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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파리 떼로 해를 받더라 / 출 8:20-24, 마 25: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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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 이성희 담임 목사 (연동교회)
제 목 : 파리 떼로 해를 받더라
본 문 : 출 8:20-24, 마 25:31-33 
 
 
어느 신문의 독자 투고란에 다음과 같은 글이 올랐습니다. "나는 지금 어느 여자와 동거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결혼을 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결혼할 의사가 조금도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그런 말들은 제발 빼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그 글에 대한 답변이 다음과 같이 실렸습니다. "선생님의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인간과 동물과의 차이는 도덕성에 있다고 믿습니다. 선생님의 입장에서 조언을 받기를 원하신다면 가축병원 의사에게 문의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 도덕을 저버리면 인간이 아닌 동물입니다. 거룩함을 잃어버리면, 성도가 아닌 그냥 인간입니다. 사람과 동물의 분명한 구별이 있듯이 성도와 인간도 분명한 구별이 있습니다. 성도에겐 기쁨의 이유에도 슬픔의 이유에도 거룩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도라고 부르는 이유는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도라는 말의 뜻이 구별된 자입니다. 평신도로서 부엌의 성자라는 별명을 얻었던 로랜스형제는 하나님의 임재의 축복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의지에 거룩한 사랑의 불을 질러 우리로 세상에서 분리된다는 것의 기쁨을 알게 해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때에 세상과의 완전한 분리가 가능합니다. 세상과 완전하게 분리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소식입니까! 우리도 밥을 먹어야 살고, 잠을 자야 살고, 때로는 아프기도 하고, 실수도 하지만 그래도 세상의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고"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17:16에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예수님이 인정하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2:15에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하십니다. 4:4에는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라고 합니다. 4:5에는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음을 말씀합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 살지만 이미 하나님의 나라의 사람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영광입니다. 연꽃은 지저분한 물에서 삽니다. 물은 지저분하지만 꽃은 아름답습니다. 꽃만 봐서는 도저히 더러운 물에 사는 꽃이라고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물밑을 보면 그 뿌리는 맑은 물이 흐르는 쪽으로 휘어져 있다고 합니다. 겉모습은 더러운 물위에 드러내지만 속 모습은 항상 깨끗한 자태를 잃지 않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책망과 재앙으로 가득한 애굽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완전히 구별하여 그 재앙을 면케 하십니다. 이것이 세상을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첫째, 애굽 사람의 집에 파리 떼가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아침에 다시 나일 강에 나가라고 하십니다. 첫 번째 이적 때와 같이 다시 아침에 나일강에서 가서 바로를 만납니다. 아마 이때는 나일강의 범람이 그치고 물이 빠진데 대한 제사시기였을 것입니다. 파리는 '아로브'란 단어인데 과수와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특별한 종류의 파리라고 합니다. 이 파리는 애굽인들이 잘 알고 있는 해충입니다. 그들이 이것을 보기만 해도 진저리가 나는 그런 종류의 개파리 떼였을 것입니다. 이 파리는 사람과 짐승에게 해를 끼치고 심지어 죽게 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땅의 모든 식물들도 갉아먹어 농사를 죄다 망치게 된다고 합니다. 이사야 7:18에는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애굽 하수에서 먼 지경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시니"라고 합니다. 해를 주는 벌레를 말할 때 애굽의 파리와 앗수르의 벌이라고 한 것으로 봐서 이 파리는 해를 주는 벌레의 대명사인 듯합니다. 21절에는 "가득할 것이며"라고 합니다. 파리 몇 마리만 있어도 귀찮아하고 신경이 곤두설 터인데 파리가 가득했으니 어떠했겠습니까? 우선 애굽 사람들이 머리가 돌 정도로 피곤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파리 몇 마리는 재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파리 떼가 가득한 것은 분명히 재앙입니다.

은총과 재앙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적당한 것과 지나친 것의 차이입니다. 비가 적당히 내리는 것은 은총입니다. 비가 넘치게 와서 홍수가 나는 것은 재앙입니다. 해가 적당히 비취는 것은 은총입니다. 해만 비치어 나무가 살지 못하는 것은 재앙입니다. 햇볕만 있는 곳에서는 생명이 살 수 없듯이 어둠만 있는 곳에서도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일년 내내 햇볕만 비치면 사막이 됩니다. 우리 자연을 보면 사실은 벌레가 있는 게 좋습니다. 지렁이가 있는 땅이 좋은 땅입니다. 장구벌레가 노는 웅덩이가 좋은 물입니다. 배추벌레가 있는 배추가 공해가 적은 배추입니다. 복숭아 속에 벌레가 있어야 좋은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모기도 파리도 다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사라진다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은 것입니다. 24절에는 "땅을 해쳤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이 말 때문에 파리가 딱정벌레와 같은 벌레가 아니겠느냐고 합니다. 얼마나 파리가 공격적이든지 파리 떼는 땅까지 다 해쳤습니다. 사람 때문에 땅이 고생합니다. 농작물이 파리 떼로 크게 손상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땅이 해를 받으면 사람이 손해를 보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 잘 보존돼야 사람이 평안합니다. 인간의 샬롬은 피조물의 샬롬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22에는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합니다. 피조물이 탄식할 이유가 무엇이 있습니까? 피조물이 함께 고통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사람 때문에 피조물이 탄식하고 고통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인간에게 의존적입니다. 사람에 따라 피조물은 달라집니다. 편하기도 하고 고통 당하기도 합니다. 부모에 따라 자녀들의 의식이 달라집니다. 남자 만나기에 따라 여자의 삶이 달라집니다. 사람 만나기에 따라 자연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북한의 산들을 보면 그들이 말하는 공원을 빼놓고는 많은 산들이 민둥산들입니다. 사람을 잘못 만나니 자연들이 해를 당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고쳐져야 자연이 고쳐지고 땅이 고쳐지고 물이 고쳐집니다.

둘째, 하나님은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라고 하십니다. 고센도 애굽 땅의 한 부분이지만 하나님은 구별하여 애굽의 재앙을 면하게 하십니다. 구별이란 '페두트'란 단어인데 본래는 구속, 구원을 의미하였습니다. 거룩이란 단어는 '잘라서 떼어놓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베어내다'라는 의미를 가진 고대어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표준적인 것들로부터 따로 떨어져 구별되는 것이며, 탁월하고 비범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거룩하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보다 탁월해지고 비범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탁월하고 비범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권리이자 책임입니다. 토마스 왓슨은 '묵상'이란 책에서 "왜 하필이면 핍박인가?
첫째로, 핍박은 하나님이 내리신 법령이다.
둘째로, 핍박은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시련을 주시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핍박은 위선자들과 참 성도들을 구별해낸다. 위선자들은 감람산까지는 그리스도를 따라가겠지만 갈보리 산까지는 따르지 않을 것이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고통을 당합니다. 심한 고역을 치르고 핍박을 당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야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의 사람이 구별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성도로 하여금 구별되게 만듭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성별 되게 합니다.

고센 땅은 애굽의 삼각주에 세워진 땅입니다. 삼각주에 있기 때문에 비옥하고 농사와 목축지로서는 최적지였습니다. 야곱이 식솔들을 데리고 애굽에 이주했을 때에 바로는 이 비옥한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이 땅은 나일강에 접해 있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 나일강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해를 받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적이며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은총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안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항상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해를 당치 않습니다. 해가 있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해가 우리를 피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 살아도 애굽 사람이 아닙니다. 애굽에 살아도 애굽 사람들이 당하는 해를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에 살아도 세상의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 살아도 세상 사람이 당하는 해를 당치 않습니다. 레위기 20:26에는 하나님께서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세상의 신과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는 거룩해야 합니다. 세상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에스겔 44:23에는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세요.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는 양과 염소를 엄격히 구별하십니다. 얼핏 보기에는 양 같지만 염소라고 왼쪽에 두시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마치 염소 같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양이라고 오른쪽에 두시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과 세상의 사람을 너무나 분명히 알고 계시고 구별하십니다. C. S. 루이스는 말합니다.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천국을 지향하고 얻어야 합니다. 미련한 사람은 둘 다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내 마음을 확정한 기쁨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아예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가장 편하고 기쁜 일입니다. 악인들이 성도들을 미워하는 것은 성도들의 약점 때문이 아니라 거룩함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별되어 사는 것을 악인들은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셋째, 재앙의 목적은 여호와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재앙을 내리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을 벌하시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는 재앙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줄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배반하고 대든다고 맞붙어 싸우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상대할 만한 천하고 낮은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사람의 잘못 때문에 재앙을 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는 재앙이 사람들에게 벌을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닌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벌을 주시기는 것을 즐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에게 벌을 주어 기분 좋아하실 분이 아닙니다. 벌주는 것을 오히려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단지 하나님으로 인정받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으로 인정받으시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20절)라고 하여 여호와를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의 주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과 애굽을 구별하십니까? "세상 중의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고"(22절) 그렇게 하십니다. 누가 그와 같이 하십니까? "여호와께서 그와 같이 하시니"(24절).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나님을 위하여 하십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정하시고 이루십니다. 영광이라는 뜻의 희랍어는 '독사'(doxa)인데 '인정한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며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찬양이나 예배 등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예배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을 인정하는 예식입니다. 첫째, 그 분을 그분으로, 우리를 우리로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과는 완전히 반대란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가장 큰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인생과 같이 식언치 않으십니다.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이 일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구원받아 출애굽할 것이고, 애굽의 백성은 반드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는 말이 72번이나 나타납니다. 여호와를 나타내고 인정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결론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 연극에서 포샤는 세 명의 청혼자에게 자신의 초상화가 들어있는 상자를 고르게 합니다. 세 개의 상자 중 하나는 금인데 그 상자 위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택하면 남자들이 바라는 것을 얻을 것이다." 두 번째 상자는 은 상자이고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택하면 그 사람은 합당한 대가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비사니오라는 남자는 무서운 글이 적혀 있는 납 상자를 선택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누구든지 나를 택하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가장 큰 도전에는 가장 큰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마치 이 납 상자의 글을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인정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선택받은 은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책임도 함께 따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모든 것을 주고 위험을 무릅써야 합니다. 우리의 또 한 주간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선택으로 백성 되고 자녀 된 은혜를 마음껏 누립시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날마다 찬송하며 주님을 높이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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