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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 나음을 / 행 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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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다 나음을
<본 문> 행 5:12-16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믿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목숨을 잃는 불미스런 사건 이후에 나타난 예루살렘 사람들의 반응을 본문 12-14절이 다음과 같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기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러라'

첫째, 본래 예루살렘 교회에 소속되어 있던 교인들은 한 마음으로 더욱 열심히 솔로몬 행각에 모였습니다.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는 것은, 3월 둘째 주일 사도행전 3장 11절-16절을 살펴볼 때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교인들이 사도들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힘써 배웠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로 아예 교인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교회에 완전히 등을 돌려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교회 내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과 같은 불미스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야말로 교회를 비판하고 부정할 좋은 구실이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셋째는 교회의 일원이거나 반대자도 아니면서, 그저 구경군의 입장에서 교인들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믿지 않던 삶을 청산하고 적극적으로 믿음의 무리에 합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네 갈래의 반응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에 새로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오늘의 본문에 유의하고자 하는 것은, 주님의 병고침의 역사는 이들 중에 이미 믿던 자이건 혹은 새로이 믿음에 합류한 자이건 간에, 오직 믿는 자에게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교인들과 상종도 하지 않을 정도로 교회에 등돌린 사람이거나, 그저 구경군의 입장에 서있는 사람에게는 그와 같은 치유의 역사가 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여기에서 '침대'로 번역된 klinarion은 본래 침대를 가리키는 klinee의 지소사입니다. 지소사가 무엇인지는 2주 전에 설명 드린 바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정상적인 침대로는 분류될 수 없는 초소형 침대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또 '요'로 번역되어 있는 krabbatos는 우리가 생각하는 요가 아니라, 야영용 간이침대를 의미합니다. 평소 침대 축에 끼일 수도 없는 극소형 침대나 혹은 간이 침대에서 잠을 자야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그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가족들은 병자를 병상에 누인 채로 사도들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어 사도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환자의 병상을 베드로가 지나가는 길목에다 두었습니다. 혹 지나가는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환자에게 덮인다면 환자가 나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베드로라는 한 인간의 능력을 우상시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베드로라는 인간을 도구로 삼아 역사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그만큼 티없이 믿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16절이 그 결과를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을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바랐던 사람뿐만 아니라 믿고 나아 왔던 자들은 다 나음을 얻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예외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나음을 얻었다는 동사 therapuo는 원문에 물론 수동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 낫게 된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나음을 입었다는 뜻에서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동사의 원 뜻이 '섬기다' '봉사하다'는 뜻이란 사실입니다. 따라서 원문의 본 의미는 믿고 나아온 자들이 다 섬김을 받았다는 뜻이 됩니다. 누구에 의해서 말입니까? 두말 할 것도 없이 주님의 의해서, 주님의 섬김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0장 28절을 통하여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까닭은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을 섬기기 위함이심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믿고 나아간 모든 자들이 '다 나음을 얻었다'-즉 '다 섬김을 받았다'는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께서 인간을 섬기시는 섬김의 주요 내용 중 하나가 병고침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24절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니라'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역은 바로 병고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어떤 병자이든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그런가하면 마태복음 14장 34절-36절은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그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예수님께 너무나 많은 인파가 모여들어 예수님께서 환자를 일일이 만져주시기가 불가능할 때,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사람조차도 치유함을 받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8장은 또 다른 경우를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입니다. 로마의 장교였던 백부장이 중풍에 걸린 자기 하인을 낫게 해달라고 주님께 청했을 때, 주님께서는 흔쾌히 환자가 있는 집으로 가자고 응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자기 같은 죄인의 집에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을 감당할 수 없어할 만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그저 자신의 하인이 낫도록 명령만 해주실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의 믿음을 귀하게 보신 주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백부장 하인의 치유를 선포하셨고, 그 시각에 하인은 정말 나음을 입었습니다. 주님의 손길이 환자에게 닿거나 혹은 환자가 주님의 옷자락을 만진 일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 경우였습니다.

주님의 치유는 단순히 병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각별히 사랑하시던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멀쩡하던 나사로가 갑자기 사경을 헤매기 시작합니다. 나사로의 누이였던 마리아와 마르다는 요단 강 건너편에 계시던 주님께 사람을 보내어 급히 와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나사로 형제와 예수님은 그 정도로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을에 당도하셨을 때에는 이미 나사로가 죽어 그의 시체를 장사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사로의 시체를 안치해 둔 무덤-즉 바위 동굴의 돌문을 열어 젖히게 하셨습니다. 그때는 유대지방의 기온 상 이미 시체가 썩어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열린 무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나사로야 나오라'. 그리고 주님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죽은 나사로의 시체가 살아나 수의를 입은 채로 무덤으로부터 걸어 나왔습니다.

이 모든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어떻게 주님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모든 환자가 다 나음을 얻고,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자에게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나며, 주님께서 환자와는 멀리 떨어지신 채 명령만 하셔도 환자가 나으며, 심지어 죽은지 나흘이 되어 썩어가던 시체가 주님의 말씀 앞에서 되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주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에 의한 병고침의 기사가 복음서에 무수히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주님의 사역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할 때 믿음의 요체가 무엇인지 그 핵심을 정리한 것이 우리가 매주일 고백하는 사도신경입니다. 라틴어로 기록된 사도신경 원문은 우리말 번역문과는 달리 '내가 믿습니다'라는 고백으로 시작됩니다. 즉 사도신경에 나타난 내용을 모두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사도신경을 가리켜 '신앙고백'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자 하나님 되심을, 그리고 주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탄생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다면, 그 다음에는 으레 주님의 생애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이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주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셨음을 믿으며,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자도 치유되었음을 믿으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셨음도 믿습니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이 땅에서 베푸신 모든 표적과 기사에 대한 고백이 당연히 수반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도신경은 다음과 같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주님의 탄생에 대한 신앙고백은 웬 일인지 주님의 생애를 훌쩍 뛰어 너머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즉 사도신경은, 그 많은 환자들을 치유하신 주님의 생애에 대하여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철저하게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환자들을 고치셨다 한들 그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주님께는 당연한 일일 뿐 결코 대수로운 일일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 인간의 병약함을 고치시는 것은 조금도 특별한 일일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병자의 치유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종교에 다 있는 이야기이기에, 주님께서 아무리 많은 병자를 낫게 하셨다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예수님의 메시야, 즉 예수님의 성자 하나님 되심의 유일한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이 이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대신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하찮은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치러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제물이 되어 죽어주셨다는 것, 그리고 죽음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시므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은 참 메시야, 참 성자 하나님 아니시고서는 그 누구도 행할 수 없는 구원의 대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도신경의 핵심을 바로 알고 이와 같은 관점으로 마태복음서를 관찰하면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주님에 의해 이루어졌던 그 많고 많은 치유의 기사가 모두 마태복음 16장 이전에 국한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이르기까지 주님께서는 주님을 찾아오는 모든 종류의 병자를 예외 없이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나이나 직업 학력 병의 증세 등을 불문하고 다 나음을 입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6장을 분기점으로 치유의 기사는 사라지고 맙니다. 단 두 번의 예외-즉 마태복음 20장에 여리고의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해주신 기사와 마태복음 21장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소경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셨다는 기사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치유 자체보다는 그 치유를 통해 다른 것을 일깨워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주님께서 이제 곧 세상의 왕이 될 것이라 믿고 그때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 서로 다툴 때, 주님께서는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해주시므로 상대적으로 제자들이야말로 눈뜬 장님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또 예루살렘 성전을 차지하고 있던 장사꾼들을 몰아내신 뒤 그 성전에서 병자를 고쳐주시므로, 성전 된 우리 마음으로부터 온갖 탐욕을 몰아낼 때에만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역사하심을 친히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 두 번의 예를 제외하고는 마태복음 16장 이후에 치유의 기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마태복음 16장을 분수령으로 하여 병 치유에 관한 한, 그 이전과 그 이후가 이처럼 확연하게 구별되고 있을까요? 주님께서 누구신지가 마태복음 16장에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냐?'는 주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베드로의 고백에 의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메시야 즉 구원자시오, 성자 하나님이심이 밝혀진 것입니다. 이때부터 주님께서는 더 이상 인간의 육체를 고쳐주는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그리스도인으로서 져야 할 십자가를,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바르게 살아야 할 진리의 삶을 승천하실 때까지 가르치셨습니다. 육체의 건강 그 자체보다는 영원한 진리 안에서 바르게 사는 참된 삶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당신이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 죽음 속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이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여주실 있는 가장 큰 사랑이었습니다. 유한한 생명의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시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있을 수 없는 까닭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 이후부터는 육체의 치유보다는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기에 합당한 영적 치유에 치중하셨습니다. 육체는 아무리 건강해도 결국엔 쇠퇴하여 흙으로 돌아 가버리는 반면, 진리 안에서 얻는 영원한 생명은 명실공히 영원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 사도가 자신을 통해 일어났던 숱한 병고침의 역사에 대해 철저하게 침묵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바울사도가 주님의 능력으로 많은 병자를 고쳤음을, 심지어는 죽은 유두고까지 살렸음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을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하여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자는 바울의 수행자였던 의사 누가였습니다. 누가는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바울을 통해 얼마나 많은 병자가 나음을 입었는지 그가 목격한대로 기록하여,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사도행전으로 남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무려 신약성경의 3분의 1을 기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통해 일어난 병고침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치 않았습니다. 굳이 예외를 찾는다면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자기 자신의 지병에 대해 이야기한 것인데, 병이 나았다는 것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간절하게 기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낫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지병 때문에 주님 앞에서 늘 겸손하게 살 수 있음을 감사하며 고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무려 130 여 페이지에 달하는 바울서신은 모두 그리스도인으로 져야 할 십자가와 바른 삶에 대한 권면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바울 역시 육체의 건강 그 자체보다는 영원한 생명의 삶이 더 중요함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우리의 신앙은 늘 마태복음 16장 이후로 정진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병고침에 관한 한 마태복음 16장 이전이 육체 지향적이라면 16장 이후는 십자가와 부활 지향적이요, 우리를 영원한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것은 후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대 의학으로 고치기 힘든 지병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나아간 자는 다 나음을 입었다는 오늘의 본문과 같은 성경구절을 대할 때 그냥 지나쳐버려야 하겠습니까? 이런 것은 마태복음 16장 이전 수준에 불과할 따름이라며 백안시 해버려야 마땅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병고침에 관한 무수한 기사가 등장하는 마태복음 1장부터 15장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서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믿고 나아간 자는 다 나음을 얻었다는 사도행전 본문의 말씀 역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의 일부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구절을 하찮은 것으로 지나쳐버리거나 백안시한다면 그것은 신앙의 교만이요, 반면에 마태복음 16장 이후로 나아가지 못한 채 평생 이런 구절에만 매달려 있다면 그것은 신앙의 미숙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과 같은 구절을 접할 때마다 믿음으로 우리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하되 그 결과는 철저하게 주님께 맡기고, 설령 사도 바울처럼 병이 낫지 않는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 상황을 주님께서 주신 더 유익한 영적 환경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신앙은 마태복음 16장 이전이나 이후에 편향됨이 없이 마태복음 28장 전체가 한데 어우러지는 전인적인 신앙으로 성숙해 갈 것입니다.

성경은 총 66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총 분량은 무려 1,754페이지에 달합니다. 성경의 각 페이지가 2단으로 조판되어 있음을 감안한다면, 일반 책으로는 3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해당됩니다. 쉽게 말해 웬만한 소설책 10권 이상의 방대한 분량입니다. 성경 전체의 절수를 다 합치면 물경 31,173절이나 됩니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이 방대한 분량의 성경말씀 중에서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위하여 특별히 주신 말씀은 사도행전 5장 12절-16절, 불과 다섯 절에 걸친 짧은 말씀입니다. 성경 31,173절 중에서 이 다섯 절과 만날 수 있는 확율은 1/6,235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주님을 믿고 나아간 자는 다 나음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필이면 이 말씀을, 1/6,235의 확율에 불과한 이 말씀을 특별히 우리에게 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로 하여금 이 말씀을 믿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치유해주시기를 원하는 분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이 말씀을 온전히 믿는 우리 모두로 하여금 다 나음을 얻게 해주시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가운데에는 붙잡을 주님의 옷자락이 없습니다. 우리를 덮어 줄 사도 베드로의 그림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반드시 누군가 특정인의 손이나 옷을 붙잡아야만 합니까?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주님의 옷자락은 없지만, 베드로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살아 계신 우리 주님의 영이 지금 우리 모두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손을 주님께 드릴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손을 당신의 도구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마치 갈릴리의 어부였던 베드로의 거칠고 볼품없는 손을 당신의 도구로 삼으셨 듯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 모두 믿는 마음으로 눈을 감으십시다. 그리고 각자의 손을 자기 몸 가운데 가장 병약한 곳 위에 올려놓읍시다. 평소에 강건해지기를 원하던 바로 그 부위에 손을 얹으십시다. 가족 가운데 심한 지병을 앓고 계신 분이 있으면, 나머지 가족들은 그분의 환부 위에 자신의 남은 손을 함께 올려놓으십시다.

그리고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기도 드리십시다.


사랑의 주님!

오늘 본문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본문의 말씀을 온전히 믿게 하심을 감사 드립니다.

이제 우리 모두 이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의 손을 우리의 환부 위에 올렸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손을 우리의 손 위에 덮어 주시옵소서. 마치 베드로에게 그렇게 하셨듯, 지금 우리의 손이 주님의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치유의 능력을, 주님의 회복의 능력을 이 시간 쏟아 부어 주옵소서. 본문의 말씀처럼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이 다 나음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하루가 본문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날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내일, 사도 바울처럼 결과를 감사히 수용하게 하옵시고, 우리의 신앙이 마태복음 16장 이후로 중단 없이 나아가게 하옵소서.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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