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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기에 감사가 있습니다. /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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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여기에 감사가 있습니다.
본 문 : 누가복음 17:11-19
설 교 : 김형준 (동안교회)
 


  차를 급하게 몰고 가던 어떤 운전자가 무인측정기가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을 보고는 속도를 줄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플래시가 터지면서 사진이 찍히는 것입니다. 계기판을 보니 제한속도는 넘지 않았는데 이상하다 하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차를 돌렸습니다. 아까보다 천천히 갔는데 역시 사진이 찍히는 것입니다. ‘그래도 내 몸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데 삼세번은 해봐야지.’ 다시 한 번 돌아갑니다. 돌아가서 더 천천히 지나가는데 역시 사진이 찍혔습니다. 고장 난 무인 측정기라 간단히 결론 내리고 돌아갔습니다. 얼마 뒤에 그에게 벌금 통지서가 세 장 날아왔습니다. 내용인 즉, 안전벨트 미착용.

우리는 이 운전자처럼 자기 나름대로의 행복을 위한 기준을 가지고 인생길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한 인생이란 자기가 생각한 기준과는 전혀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격언으로 남겼습니다. 이 세상에서 현명하게 살고 싶습니까? 모든 사람에게 항상 배우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힘차게 살고 싶습니까? 그러면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게 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게 사는 삶을 사십시오.

세상에서 부유하고 넉넉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유대인의 지혜는 감사 속에 넉넉함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오늘 본문에는 10명의 문둥병자(한센 병)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어느 마을로 들어가셨을 때에 10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멀리서 고함을 칩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라고 말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이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들에게 가던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가는 도중에 자신들의 병이 나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사마리아 출신 한 명의 문둥병자만이 예수님께로 돌아와 감사드립니다.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물으시며 예수님은 문둥병자의 구원을 선포하시는 내용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십자가를 지러 올라가는 즈음에 만난 열 명의 문둥병자를 통해, 오늘 믿는 이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함을 가르쳐주고 싶어 하시며, 그것은 제자들 뿐 아니라 함께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문둥병이 치료되고 이적과 기적이 나타나고 있지만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기적과 이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습니다. 예리한 과학자요 의사인 누가의 눈으로 보는 이 사건은 치유의 기적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감사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성경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조되는 삶은 ‘감사’의 삶입니다. 이스라엘 3대 절기는 지켜지는 형태나 모양이 다릅니다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삶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통해 가르쳐주길 원하시는 감사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기 원합니다.

첫 번째로 누가 감사를 드려야 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열 명의 문둥병자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한 사람의 사마리아 출신 문둥병자를 통해서 감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 문둥병자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문둥병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봅시다. 문둥병은 불치의 병입니다. 병에 걸려도 나을 수 있는 병이라면 그렇게 크게 어려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치료해도 나을 가망성이 없다면 하고 상상해 보십시오. 죽음을 위한 삶이지 삶을 위한 삶이 아닐 것입니다. 암이 무서운 이유는 회복될 가망성이 보이지 않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둥병은 보기에도 흉합니다. 코나 입술이 썩어 들어가면서 떨어져 나갑니다. 손가락도 떨어져 나갑니다. 사람들 보기에 몹시 흉해서 편견과 격리 속에 고통과 아픔을 당하다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성경은 문둥병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당시 무엇인가 부정한 사람, 죄를 지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 받고 그 결과로 몹쓸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로부터 동정 받지 못하는 병이었습니다. 동정은커녕 오히려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었어야 합니다. 마을 어귀에 쫓겨 나가서 동굴에 살며, 가족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으로 생명이 다할 때까지 쓸쓸하고 외롭게 죽어가는 병이 바로 문둥병입니다. 여러분 영화 벤허를 보셨습니까? 주인공의 누이와 어머니가 문둥병에 걸려서 문둥병자들이 거주하는 집단에서 거하던 장면을 보시면 쉽게 상상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삶의 모습을 문둥병에 자주 비유하고 있습니다. 마치 문둥병에 걸린 자처럼 미래와 희망이 없는 삶, 예수님 밖에서는 희망이 없는 인생, 그래서 바울은 죄와 허물로 이미 죽었고 살아있지만 오늘도 죽어가는 인생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치유되지 않습니다. 또한 가족과 이웃과 몸은 같이 있다 해도, 실제 마음으로는 떨어져서 외롭게 살아가는 것이 죄된 우리 모습과 닮았습니다. 사랑한다고 하지만 진실한 사랑이 아닌 자기 이익에 따라 돌아서는 사랑이라면, 여전히 사랑의 미래에 대해 신뢰할 수 없는 두려움 속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가 외모로 볼 때 예쁘고 잘생기셨습니다만 마음의 얼굴을 본다면 상하고 찢어져 흉하게 상한 분들도 많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죄로 인해 문둥병 걸린 사람과 같이 살아가던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우리들이 갖는 새로운 희망와 꿈은 바로 예수를 믿는 믿음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분들, 누구든지 다 문둥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특별히 강조하시는 부분은, 모두 치료함을 받았는데 그 사실을 발견하고 깨달은 한 사람만 돌아와 감사드렸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들 중의 10%를 제외하고는 다들 주님께서 구속하신 그 사랑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 하신 말씀따라 달려가던 병자들은 나음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계속 그들의 길을 갔습니다. 사마리아 출신의 한 사람을 이렇게 부각시키시는 이유는 인생의 여정 속에 자녀 삼으신 하나님을 확인할 때, 문득 멈춰 서서 그분께로 달려가야 함을 알려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갈 길이 바빠서 한 마을에 그대로 계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달려가야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고백을 하기 위해서 주님께로 달려가야 합니다.

또 다른 해석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그 은혜를 다 감사하는 것보다는 그 중에 한가지만을 감사하는 인색한 감사를 드리는 것은 아닌지…….

칼 바르트(Karl Barth)는  믿는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바로 감사에 있다고 했습니다. 참된 구원을 겸손함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이야기한 것입니다.

감사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 번째 차원은 환경적 감사입니다. “지난번 중간고사 때에도 대강 공부했는데 점수가 그럭저럭 나왔어요.” “너무나 예쁜 여학생을 애인으로 만나게 됐어요. 친구 병철이는 그 여학생을 애인 삼으려고 그렇게 따라다녔어도 안됐는데, 저는 커피 한잔에 내 애인 만들었어요.” 일이 잘 풀리는데 대해 감사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안 아프고 건강한 것에 대한 감사 같은 것은 환경적 감사입니다. 이러한 감사만 드린다면, 늘 감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환경 속에서 감사한 일보다는 어려운 일들이 더 많습니다.

다음으로 심리적인 감사가 있습니다. 철학적인 감사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으나 어느 날 가만히 생각해보니 감사한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 한잔 쉽게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화기 계통에 문제가 있어서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있다가 정말 기적적으로 치료가 돼서 수술 후 마시는 물 한 모금에 펑펑 우는 사람 같이, 살아있다는 새로운 깨달음,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이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 등이 솟구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심리적인 감사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신앙적인 감사가 있습니다. 앞의 두 가지 감사와는 상관없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을 수도 있고 견디지 못할 힘든 일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인도하시는 목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사하고 인생의 골짜기와 넘어야 될 강들이 있지만 결국 주님의 인도함 따라 걸어가는 삶의 여정에 불과하다며 늘 감사하는 신앙적인 감사입니다. 이 감사는 전천후의 감사입니다.

이중에 한해를 돌아보며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아파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평과 원망 가득한 나를 향해서 ‘바로 네가 감사해야 할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삶 자체가 주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이 큰 사랑을 받고도 당연하게 여기면서 아홉 문둥이처럼 그대로 걸어가는 사람은 아닙니까? 주님은 그것보다는 그 자리에서 돌아서서 주님을 향해 달려와 감사드리는 자세를 원하십니다. 정신없이 그냥 달려만 가는 것이 아니라 멈춰 서서 하나님께 시간과 물질과 마음을 구별해서 정성으로 예배드리고 예물 드리는 바로 그런 삶 말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언제 감사해야 됩니까? 14절에서 15절 말씀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열 명의 문둥병자가 길을 따라 갑니다. 가던 중에 자기 몸이 나은 것을 봅니다. “너 피부가 이상해졌어. 너 눈썹이 생겼잖아. 코가 생겨나기 시작했잖아. 몸이 변화됐잖아!”  “야! 너도 그래.” 감격했을 것입니다.  문둥병자는 감사했다고 했습니다. 감사는 어떤 때 할 수 있습니까? 현재의 이 모습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할 때는 감사하지 못합니다.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 자신의 모습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 감사를 드리는 것은, 과거의 삶을 돌아보며 과거와 현재에 대해 함께 감사하는 삶이 됩니다. 조금 어려운데 이해하시겠습니까? 성경 말씀대로 설명해 드리면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 ‘항상 감사하라’, 항상[Each case] 하나하나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감사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 삶 자체가 주님의 은혜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라는 또 다른 이유는 감사 속에 어두운 불행을 이겨내는 놀라운 삶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28절에 이 말씀을 이렇게 갈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사랑한다는 의미는 하나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됩니다.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고난이 있다할지라도 어려움이 있다할지라도 개의치 않고 합력하여 선을 이룸을 믿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감사에 대한 말씀을 주시며 지킬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렇게 명령하실 수 있는 이유는, 명령하신 분은 반드시 그 명령에 책임지게 돼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감사하는 것도 가능하도록 이미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감사할 때 감사한 인생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중세 어느 수도원에 이런 글이 있었다고 합니다. 감옥과 수도원은 너무나 많은 환경적인 유사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감옥은 불평과 원망으로 하루를 열어가고 수도원은 감사와 찬양으로 하루를 시작하는데 있습니다. 문제는 수도원이 감사를 잃어버리면 언제든지 감옥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감옥에서 감사를 찾을 수 있다면 바로 그 감옥은 수도원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장로님이 사주신 책 중에 ‘TV동화 행복한 세상’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 중에 미국 디트로이트에 있었던 풍선장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풍선장수 아저씨가 수소가 든 빨간 풍선, 파란 풍선, 노란 풍선을 샘플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이들이 몰려듭니다. “아저씨 나도 하나 주세요.” 정말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그런데 검은 풍선은 팔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흑인꼬마가 아저씨에게 와서 “저 검은 풍선도 하늘도 날아갈 수 있나요?” 질문의 의미를 풍선장수 아저씨는 알았습니다. 갑자기 검은 풍선에 수소를 넣고 다 풀어서 공중으로 날려 보냈습니다. 검은 풍선이 하늘로 날아갈 때에 아이는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칩니다. 풍선장수 아저씨는 어린 꼬마의 어깨에 손을 얹고 “얘야, 이 풍선이 하늘로 날아갈 수 있는 것은 풍선 속에 무엇이 들어가느냐에 달린 것이지 색깔에 따라 날아갈 수 있고 없는 것이 아냐.” 아저씨의 한 마디는 흑인 꼬마의 열등감과 두려움을 다 씻어버렸습니다.

맞습니다.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환경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에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하지 못할 환경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경험들이 계속해서 찾아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이 문둥병자가 문둥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주님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문둥병에 걸리고  어느 날 코가 떨어져 나가고 몸에 이상한 증상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눈물을 흘리며 떠나야만 되는 절박한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서 “아, 인생이라는 것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인생이라는 것 내가 어떻게 구원 할 수도 없구나. 저 사람이 저렇게 고개를 돌리다니 믿을게 없구나. 세상에 의지할 것 아무 것도 없구나. 혼자 태어났다가 혼자 쓸쓸히 죽는 것이 인생이구나.” 처절하리만큼 혼자라는 사실, 이 세상에 의지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보여주라고만 하셨습니다. 이 말을 믿고 달려가는 문둥병자들, 자신과 세상은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만이 하나님 말씀의 귀함과 소중함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잠시 잠깐 지나가는 고통과 아픔 속에서 영원한 세계의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닐 것입니다. 위장된 하나님의 축복이요, 하나님의 사랑일 것입니다. 단순히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을 통해서 인생의 깊은 맛을 알게 되고 깊음 속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십시오. 누군가가 나를 구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겸손함과 절박함을 갖는다면 고통이 불행은 아닙니다. 문둥병이 저주입니까? 그 고난을 통해서 더 깊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받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감사는 어떠한 결과를 낳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감사한 삶을 살도록 명령하셨고, 축복하시고자 하는 의도와 뜻이 있다면, 감사를 드릴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납니까? 누가복음 17장 18절 19절 말씀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오늘 두 가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바로 감사하는 삶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여자로서 남자로서, 혹은 각각 다른 연령으로서, 각양각색의 성격과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모두가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한 가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을까요?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삶의 여정 속에 주님이 영광 받으시는 삶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또 다른 결과는 온전한 구원입니다.

문둥병이라는 병에 걸렸을 때는 반드시 병에 걸리게 된 구조가 있습니다. 환경이 있고 원인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위장병에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의학용어를 잘 못 알아듣는데도 귀찮게 영어로 자꾸 물어봅니다. 물어본 후 의사가 진지하게 약으로 위장병은 나을 수 있지만 당신의 생활태도와 삶의 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병은 재발한다고 얘기합니다. 의사 말대로 위장병이 몇 번 재발했습니다.
 
이렇게 상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내 병이 나았구나. 문둥병으로 인생을 마칠 줄 알았는데, 살 수 있구나. 그 동안 하지 못했던 것을 마음대로 하자!’ 하며 술도 먹고 흥청망청 사는 것으로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위축된 나머지 병의 재발을 조심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병에 걸렸다고 판정 나던 날 “마누라! 너 나를 외면하며 고개 돌렸지. 큰 형님 나한테 그럴 수 있어? 큰 형수 당신이 나한테 그럴 줄 몰랐어! 나를 쫓아내다니. 동생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 그런데 문둥병에 걸렸다고 나를 인간이하로 대접하고……. 그래 이제 나도 너희들에게 복수하는 심정으로 살아갈 거야.” 마음먹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곤고하고 어려운 때 자신을 짓밟은 그 사람은 결코 잊지 못합니다. 본능적으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이 문둥병자 사마리아인이 그랬다면 가정에 돌아가서 더 불쌍한 인생을 살았지 않았을까요? 병에서 치유됐기 때문에 더 불행한 인생을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사마리아 사람은 병이 고쳐진 것뿐만 아니라 병을 고치신 근원자,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오, 내 삶을 만져주신 하나님, 나를 치료하신 하나님,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시고 내 삶을 주님께서 보시고 회복시켜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문제 있는 사람을 심리적으로 치료하고 보내도 그 구조 속에 들어가면 다시 재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동행하신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 치료 후에 구조 속으로 다시 돌아가면 재발하기는커녕 오히려 환경을 뒤집어버립니다. 사람을 바꿔버립니다. 방향을 다 틀어버립니다. 새롭게 삶을 형성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문둥병자가 고쳐주심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는 사실이 바로 온전한 치료를 경험했음을 의미합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렸고, 감옥에도 갔습니다. 자신의 선함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들어갔을 때, 불편한 일이 있을 때마다 형들을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 속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팔려온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구나’ 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 때 요셉은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고,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 형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사랑과 치유는 하나님을 만날 때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며칠 전 <목사님 제 인생이 변했습니다.> 라는 제목의 메일을 하나 받았습니다. 형제는 교회를 다닌 지 17년, 우리교회를 나온 지는 1년 되었는데 바로 두 주 전에 주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등록해 동안 가족이 된 분입니다. 이 분은 고려대 법대 출신입니다. 고시에 합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공부를 하던 중, 군대를 다녀와서 미국에 잠깐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생과 어려움을 겪고 한국에 돌아와 보니 자신이 공부하는 동안 도와줄 것으로 믿었던 어머니 집이 파산하고, 어머니는 중병에 시달리고 계셔서 공부에 대한 생각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그때 자기를 위로하던 한 여인을 만났는데 지금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한번 상처받아 왜곡된 마음은 자신의 불행에 대한 재물을 찾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아내에게 “당신은 내 인생을 망친 사람이야.” 하며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사이는 멀어지고 이혼을 위한 합의별거에 들어갔습니다. 형제가 그런 일들을 겪고, 왜 이렇게 살까 하는 자괴감이 찾아들었습니다. 자신을 군대 보내놓고 집도 아닌 교회에서 주무셨던 홀로되신 늙으신 어머니께 불효처럼 느껴졌고, 자기는 쓰레기처럼 느껴졌다고 메일에서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었습니다. 의지할 것도 없었습니다. 교회에 와서 앉았습니다.

그러던 중 설교가 그의 귀를 울리고, 말씀이 가슴에 와 닿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변하지 않는 자신을 보며 몸부림 쳤습니다. 어느 날 새벽기도에 와서 간절하게 엎드리던 그때 성령께서 찾아주셨습니다.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니, 그 말씀이 귀한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성경을 읽어가며 길을 걸을 때도 울고, 밥 먹을 때도 울고, 그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어여쁜 사람이야. 나도 그 하나님 보신 것처럼 당신을 사랑해. 당신이 나를 미워하고 저주한다고 해도 나는 당신을 축복하고 사랑할 거야. 단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내가 만난 그 하나님을 당신도 만났으면 좋겠어.” 이 한마디는 합의이혼을 전제로 한 별거생활을 끝냈고 갈등을 종식시켰습니다. 그를 찾아와 만나주신 주님을 향한 감사가 형제 마음속에 가득 있었습니다. 글 끝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제가 사랑하게 된 첫 번째 남자가 목사님입니다.’ 남자로부터 사랑 고백을 받는데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저는 어젯밤 아무도 없는 본당에 올라갔습니다. 컴컴하고 적막한 이 본당에서 바로 일년 전쯤 여러분을 만났습니다. 그때로부터 지금 이 시간까지 제게는 두려움도, 초조함도 있었고, 안타까움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염려도 많았습니다. 가득 채운 어둠만큼이나 몹시 어두웠던 제 마음과 지난 시간들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함께 하신 주님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하시며 지금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은 또한 바로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여러분과 동행하십니다. 부족하여도 주님은 우리를 영접하시고 살아야 될 삶의 자리에 놓으십니다.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오늘도 권면 하시는 그 주님.

주님께서 오늘 말씀하십니다. 어디로 달려가십니까? 멈추어 서서 우리에게 일어난 변화를 보며 주님을 향하여 감사와 물질과 시간을 모아 올려드리는 분 바로 그 사람에게 구원은 완성으로 다가옵니다. 온전한 치유로 종결을 맺게 됩니다. 능력의 주님을 덧입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드려야 되는 감사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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