 의존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하루 빨리 의존의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물론 자녀들이 안타까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한두번 도움을 주는 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자녀를 도움으로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를 의존하지 않고는 삶을 계속할 수 없는 그런 패턴을 만들 수 있도록 한다면 그것은 자녀를 망치는 부모의 삶의 행태일 따름입니다. 

저는 이땅을 살고있는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산 안 남기기 운동에 동참했으면 좋겠다는 기도와 생각을 언제가 하고 있습니다.
청교도들이 남겨준 중요한 전통 가운데 하나는 유산을 남기지 않는 것 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유산을 자녀들에게 남기기 보다 사회에 환원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나 교회 속에 환원하는 것이 청교도의 중요한 전통이었습니다. 그것이 결혼해서 자녀들에게 왜 중요할까요?
만약 재산이 좀 있는 부모들이 그 유산이 자녀들에게 오는 것을 자녀들이 알고있다면 그들은 삶을 계속하면서도 늘 하나님을 바라보기 보다 스스로의 삶으로 인생을 개척하기보다도 부모의 유산을 바라보는 그런 삶의 패턴을 계속 만들어 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어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저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늘 아이들과 이런 대화를 해 왔습니다.
"아들들아, 나는 말이야 아빠는 그리고 엄마는 너희들이 자라가는 과정에 있어서 공부를 하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 꺼야. 너희들이 공부하기를 원하는 만큼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아빠와 엄마는 최선을 다해서 너희들을 서포터하고 지원하고 도와줄 꺼야. 그리고 너희들이 결혼식을 할 때 까지 결혼식 비용까지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 꺼야. 그렇지만 결혼하면 그 다음부터 너희들은 전적으로 너희들의 삶을 살아야 하는 거야 아빠가 말이야 이 세상을 떠나갈 때 돈이 아마 조금 있을지 몰라, 그런데 그 돈은 아빠는 미리 유언서에 써 놓았는데 그것은 너희들에게 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이 아빠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빈 손을 가지고 태어났고 아빠는 세상을 떠나갈 때 빈 손으로 떠나갈 꺼야. 그 몫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아빠가 아빠에게 주어진 몫의 재산은 그리로 다 갈 꺼야. 그러니까 너희들은 결혼한 그 순간부터는 너희들의 힘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인생을 살아야 해 알겠니?"
적어도 일년에 한번씩 그런 얘기들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런데 둘째가 어느날 그러더라구요. 그 얘기를 듣더니 "아빠, 그러면 결혼하면 우리는 땡이야?" 하하하~~ "땡 이다" 그랬습니다. '땡'이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그 부모를 의존하는 의존의 끈을 일찍 끊음으로서 독립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진정한 의미에서 자녀를 도와줄 수 있는 부모의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은 떠나가는 것이라고 주께서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결혼은 떠나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결혼은 연합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다음에 "아내에게 합하여" 그랬습니다. 두 번째로 강조된 단어는 연합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결혼의 심리적이고 관계적인 의미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연합한다는 말은 본래 그 유태인들에게도,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이 옛날에 한지를 많이 썼는데 한지 비슷한, 그런 것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뭐 파피루스 같은 것도 많이 씁니다마는 이런 것들을 거기다가 아교풀 같은 것을 붙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한 장을 붙여요 그래서 두개의 종이를 아교풀을 붙여서 딱 붙어버리면 하나의 종이처럼 딱 붙어버리지요. 그래서 두 장의 종이나 파피루스를 한 장의 종이처럼 연결시켜 붙일 때 "붙인다" 이런 데서부터 연합한다는 단어가 유래한 것입니다. 자, 일단 붙어있는 두 장의 종이를 다시 분리시켜 보세요. 이것을 다시 분리 시킬려고 하면은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두 장이 다 찢어지고 맙니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결혼이란 무엇일까요? 일단 결혼해서 한 남자와 한 아내가 부부로 연합하게 되면 이 관계는 다시는 찢어질 수 없는 다시는 찢어져서도 안되는 그리고 그 사이에는 아무도 끼여들어갈 수 없는 하나됨, 그것이 바로 부부의 연합이요 결혼의 사건인 것입니다.
이것을 심리적인 의미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결혼이라는 것은 내가 부모로부터 떠난다,라는 사실만 강조하고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또 다른 이성, 내 삶을 함께 나눌 배우자를 찾아 그에게 소속하고 연합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존재의 깊은 곳에 숨어있는 가장 강렬한 욕구 중의 하나가 소속감이라고 말합니다.  Sense of belonging. 우리는 어딘가 누구엔가 혹은 어떤 공동체엔가 의미 있는 개인이나 단체에게 소속되지 않고는 사람의 마음은 안정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참 묘한 존재에요. 사람은 한편으로는 독립과 해방을 원합니다. 혼자 마음대로 살고 싶어해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 소속해서 안정을 찾고싶어 하는 역설적인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소속감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은 계속해서 방황일 수 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가정 사역자 가운데 조이스 렌돌프라는 여류 가정사역자가 있습니다. 이 분이 쓴 책 가운데서 이런 얘기가 나오더라구요. 자기 남편의 친구 가운데 한때 캘리포니아에 금융업계의 큰 손이었던 죠지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남자들은 이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누구나 이 사람을 부러워 했다고 합니다. 그는 밤마다 하나의 파티에서 다른 파티로 파티를 전전할 수 있었고 그리고 그의 주머니에서 캐시가 현금이 떨어지는 날이 없었고 그는 매일밤마다 섹스의 파트너를 바꾸어서 살수 있었던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현대판 돈주앙과 같은 사람이었고 모든 사람의, 남자들의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었던 일종의 플래이보이 비슷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가 어느날 이 조이스 부부를 찾아와서 이런 얘기를 하더래요. "친구들 나는 지치기  시작했다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너무나도 외롭다네. 이제 나는 한 여인과 정착하고 싶다네. 아침에 눈을 뜨면 말이야. 비록 섹스가 없어도 함께 웃어줄 수 있는 그리고 식탁을 함께할 수 있는 그리고 언제나 내 곁에 있어줄 수 있는  한 사람이 내게 필요하단 말이지"
그는 방탕한 삶을 살면서도 이 사람이 정말 그리워 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결혼을 통한 진정한 심리적인 하나됨, 연합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대 일의 연합, 아무도 그 누구도 그사이에 끼여들어갈 수 없는 연합의 갈망을 갈증을 그는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이에는 다른 이성은 물론 부모도 끼여들지 말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자식도 끼여들지 말아야 할 일대 일의 온전한 연합 그것이 부부의 연합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 드린 것처럼 부모는 자식들이 결혼하면 마음껏 진심으로 축복하면서 자녀들을 정신적으로 떠나보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사이에 끼여들지 않을려고 애쓰셔야 합니다.

한번은 미국 목사님이 주례를 하는데 너무 인상적인 주례사가 있었어요. 
제가 결혼식을 할 때에도 그 부분을 써 먹을까 생각을 했지마는 한국 문화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때문에 늘 주저하고있는 대목입니다. 이분이 주례하면서 미국 목사님이 이렇게 주례 하더라구요. 보통 결혼 예식 중에는 신랑신부의 서약이 있잖아요? 그런데 신랑신부의 서약이 끝난 다음에 양가의 부모님 일어나시라고, 그래서 양가의 부모님들이 다 일어났어요.
"양가의 부모님들 제가 묻는 질문에 서약하고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양가의 부모님들은 지금까지 여러분의 자녀들을 정성과 눈물로 아름답게 키워오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 성경의 말씀을 따라 자녀들을 떠나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정말 자녀들을 마음속으로 축복하며 떠나보내 주시고 그리고 자녀들이 온전한 연합을 이룰 수 있도록 자녀 사이에 끼여들지 않으시기로 부모님들은 서약하십니까?"
이것이 한국의 정서에는 어느 정도 다칠지 모르지만 이것은 성경적인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매우 중요한 교훈인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부사이에는, 부부사이에는 이러한 부모의 간섭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갈등들이 노출되고 있습니까? 자녀를 결혼을 시켰지만 끊임없이 뒤에서 자녀들을 리모트 콘트롤 하고 있는 부모들 때문에 겪는 심각한 고부의 갈등은 이 땅의 가정의 파괴에 만만치 않은 요인들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축복하고 떠나 보내주셔 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는 심지어는 자녀도 끼여들어서는 안됩니다  무슨 얘기 입니까? 한국의 자매들 가운데는 주부들 가운데는 일단 아기를 낳으면 그 다음부터 남편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을 갖지않고 자식들에게 집착하는 아내와 어머니들이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것도 위험한 것임을 아십니까? 자식을 낳아도 부부의 우선순위는 내가 일단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내 남편이에요. 그리고 내 아내에요. 자식들은 이차적 관심이 되어야 합니다. 자식들을 결코 소홀히 여기라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의하면 부부관계는 온전한 연합이어야 하기 때문에, 내 일생의 우선순위는 내 남편이고 내 아내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식을 낳았다고 해서 남편에 대한 관심을 자식으로 옮겨버리면 남편은 충족되지 않은 정서의 탱크가 그 마음 속에 있는 정서의 저수지가 메말라 가기 시작합니다. 그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남편들은 그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 다른 시선을 옮겨 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많은 가정의 위험한 시그널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결혼이란 것은 심리적이고 관계적인 일대 일의 한 남자와 한 여인의 온전한 연합이어야 한다라고 성경은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다음에 아내에게 "합하여" 오늘 여러분의 가정 가운데 또 여러분의 자녀의 가정 가운데 이런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혼이란 무엇일까? 결혼은 떠나가는 것입니다. 결혼이란 연합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결혼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어떻게요? "떠나" 그 다음에 아내에게 "합하여" 그 다음에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 세 번째로 결혼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결혼의 역사적이고 실존적인 의미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역사적 의미라니? 실존적 의미라니? 너무 말이 거창해, 거창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여기서 한 몸이 된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는 성적인 교제를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교란 것은 부부 안에만 허락된 창조주 하나님의 특권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부의 성행위가 역사적 의미를 갖는 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성의 본래의 목적, 성경에 의하면 성을 허락하신 본래의 목적은 창조주의 목적은 생육함과 번성함이라고 가르칩니다.
다시 말하면 부부의 성적 교제를 통해서 자녀가 출산합니다. 그리고 자녀가 양육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녀를 낳고 자녀를 키우는 행위는 우리의 가정의 가정사 만이 아니에요. 우리가 기르는 자녀들이 우리 사회의 미래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키워내는 자녀들이 우리의 다음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의 출산행위와 자녀의 양육행위는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라 이것은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혼이란 장난이 아니에요 결혼은 게임이 아닙니다. 결혼은 엄숙한 역사적 책임을 동반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결혼에 임하는 사람들은 이 자녀를 통해서 내가 내일의 역사를 만든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만든다 이런 역사적 소명감을 느낄 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부의 성행위는 출산 이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뜻을 갖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부부로 하여금 성행위를 통하여 즐거움을 누리도록 의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잠언5장15절 이하에 보면은 결혼한 아들에 대해서 아버지가 주는 지혜로운 충고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결혼한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결혼한 아들에게 이제 아버지가 교훈을 보냅니다.
내 아들아,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이것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부부의 결혼생활을 매우 아름다운 은유적인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다른 샘 가지말고,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셔라.
그 다음절에는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이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제가 북한 갔더니 리해가 되십니까 그러더라구요 리해가 되십니까? 한번 따라서 해보세요. "도랑물을 거리로 흘리지 마십시다" 네, 부부가 같이 오셨으면 아내가 남편보고 이 시간 한번 그렇게 말씀해 보십시요. 자 시작, 한번 해보세요 옆에 있는 남편에게, "도랑물을 거리로 흘리지 마세요" 시작, 하하하~~
아, 챤스는 기회다! 이게 기회인데 이럴 때 안하시면 언제 해요?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죠? 이것을 자세히 제가 설명을 해야겠습니까? 하하~~
그 다음 계속되는 말씀에는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그랬네요. 또다시 "나누지 맙시다" 하하~ 자, 또 같이 오셨으면 남편보고 한번 더 이럴 때, 이 남자들이 문제가 더 많으니까, 자, 아내 여러분이 남편에게 "나누지 마세요" 시작, 하하~ 참~ 이럴 때 못하면 언제 해요? 녜,
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다음절에 보시면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 하라" 이 아내를 엔죠이 하라 그랬어요. 다른 영어성경 번역에 보시면 "satisfy" 만족하게 하라는 말씀으로 기록되어있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부는 부부의 성적 교제를 통해서 진정한 삶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성적 즐거움을 통한 고독의 극복이야말로 결혼이 존재하는 실존적 의미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부는 서로의 성적 요구를 거절하지말고 수용할 줄 아는 이러한 아름다움이 피차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속에 부부들을 향한 편지 가운데서 기도할 잠시의 틈을 얻기 위한 예배를 빼놓고는 부부는 분방해서는 안된다 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생활을 통하여 남편으로서 혹은 아내로서 부부사이에 진정한 사랑을 주고 받음으로서 사랑 받고 또 사랑을 누리는 존재로서의 자기확인, 바로 이것을 위해서 주님은 결혼을 허락하셨다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결혼을 통해서 이런 의미들을 성취해 갈 수 있다면 이런 결혼이야말로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부부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결혼의 의미를 분명히 깨닫고 그 의미를 만족시키기 위한 책임과 노력을 다할 수가 있다면 이런 가정이야말로 지상의 작은 천국일수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이혼은 결코 하나님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말라기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고 그랬습니다. 미워하신다는 단어가 매우 강력한 단어가 쓰여졌습니다. 영어에 "hate"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 이 말은 이혼 자를 미워하신다라는 말은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혼한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이혼한 사람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다시 제기하기를 하나님은 소망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혼 그 자체는 미워하신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혼은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적인 계획을 파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혼은 가정을 통해서 우리가 누려야 할 진정한 삶의 풍성한 기쁨을 박탈해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혹시 다소나마 결혼생활의 위기를 겪고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저는 여러분들이 한번 십자가 앞에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앞에. 왜 십자가 앞에 나와야 할까요? 오늘 성경에서도 본문에서도 주님이 말씀하셨지만 이혼이 발생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완악함 때문에, 다시 말하면 죄가 원인인 거에요. 죄!
이 죄는 때로는 이기심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이 죄는 때로는 학대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이 죄는 때때로 불친절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관계를 흔들고있는 모든 욕망의 밑바탕에는 바로 죄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하나님이 그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시고 그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신 것, 우리의 죄 때문이에요. 우리의 이기심 우리의 욕망, 우리의 정욕, 우리의 모든 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라면 오늘 다시 그 십자가 앞에 서 보십시요.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떨구고있는 그 분을 바라보십시요.
그분이 나의 죄 때문에 나의 이기심 때문에 나의 욕심 때문에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계시다면 그 피로 다시 한번 죄 사함을 받으십시요. 그 피로 나의 용서를 확인 하십시요. 그리고 동일하신 그리스도의 보혈이 여러분의 배우자를 씻을 수 있고 새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다면 십자가 앞에서 저는 회복되지 못할 가정은 없다고 믿습니다.

제가 한번 미국 시카고에 어떤 집회 인도하다가 한 부부의 가정에 초청을 받았어요. 너무너무 아름다운 집에 살더라구요. 아주 아름다운 레이크사이드에 정말 아름다운 집에 사셨습니다. 그러나 집보다도 그 집안에 들어가 보니까 이 부부의 삶을 사는 모습이 아주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아주 부부의 태도가 싱글벙글 아주 성령 충만한, 아주 아름다운 향기를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그 현관쪽으로 부엌쪽으로 들어오다가 보니까 그림하나가 붙어있는데 그 그림이 제 시선을 끌었습니다. 사진 같기도 하고 페인팅 같기도 했는데 사진과 페인팅이 가만히 보니까 결합된 것이었어요. 십자가를 그려놓고, 그 십자가는 그렸더라구요. 아주 잘~ 인상 깊게 십자가를 그려놓고 십자가의 양 날개에 부부의 사진을 딱 붙여놓았습니다. 환하게 웃고있는 부부의 사진.
그래서 "아주  재미있는 그림이네요?" 제가 그러니까 "이 그림이 사연이 있지요" 그러더라구요 남편이. "무슨 사연입니까?" 그러니까 아주 겸연쩍은 표정으로 "목사님, 실은 저의 부부는 삼년 전만 해도 저의 부부의 부부관계는 지옥이었습니다" "어떻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좀 간증을 해도 될까요?"  "아이 그럼요" 간증을 시작해요.
긴 얘기를 짧게 줄이자면, 3년 전에 그 부부는 이혼의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별거하고 있었어요. 분리되어 있었어요. 미국에는 일정한 별거시간이 지나면 그 다음에 자동적으로 이혼이 됩니다. 그 다음에는 서명하고, 변호사 앞에서 싸인 하고 그 다음에 이제 이혼이 되는 거죠. 그런데  마지막 서명하고 정식으로 법적으로 헤어지기 며칠 전, 남편의 마음 속에 아주 부담이 되더래요. 우리의 관계를 이렇게 끝내고 말아야 하는가? 자식 낳고 살아온 10년 이상의 삶, 그런데 우리 부부관계가 이렇게 청산 되어야 하다니, 마음이 너무 아프고 무겁더래요. 그러면서 갑자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나더래요. 그때 이 남자는 교회조차  멀어져 있었습니다. 다시 전에 나갔던 교회의 새벽기도에 나갔습니다. 새벽기도에 거의 끝날 때 즈음을 선택해서 갔대요. 왜냐하면 사람들 만나는게 싫어서 다 빠져 나올 무렵에, 가니까 한 두 사람만이 있더래요. 맨 앞으로 나왔습니다. 은은한 십자가의 불빛 앞에 엎드려 기도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삶을 내어놓고 이렇게 기도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나오더래요. 자기가 살아왔던 삶의 헛된 모습들이 보여지기 시작하고 그러더니 기도하다가 십자가를 보니까 그 십자가에, 아무것도 없는 십자가인데 예수님이 달리시는 모습이 환상처럼 나타 나더래요. 거기서 피를 뚝뚝 떨구고 계시는 예수님, 왜요? 왜요? 그러다가 그는 스스로 대답하기를 내 죄 때문이지요. 나도 알아요. 제 욕심, 제 정욕, 제 고집, 제 이기심, 지금까지 그는 부부관계가 어려워진 것은 아내의 독특한 성격 때문이라고 늘 주장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 자기의 죄를 바라보면서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이런 기도를 하고 있었더래요. "하나님 제가 더 잘못했어요" 제가 더 잘못했어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남편이 이런 기도를 하고 있었을 때 아내가, 남편이 들어온 좀 후에 그 예배당에 들어왔다는 거에요. 아내는 아내대로 마지막에 싸인 하는 날짜를 앞에 두고 또한 그 마음 속에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아내는 계속 그 교회에 나가고 있었는데 그날 따라 좀 늦게, 늦게 왔대요.
아내도 아이들 학교 보내고 좀 늦게 교회당에 도착해 보니까 앞에서 훌쩍이고 통곡하는 어떤 남자의 목소리는 그녀에게 익숙한 목소리 였대요. 아니 남편이? 그런데 남편의 기도 속에서 이런 말이 계속 들려 오더래요. "하나님 제가 더 잘못했어요" 제가 더 잘못했어요.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아내는 오열하기 시작했습니다.
따져 보고 생각해보니까 남편뿐만 아니라 자기도 실수를 했던 자기의 모습들이 십자가 앞에서 보여지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남편이 기도하고 있는 앞으로 달려왔답니다. "여보! 저에요" "아니 당신이?"  두 사람은 예배당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함께 무릎 꿇고 부등켜 안고 통곡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부부는 그 새벽 손잡고 나왔답니다. 다시 해보자고, 그리고 하나님은 정말 놀랍게 이 부부를 회복시켜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요. 그 다음부터 이 부부는 새로운 언어를 배웠답니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요. 여보 내 책임 이에요. 나는 당신이 필요해요"
이 언어를 통해서 부부는 회복되기 시작했고 이 부부가 잘 알고 있었던 화가에게 어느날 부탁을 했대요. 바로 일년 전에, 제가 방문하기 일년 전에 부탁을 해서 그림을 하나 그려달라고,
어느 정도 그 가정이 정말 아름답게 회복을 시작한 다음에 두 사람이 알고있는 painter에게 화가에게 부탁을 해서 십자가를 그려달라고 그리고 양쪽에 부부의 사진을 붙이겠다고, 왜냐하면 십자가 아래서 우리부부는 이렇게 화목했다. 십자가 아래서.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가정에 위기가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가정을 그렇게 흔들어 놓았을까요? 따지고 보면 우리의 연약함 더 따지고 보면 우리의 허물과 죄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나의 연약함 우리의 죄를 들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어십시요. 그리고 십자가 앞에 피 흘리고 있는 그 예수그리스도의 용서와 용납을 구하십시요. 그 피가 여러분의 죄와 여러분의 허물을 씻는다면 그 보혈로 말미암아 그 사랑 안에서 회복되지 못할 가정은 없다고 믿습니다. 이 회복의 은혜가 치유하시는 사랑이 우리의 가운데 함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십시다. 다 일어나시겠습니다.
둘이 한 몸 되어 천국 같은 가정 이루고 살라고 주께서 부탁하셨지만 때로 쉽지 만은 않은 그 부부관계. 그래서 흔들리는 가정의 모습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하나님 그리고 회복시켜주세요. 오늘 이렇게 기도하신다면 십자가 아래서, 눈부신 회복의 은혜가 함께 할 것입니다. 통성으로 이 시간 우리의 연약함을 내어놓고 우리의 가정을 위해 또 여러분의 자녀들이 나중에 이룰 그 가정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이 시간 귀한 말씀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정의 현장을 돌아봅니다. 하나님 우리가운데 너무나 가슴 아픈, 갈등하고 고뇌하는 가정들이 있사오니 주님 긍휼히 여겨주시고 은혜를 부어주시고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전보다 더 아름답고 건강한 가정으로 회복되어 인생의 남은 날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 도와 주세요.우리의 손을 잡아주세요. 오 하나님 가정마다 주의 은혜와 사랑을 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복음 송 152장 아주 먼 옛날, 가사의 뜻을 기억하며 함께 부르시겠습니다.
"아주 먼 옛날"
아주 먼 옛날 하늘에서는 당신을 향한 계획 있었죠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며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네
이세상 그 무엇보다 귀하게 나의 손으로 창조하였노라
내가 너로 인하여 기뻐하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사랑해요 축복해요
당신의 마음에 우리의 사랑을 드려요.

사랑해요 축복해요.
당신의 마음에 우리의 사랑을 드려요.

우리 손잡고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손잡아도 괜찮은 분들이면 옆에 있는 분들 손잡고 부부는 꼭 좀 잡고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외로운 인생길 외롭지 말라고 부부 삼아주시고 가정을 만들어주신 주님 그런데 때로는 우리 인간성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저질은 잘못 때문에 우리는 가정의 위기를 초래하고 또 가슴 아파하며 상처를 주기도하고 받기도 하는 삶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십자가 아래에 섭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시던 주님 그 피로 우리들의 아픔과 우리들의 죄와 우리들의 허물을 이 시간에 씻어주시옵소서. 그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설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아무도 나눌 수 없는 그 누구도 우리 사이에 끼여들 수 없는 그 온전한 연합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렇게 손잡고 나머지 인생길 믿음으로 소망으로 사랑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또 우리 자녀들이 이러한 건강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미 가정에 흩어지는 깨어지는 아픔을 겪은 분들에게는 회복의 은총을 속히 허락해 주시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케 하심과 화평케 하심이 말씀을 붙들고 다시 삶의 장으로 나아가는 지구촌 교회의 모든 가정마다 또 모든 우리의 삶의 현장마다 사업의 장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 해주시기를 간절히 축원 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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