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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들으소서 / 행 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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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들으소서
<본 문> 행 7:1-10


예루살렘 성전은 지금부터 3천년 전-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1천년 전, 당시 이스라엘 왕이었던 솔로몬에 의해 건축되었습니다. 그는 성전을 짓기 위하여 온 국력을 다 기울이다시피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공사에 필요한 나무는 모두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용하였는데, 이를 위하여 솔로몬은 3만 명의 군인들을 차출하여 1만 명씩 세조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각 조 1만 명을 매달 번갈아 가며 레바논에 보내어 백향목을 벌목케 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일군으로 동원된 자의 수는 7만 명, 산에서 돌을 뜨는 인부는 8만 명이었으며, 그 많은 인원을 감독하는 관리의 숫자만도 3천 3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동원된 공사가 무려 7년간이나 계속 되었으니, 그 공사의 규모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웅대한 건축물인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되자 솔로몬은 하나님께 성전을 봉헌하면서 감격의 기도를 드렸는데, 열왕기상 8장 27절을 보면 그의 기도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인간으로서 최초로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했던 솔로몬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무려 18만 여명이 넘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7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건축한 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건축물 속에 갇히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온 우주일 망정 그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용납할 수 없거늘, 하물며 자신이 지은 건축물이야 두 말할 나위가 없음을 솔로몬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왜 그처럼 온 국력을 다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겠습니까? 그 해답은, 열왕기상 8장 28절-30절에 계속 이어지고 있는 솔로몬의 성전 봉헌기도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곳에만 계실 것이라 착각한 까닭이 아니라,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기에 온 우주를 품고 계시는 하나님을 특별히 경배하는 장소로 성전을 이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성전에서 예배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므로 성전 밖 일상생활 속에서, 언제 어디서나 인간과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봉헌기도를 끝낸 솔로몬은 성전에 모여든 백성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습니다.

'그런즉 너희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화합하여 완전케 하여 오늘날과 같이 그 법도를 행하며 그 계명을 지킬지어다'(왕상8:61)

즉 자신이 건축한 성전으로 인해 백성들이 매일의 삶 속에서,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과 더욱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당부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주요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400년이 지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예루살렘 성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7:4)

참으로 폭탄과도 같은 선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 치고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의 전이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이란 하나님의 전과 동의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라 선언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하나님의 전이라 부를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 속에만 계신다는 의미로 그릇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건축한 당사자였던 솔로몬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지은 건축물 속에 갇히시는 분이 아님을 성전 봉헌식장에서 분명히 밝혔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성전으로 인하여, 일상사 속에서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은 그 웅장하고 신비스러운 성전 속에만 계시는 분으로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그릇된 인식은 필히 삶의 이중성을 초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는 성전 속에서의 행동과, 상대적으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성전 밖에서의 삶이 일치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성전 속에만 계신다는 잘못된 인식은 사람들이 성전에 열심히 나가면 나갈수록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더욱 동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전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또 600년이 흘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 속에 가두어 두고 있었습니다. 결코 인간에 의해 특정한 장소에 갇히실 수 없는 하나님을 말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가 경배드리는 하나님이란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의 편견과 무지 그리고 독선이 빚어낸 우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주님 보시기에 그들이 그곳에서 드리는 예배란 위선의 향연이었고, 웅장하기 그지없는 예루살렘 성전은 실은 강도의 굴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루살렘 성전의 장엄함과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13:2)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성전이라 애지중지 하는 건축물을 성전이라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건물이라 부르셨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그것은 인간이 지은 다른 건물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건물이 아무리 웅장하다 할지라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손으로 성전을 손수 허물어뜨리시겠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마치 그 속에만 계신 것처럼 진실을 왜곡하면서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장애물이 되는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에 의해서 반드시 용도폐기 될 것임을 주님께서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기에, 살아 계신 하나님에 의해,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왜곡시키는 예루살렘 성전은 폐기 될 수밖에 없음을 주님께서 일깨워 주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우리는 비로소 요한복음 2장 19절-22절의 의미를 바르게 터득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더럽히고 있는 장사군들을 다 내어 좇으셨습니다. 분노에 찬 유대인들이 도대체 무슨 권세로 그같은 일을 하는지 표적을 구하자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당신 자신이 곧 표적이라 대답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죄 값을 치러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제물이 되셨다가 죽음을 깨트리고 부활하시사,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길을 제시해주는 것보다 더 큰 표적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리켜 성전이라 부르신 것입니다. 솔로몬이 지성으로 만들고 헤롯이 수십 년에 걸쳐 재건하였으며 지은 지 1천 년이나 되는 유서 깊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주님께서는, 인간이 지은 거대한 건축물이 성전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성전임을 밝히시므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중심의 문제라는 것을 분명하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바꾸어 말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특정 공간이 아니라, 당신의 삶으로 친히 하나님을 계시해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곧 부활하시어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영이 계시는 곳이 어디이든 성전이요, 중심으로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곧 그 사람이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전은 특정 공간이나 건축물이 아니라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 사람만, 언제 어디에서나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바르게 이해했던 사도 바울은, 그래서 고린도전서 3장 16절-17절을 통하여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는 거룩하게 제사를 드리면서도 성전 밖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돌로 치는 일에 앞장섰던 바울이, 주님을 만난 이후 죽을 때까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일관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모신 자기자신이 곧 성전임을 바르게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일단의 유대인들이 초대교회 7집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 집사를 모함한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스데반 집사를 아예 죽여버리기 위하여 거짓 증인을 내세워 스데반을 재판정에 끌어갔고, 거짓 증인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헐어버릴 것이라고 스데반이 설교했다는 위증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을 때에도 그들은 똑 같은 내용의 거짓 증인을 내세웠던 바, 그들은 지금 동일한 거짓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이제껏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단 한번도 성전을 헐어버릴 것이라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성전의 참 의미를 일깨워 주시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 장애가 되는 것이라면 그 명칭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살아 계신 하나님에 의해 폐기 될 것임을 예고하셨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여,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의 대적자요, 스데반은 그 하수인인 것처럼 몰아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전일 수 없도록 만든 장본인이 그들 자신이었음에도 말입니다. 참으로 적반하장이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대 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재판정의 우두머리인 대제사장은 절차에 따라 스데반에게 증인들의 고소내용에 대한 진술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스데반은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하며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사도행전 7장 전체를 통해,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하여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1천 년에 걸친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셨던 구원의 역사를 간략하면서도 명쾌하게 언급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무리들이 과연 무엇을 귀기울여 듣기를 원했겠습니까?

스데반이 자신의 진술, 아니 설교를 통해 거명한 조상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아론,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이렇게 총 9명이었습니다. 이 가운데서 예루살렘 성전을 직접 건축했던 솔로몬을 제외한 나머지 8명은 아무도 그 성전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 이전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자신을 모함한 무리들에게 들려주기 원했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세우기 전부터 구원의 역사를 베푸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하란에서 구원해 내셨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의 시기심에 의해 종으로 팔려간 요셉을 에집트에서 국무총리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팔십 노인의 나이에 양치기에 불과하던 모세를 미디안 광야에서 출애굽의 대 지도자로 불러내셨다는 것입니다. 400년 동안이나 노예생활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로부터 해방시키시고, 40년 간 광야에서 그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입성하던 여호수아와 동행 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의 목동이었던 다윗을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메소포타미아에서, 에집트에서, 미디안에서, 광야에서, 가나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베푸신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 무소부재 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그의 설교 말미인 46절-50절에 이르러, 다음과 같이 결론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결코 예루살렘 성전 속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시라는 것, 그러므로 참된 신자는 오히려 성전 밖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바로 이것이 스데반 집사가 무리들에게 전하기 원했던 진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라는 간곡한 당부와 함께 그의 말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진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자기중심에 모신 성전으로 자기자신을 가꾸어 갈 방법이 따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해 성전을 인간중심의 차원이 아니라 특정공간의 차원으로만 이해하는 한, 그 공간 안과 밖에서의 삶이 일치될 수 없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외식하는 자'-즉 위선자 이상일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은 스데반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듣기는커녕 오히려 스데반을 돌로 쳐죽임으로서, 자신들을 하나님 앞에서 참 성전으로 바로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단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인간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 속에 갇혀 있는, 하나님 아닌 그들의 우상을 섬기는 일에 열심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40년 후, 그들이 그토록 신앙심으로 경외하던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제국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으리라던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가두어 두려고 했던 그들은, 성전이어야 할 자기 자신과, 그들이 사랑하던 예루살렘 성전을 동시에 모두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2천 년 전 이야기인 것만은 아닙니다. 지난 2천 년에 걸친 교회의 역사가 실은 본문에 나타난 이야기의 반복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유럽의 곳곳에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그러나 그 속에 신자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거대한 성당들이 바로 그 증거들입니다. 박해 받던 기독교가 주후 313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공인된 이후, 교회는 그 당시 기독교 세계였던 이곳 유럽 땅 위에 쉬임 없이 성당을 건축해 왔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성당 속에만 거하시는 것처럼 성당 세우는 일에 온 열과 성을 다 바쳤습니다. 그로 인해 교회는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성전으로 세워주는 일에 소홀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유럽교회는 성당과 교인을 동시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교인은 없이 관광객만 붐비는 성당은 더 이상 참된 의미의 성전일 수가 없는 연고입니다.

한국인인 우리가 이것을 단지 유럽교회의 이야기만으로, 또는 우리가 개신교도이기에 천주교의 문제만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2천 년 교회역사의 흐름 위에 서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천주교의 발자취는 바로 우리 자신의 과거요, 유럽교회의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입니다. 지난 500년에 걸친 개신교회의 역사뿐만 아니라 선교 2세기에 접어든 한국교회의 역사 또한 천주교의 답습에 지나지 않는 바에야 무슨 말을 달리 할 수가 있겠습니까? 기독교의 중심지인 동시에 종교개혁의 발상지였던 이 유럽에서, 오늘날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형식적인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러나 어느 쪽이든 예배당이 텅 비어 가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대부분의 한국교인들이 지금처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자기중심이 아닌 특정공간의 차원으로 이해하는 한, 한국교회의 내일의 모습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스데반은 우리를 향하여 제발 좀 들으라고 간곡하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곳 오비브 교회 예배당에 앉아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곳에만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기 모인 까닭은, 이곳에서 하나님을 힘입어 일주일 동안 예배당 밖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참된 성전은 벽돌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계시해 보여주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벽돌로 지어지는 성전은 시간이 갈수록 퇴락 할뿐이지만, 우리의 중심이 성전 된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성전은 결코 건물이 아니라, 진리를 좇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이 세계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사도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비록 무식할 망정 그들 자신이 성전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더 이상 건물로 지어진 성전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성전으로 세워진 사람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자신을 성전으로 세우지 아니한 모든 삶은 실은 허무로 끝나고 맙니다. 왠지 아십니까?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화요일(17일) 새벽 터키를 강타한 지진에서 보고 있지 않습니까? 불과 45초간의 지진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는지 닷새가 지난 지금까지 그 정확한 숫자마저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현재 발표 된 사망자의 숫자만 1만 3천 명을 넘고, 3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는 매몰자도 거의 사망한 것으로 추정, 구조대마저 철수하고 있는 정도이니 두말 해 무엇하겠습니까? 인간은 어느 날 엄습하는 죽음 앞에서는 다 그처럼 무력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을 성전으로 세운 사람은, 그가 중심에 모시고 있는 하나님이 영원하시기에, 그분을 힘입어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신이 성전이었던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천사와 모습으로 죽음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가 중심에 모시고 있는 그분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분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 자신을 영원한 성전으로 세워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지금 유럽의 한 가운데에 있습니다. 건물로 된 성전 짓기에 열심을 다 하느라 자신을 성전으로 세우지 못해, 자신과 성전을 동시에 상실한 유럽교회에 둘러 쌓여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 자신의 과거요, 오늘 나의 실상이오, 내가 결단하지 않는 한 내일 나의 모습일 것임을 고백 드립니다.

주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내 중심의 문제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나 자신임을 망각치 말게 하옵소서.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나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날마다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므로, 지금 내가 거하고 있는 이 스위스에, 유럽 대륙에, 진리의 빛을 발하는 성전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땅 위에서 진리의 전으로 여한 없이 살다가 나의 호흡이 끝나는 순간, 내 중심에 계신 주님을 힘입어 죽음을 뛰어넘는 영원한 성전-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이 되게 하옵소서.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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