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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약속 / 마 6:2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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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아름다운 약속
본 문 : 마 6:29-33
설 교 : 박근호 목사 (구미영락교회)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는 '산상보훈(山上寶訓)'이라는 별명이 붙여져 있습니다. '주님이 산 위에서 주신 보물같은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왜 이 가르침이 보물인고 하니 여기엔 하나님의 주옥같은 약속들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복이 있나니', '복이 있나니'로 이어지는 팔복이 그러하고 오늘 봉독해 드린 본문 33절의 말씀이 그러합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말씀입니다. 너무 익숙하다 보니 무심히 지나치는 면이 없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보물을 보물로 여기질 못하고 복을 복으로 누리질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을 더해주시겠다'는 이 약속보다 더 위대한 약속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더할 것이 없도록 인생의 필수품들을 채워주시겠다'는 이 주님의 약속보다 더 아름다운 약속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이 약속을 마치 곧 '부도날 수표'인양 생각하며 자기 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신앙의 성패는 이 말씀의 수용 여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기엔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이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2억, 5억이 아닙니다. '복권 중의 최고의 복권'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의란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행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 의란 바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언제나 연결되어 있고 그분과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어도 그분과의 관계를 끊지 않는 것이 의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그 행위가 의로워도 그분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그건 의가 아닙니다. 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중요합니다. 즉 의를 구한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과 연결된 줄을 붙잡고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므로 의와 믿음은 결코 다른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된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모든 것을 더하여 받을 수 있는 이 복된 삶'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권면하시면서 25절과 31절에서 거푸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런 것들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으로 너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것을 구하는 차원의 삶에 머물러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무얼 말하는 걸까요?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것에 가장 큰 방해가 되는 것,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삶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이 바로 '생활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상실되느냐 하면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에 갇혀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무얼 먹을까, 무얼 마실까, 무얼 입을까'하는 바로 그 현실에 몰입함으로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상실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농경사회는 자급자족시대로 먹거리가 곧 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먹고 마시고 입는 걸 오늘 우리 시대에 적용한다면 바로 돈이 됩니다. 오늘날과 같은 시장경제사회에서는 돈이면 모든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절실한 것이 돈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돈버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한 주간 동안 열심히 경제 행위를 통해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 돈을 향한 인간의 지나친 몰입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르치게 할 위험이 많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무엇 먹을까 무얼 마실까 무엇 입을까' 하는 경제의 노예가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 수도 없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이루어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늘 의식주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 구절을 리빙 바이블(Living Bible)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You give God first place in your life(네 삶의 첫 자리를 하나님께 드리라)..."
그리스도인은 자기 삶의 최우선 순위를 하나님께 두고 그 첫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자입니다. 이 우선 순위를 무시하거나 헝클어뜨린 그리스도인은 가짜입니다. 하나님께 삶의 최우선 순위를 두는 사람만이 이 세상 것의 노예로 살지 않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도구삼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이루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삶의 최우선 순위를 두지 않고서는 이 땅에서 바르게 살 도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삶의 최우선 순위를 하나님께 두지 않았다는 것은 여전히 허망한 욕망의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한다는 것, 하나님께 삶의 최우선 순위를 두고 바른 관계를 맺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삶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합니다. 그럼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걸까요?
우리는 그 대답을 창세기에 나타난 노아의 행적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6:9절은 노아에 대해 이렇게 증거합니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 노아는 하나님께 삶의 최우선 순위를 두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며 산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노아의 삶을 살펴봄으로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6장 5절은 '하나님 보시기에 당시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악의 노예들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더라...' 그런 와중에 오직 노아 한 사람만이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의인이었다는 평점을 받습니다. 이것은 노아가 당시의 세상 풍조에 빠져 있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만약 노아가 여느 사람들처럼 세상 풍조에 빠져 살았다면 그는 결코 저들과 구별되는 의인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세상 풍조로부터 자기 중심을 지켜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풍조에 휩쓸려서는 결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일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탄의 마지막 유혹은 우리로 세상 풍조를 따르라고 꼬이는 것입니다. '이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는데 뭘 그래? 자, 보라구! 다들 그렇게 하고 있잖아! 너만 그리스도인이니? 저 사람은 집사래, 장로래, 그런데 너는 왜 그리 별나니?...' 이게 사탄의 방법입니다. 이 사탄의 방법에 홀짝 넘어가서 '머리 깎인 삼손처럼'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유혹을 단호히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돈 몇 푼 때문에, 그 얄팍한 이익 때문에, 그 잠깐의 쾌락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닌 체면 때문에 양심을 팔고 신앙을 팽개치고 절개를 꺾고 순결을 포기하는 일들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돈'과 '자기중심성'임을 주님은 명확하게 지적하십니다. 재물과 자기가 우상이 되어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세상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소시민적인 일상사에 모두가 눈멀어 살던 그 시대에 노아만은 달랐다는 얘기입니다. 정말 어느 선전의 카피처럼 '다 예라고 해도 아니오 할 수 있는 사람, 다 아니오 해도 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노아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노아에게 그 즉시 그 어떤 보상이 주어졌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남다른 부를 안겨주거나 남다른 삶의 기쁨을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창5:32절에 보면 노아는 오백 세가 되어서야 셈과 함과 야벳을 낳습니다. 노아는 결혼한 직후 바로 자식을 얻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500세가 될 때까지 노아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이건 우리가 예사롭게 보아 넘길 부분이 아닙니다. 노아가 살던 시대에는 자식이 가장 큰 재산이었습니다. 씨족사회는 자식을 많이 둔 사람이 부자요 사회적으로 인정받던 시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노아는 당대의 실패자인 셈입니다. 그런데도 저가 하나님께 완전한 의인이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는 불만과 불평과 서운함이 많을 그런 환경에 둘러싸인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그 어떤 부자, 그 어떤 권력가, 그 어떤 지혜자 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아름답게 가져갔던 것입니다.

이게 그 구체적인 삶의 증거를 살펴보십시다. 의인 노아의 삶을 가장 빛나게 해 주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바로 그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방주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 14절에 보면 그 방주의 크기는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 오늘날 단위로 환산하면 길이가 140미터, 폭이 23미터, 높이는 14미터의 크기입니다. 월드컵을 위해 짓는 축구경기장의 길이가 105미터, 폭이 68미터니까 노아가 만든 방주가 얼마나 큰 것인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그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을만한 재료를 공급해 주셨다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명령만 내리고 노아는 스스로 그 자료를 구해서 방주를 완성해냅니다. 그러니 노아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그 일에 쏟아 부었겠습니까?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는 바로 그 순간부터 오직 그 일에 자신의 인생을 겁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그래서 의인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가는 노아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노아는 방주 속에서 1년 17일, 약 400일 가까이를 머물게 됩니다. 문제는 노아가 머물렀던 그 방주가 결코 편안하고 안락한 곳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동물원에 가보셨다면 사자나 코끼리나 말 곁에 가까이 가면 코를 막아야 합니다. 이 방주는 그야말로 거대한 동물원이었습니다. 그곳은 고통과 괴로움의 현장이었을 겁니다. 아마 우리더러 거기서 1년을 지내라 한다면 정신병자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노아는 그 긴긴 날들을 묵묵히 이겨냅니다.
노아가 어찌 이렇게 인내할 수 있었습니까? 무엇이 그로 이런 인내의 삶을 살게 했을까요? 우리는 그 해답을 히브리서 10:36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인내의 이유와 결과를 말합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약속을 받기 위해서' 인내했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바라보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방주 속에 비록 악취와 소음과 괴로움이 있다 할지라도 지금 방주 밖에서는 물이 말라 가고 있고 찬란한 무지개가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세상의 변화를 믿는 사람만이 인내를 키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내의 발판 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가 더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노아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떠한 은혜를 주셨습니까? 창7:17절에 보면 쏟아지는 비로 인한 홍수로 모든 생명체들이 죽어갑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면 내릴수록 노아가 타고 있는 방주는 점점 더 높이 올라갑니다. 그리고 방주가 올라가는 만큼 노아도 높아집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높이시고 존귀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능력있는 사람들도 차오르는 물을 피하여 높은 곳으로 높은 곳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마차를 타고 달렸을 것이고, 노예를 동원해서 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노아가 저들보다 15규빗, 7미터 더 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공들여 만든 그 방주가 저를 그렇게 높인 것입니다. 그 순종이, 그 인내가 저를 거기에 있게 한 것입니다.
이건 단순한 수치상의 차이가 아닙니다. 그건 바로 생과 사의 차이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센 권력자, 세상에서 가장 넉넉한 부자,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지혜자, 저들이 아무리 높다해도 그곳은 죽음의 자리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들이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저들보다 7미터 위, 그 생명의 자리에 살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과 바른 관계 속에 살아가는 자를 살리시고 높여주시고 존귀케 하십니다. 이런 까닭에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당부하시는 겁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진정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행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즐길까'에 온통 마음 뺏겨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시집가고 장가가고 집사고 차사는 일'에 온통 혈안이 되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패역한 세대에 너를 구원해 주고 높여줄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부와 레져를 삶의 최우선 순위 삼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노아처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재물에 눈멀어 아름다운 약속을 외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중심에 사로잡혀 방주짓는 일을 잊고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해 주시는 은총을 분명 체험할 것입니다.
주님 분명히 약속하지 않으십니까? '그리하면 이 모든 것, 즉 너희에게 그토록 절실한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들을 더하고 또 더해주리라...' 주님은 이토록 아름다운 약속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십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이러한 일상사의 문제로 인해 더 이상 고달파하지 않는 길을 제시해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약속에 아름답게 응답하지 못하는 겁니까?...
주님은 그 이유를 30절에서 이렇게 규명하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굶어죽을 것 같습니다. 궁핍함을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비참해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약속을 받지 못하고 추한 불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꿈은 '태어나서 한번 솔로몬처럼 살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이 땅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려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열왕기상 10장에 보면 솔로몬은 남다른 지혜를 가진 자였습니다. 나라를 부강하게 한 유능한 경세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전장에 나가 한번도 패하지 않은 능력의 전사였습니다. 게다가 천 명의 아내를 거느린 호사가였습니다. 열왕기상 4:22절 이하에 보면 그러한 솔로몬의 하루 양곡이 나오는데 그 목록이 이렇습니다. '고운 밀가루 삼십 석, 거친 밀가루 육십 석, 기름진 소 열 마리, 목장 소 스무 마리, 양 백 마리... 그밖에 수사슴, 산양, 수노루, 날짐승들....' 이러니 어찌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런 솔로몬을 두고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하늘을 나는 새, 들에 핀 꽃, 심지어 풀잎에 비하여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인 삶을 먼저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해주시고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언급한 솔로몬에게서 우리가 배워야할 소중한 교훈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노아도 방주를 짓고 솔로몬도 성전을 지었는데 왜 노아만 의인이라고 인정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짓지 않았습니까? 7년 동안 정성껏 지어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자기가 거하는 궁전은 13년 동안 짓고선 그 안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것은 모두 아버지 다윗이 마련해 놓은 것이었다는 기록을 보면 솔로몬은 오로지 자기 궁전짓는데만 몰두했다는 얘기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노아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했지만 솔로몬은 자기를 위해 무얼 먹을까 무얼 마실까 무얼 입을까 무얼 즐길까 하며 산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참 신앙의 사람도 아니어서 나라가 혼합종교로 전락하는 빌미와 나라가 두 동강이 나는 원인을 제공한 자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입니까? 노아처럼 살 것입니까, 솔로몬처럼 살 것입니까?... 신앙인처럼 살 것입니까, 이방인처럼 살 것입니까?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아름다운 약속을 소유하며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게 밤의 한 경점같은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길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쭈욱 열거한 히브리서 11장에는 아벨도 나오고, 에녹도 나오고 노아도 나오고, 아브라함도 나오고, 이삭, 야곱, 요셉, 모세도 나오고, 다윗도 나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안나옵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그 생명책에 녹명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이 주님의 권면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사십시오. 그래서 아름다운 그 약속이 내 삶에 성취되는 것을 맛보며 잠시인 이 땅의 나그네 인생을 사시다가 영원한 하늘나라로 옮겨가십시오. 그 나라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들이 누리는 내일의 상급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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