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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지막 때에 할 일 / 벧전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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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마지막 때에 할 일
본 문 : 베드로전서 4:1~11
설 교 : 박조준 목사 (갈보리교회)


이제 모름이 지나면 2001년도 우리의 역사 속에서 영원한 과거로 흘러지나가고 말 것입니다. 작렬하던 태양이 저녁때가 되면서 서산에 기울어져 자취를 감추려는 마지막 순간처럼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 마음마저 듭니다. 한해를 보낼 때마다 입버릇처럼 "다사다난했던 한해"라는 말을 쓰는데 사실 그렇습니다.
특별히 지난 9월 11일 미국에서 일어난 테러사건은 21세기에 들어서 처음으로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말할 것 없고, 그 때문에 미치는 세계적인 영향은 엄청났습니다. 구 소련도 오랜 전쟁 끝에 손을 들었던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게 되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시는 이 땅에 그와 같은 경악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기도해야가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모든 방면으로 점점 어려워져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인정은 점점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사랑이 식어가고 있습니다. 인심은 강팍해져 가고 있습니다. 지난 주초에 저 여수에 다녀왔습니다. 목사님들이 여러분 모이셨는데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세월이 흐를수록 목회 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고 해요. 마지막 때가 되어 오기 때문에 그래요.
사도바울은 마지막때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디모데후서 3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때는 마지막 때입니다. 더구나 유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마지막 때를 기억하며 사는 것은 얼마나 유익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 보면 솔로몬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하면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며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사도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 때가 되었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때에 할 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바이지만 우리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요한 그리고 야고보와 더불어 산에 오르셔서 변화하시는 일이 있은 후 제자들과 산에서 내려오는데 산아래 있던 다른 제자들이 귀신들려 고생하는 아이의 아버지와 시비가 생겼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왜 아이의 병을 고쳐 주겠다고 장담해 놓고 고치지도 못하고 아이만 고생 시키냐고 하면서 언성이 높아 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이가 불쌍해서 고쳐 보려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고쳐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저 입장만 난처해 졌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이 하산하셨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호소했습니다. "선생님의 제자들이 우리 아이의 병을 고쳐준다고 해서 맡겼더니 고치기는커녕 아이만 더 고생시켰습니다. 선생님이 하실 수 있으시면 좀 고쳐주세요." 이때 예수님은 엄숙한 얼굴로 아이의 아버지를 보면서 "할 수 있거든 이란 말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때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 지르며 말했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그때 예수님이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까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정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집에 들어갔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조용히 물었습니다. "우리는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이때 주님의 대답이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능력 있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역사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근신하고 깨어 있어 기도해야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뼈아프게 체험한 일이 있기 때문에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때에 기도해야 능력 있게 살수 있고, 마지막 때에 기도해야 시험에 들지 않고 믿음 지키며 살수가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로, "무엇보다 열심히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왜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머니 머니 해도 머니가 제일이다" 정말 돈이 제일입니까? 돈이면 다 됩니까? 돈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돈 없으면 살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돈 가지고도 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학식도 필요합니다. 권력도 있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받는 은사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지혜와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병고 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 통역함을 주십니다. 이 모두가 다 귀한 은사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방언도 예언도 믿음도 헌신도 봉사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그것이 가정이든 교회이든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왜 사랑해야 합니까? 사랑하는 것은 계명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사랑하면 허다한 죄를 덮기 때문입니다. 사람 치고 허물없고, 죄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면 그 허물과 죄가 가려워져 보이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사랑하면 소경 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사랑은 망원경으로 보는 것이고, 미움은 현미경으로 보는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셋째는,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은사를 받은 대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재능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입니다. 재산이 있고 권세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재능을 가진 것이나 솔로몬에게 많은 지혜가 있은 것이나 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만 합니다.
마태복음5장에 보면 예수님의 유명한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재능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땅을 파고 돈을 묻어 두었던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까지도 그 달란트가 주인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보소서, 당신의 달란트 입니다"하면서 땅에 묻었던 달란트를 주인 앞에 내 놓았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면 달란트를 많이 가진 사람보다 적게 가진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보다 적게 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보다 적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권력이 적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모든 사람이 꼭 같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게 세상에 나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꼭 같은 은사 똑같은 달란트를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하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 하시는 일에 대하여 항의하거나 불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에도 모든 사람이 다 똑같게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모두가 다릅니다.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생긴 것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마음도 다르고, 영혼도 다르고 모두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주장이 다르고, 소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공장에서 틀에 찍어내는 것처럼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다양성을 원하십니다. 사람뿐만 아닙니다. 이 세상에 같은 것은 없습니다. 여기 강단에 있는 꽃도 얼른 보면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꽃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공중에서 내리는 빗방울이나 눈송이 하나까지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다양성을 알게 해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각각 다른 은사를 맡기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사를 맡은 청지기, 다시 말하면 관리인입니다. 청지기나 관리인이나 같은 말인데 관리인이 주인은 아닙니다.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관리인은 맡은 것이 자기 것은 아니지마는 주인 같이 일해야 합니다. 주인의 마음에 들어야 하고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맡은 일을 관리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관리인은 1년에 한번씩 주인 앞에서 계산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 사업이 흑자인지 적자인지 계산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많은 것을 맡은 관리인은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사업에 흑자를 낼 수가 있습니다. 적은 것을 맡은 사람은 그 적은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다섯 달란트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달란트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는 한 달란트를 가지고 활용할 수 있습니다. 작은 달란트를 맡은 사람은 많은 달란트를 맡은 사람보다 힘이 덜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한 달란트가 적다고 해서 그것을 사용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잘못을 범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적은 달란트를 맡길 때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합당한 노력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달란트를 맡겼을 때는 그만큼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공부 적게 한 사람보다 공부 많이 한 사람의 책임이 더 큽니다. 권력 없는 사람보다 권력 있는 사람의 책임이 더 큽니다. 돈 없는 사람보다 돈 많은 사람의 책임이 더 큽니다. 은혜 적게 받은 사람보다 은혜 많이 받은 사람의 책임이 더 큽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맡았느냐 하는 것이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맡은 것 가지고 얼마나 남겼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맡은 달란트에 따라서 계산해야 할 날이 다가 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인 앞에서 하는 계산은 반드시 개인적으로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더러 무엇을 했느냐? 고 묻지 아니하십니다. 여러분 한분 한분을 향하여 "네가 맡은 것으로 얼마를 남겼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 교회는 여러 선교회와 봉사회, 교회학교, 찬양대 그 밖에 여러 기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관이 얼마나 일했느냐? 고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기관이나 그 단체에서 내가 얼마나 일했느냐? 하는 것을 물으십니다. 선교회에서 내가 얼마나 일했느냐? 봉사회에서 내가 얼마나 일했느냐? 교회학교에서 내가 얼마나 일했느냐? 찬양대에서 내가 얼마나 일했느냐? 교구에서 내가 얼마나 일했느냐? 그것을 물으십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주님께로부터 달란트를 받았는데 그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얼머나 남겼느냐? 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흔히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인가나 얻고, 돈이나 벌고, 육신의 향락이나 누리며 살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맡은 것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행한 일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날 심판하실 때 하나 하나 계산하십니다.
적당히 해서 넘겨버리지 않으십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이 행한 모든 미련한 말이 심판 날에 판단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인격이 있고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내 생각, 내가 한 말, 내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은 죄가 크던 작던 각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하여 대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행한 일이 우리 스스로 볼 때는 대수롭지 않게 보일는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는 중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지의 값은 사망입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고 해도 심판 받지 않을 죄는 없습니다.
어떤 죄라고 해도 하나님의 추궁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중요하고 큰 일뿐만 아니라 아주 작고 사소한 일까지도 살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살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실 때는 사람을 보아가며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그 신분에 상관없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세상의 법은 공평하게 하려는 것이 그 이상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검찰이 신뢰를 잃고, 법관이 불신을 당하는 세상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에는 잘못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 해도 맡은 달란트를 계산해야 하고, 장관을 지냈어도 맡은 달란트 때문에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사람에게 분명한 것이 잇는데 하나는 사람이 누구나 죽는 다는 것과,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심판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초란한 오두막엣 사는 사람이나 고급저택에서 호화롭게 사는 사람이나 심판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가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을 심판은 연기 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겠습니다. 만일에 우리에게 우리를 대변해 주실 예수그리스도께서 안 계시다면 심판처럼 무서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 심판에서 면제됩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했습니다. 우리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정죄 받고 죽어 마땅한 우리입니다. 그런데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모든 죄가 전가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은 심판을 면하게 된 것입니다. 왜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어도, 그 사람이 아무리 재산이 많이 있어도, 그 사람이 아무리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이 무서운 심판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우리에게는 큰 축복이 됩니다. 내가 가진 것이 비록 두 달란트 밖에 되지 않지만 이것으로 최선을 다하면 다섯 달란트 맡았던 사람이 다섯 달란트 남겼을 때 받은 칭찬과 똑같은 칭찬과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양적으로 말하면 두 달란트는 다섯 달란트의 반도 못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중에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다섯 달란트 남긴 것이나,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두 달란트 남긴 것이나 하나님은 꼭 같이 보십니다. 다섯과 둘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맡은 것은 분모로 남긴 것은 분자로 보십니다. 그러니까 다섯 받은 사람이 다섯 남겼다는 것은 5분의 5이고, 둘 받은 사람이 둘 남겼다는 것은 2분의 2입니다. 5분의 5나 2분의 2는 다 1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는 똑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 맡은 사람이 아무 것도 남긴 것이 없다면 그것은 1분의 0입니다. 1분의 0은 1이 아니라 0입니다.
그렇습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남겨야 합니다.
학식이 많은 사람은 그 만큼 많은 봉사를 해야만 합니다. 재물이 많은 사람은 적은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있을 때 자기 주머니 채우려고만 하지 말고 좋은 일 많이 해야 합니다.
칼빈이나 루터 같은 사람은 하늘 나라에 가서 얼마나 많은 상급을 받았겠습니까? 이들은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진리를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들입니다.
가령 목사도 큰 교회를 맡아서 수천 수만의 성도들이 심령을 돌보며 일하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농어촌이나 개척교회에서 삼사십명도 못되는 적은 양무리를 위해서 평생을 바친 목사님도 계십니다. 그러면 하늘 나라에 갔을 때 받을 상이 어떨까요? 큰 교회 목사는 많이 받고, 작은 교회 목사는 적게 받나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일에 충성한 사람이나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이나 받을 상급은 꼭 같다고 믿습니다.
달란트 비유에 보면,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과 마찬가지로 확신을 가지고 자기 주인에게 나아갔습니다.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이 말의 내용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해 줍니다. 아무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감사를 하면서 다섯 달란트 받은 이웃을 자주 보았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저 다섯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할 수 있었으면, 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받아 열심히 장사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겼는데 내년에는 얼마나 많이 남길까? 나는 아무리 애써 봐야 금년에 두 달란트 남겨 네 달란트가 되었으니까 내년에는 잘해야 여덟 달란트 밖에 안 될텐데" 이렇게 생각을 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했다면 "하나님, 저에게 큰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을 위해서 더 크게 더 많이 일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했을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아무리 일년 내내 힘써 전도하고, 애써 보아야 두명, 세명 많아 보아야 열명내외 느는 것이 고작 인데, 어떤 교회는 일년에 수백 명씩 늘어나는데 나는 왜 그렇지 못한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대해 주시지 않습니다.
보세요. 하나님이 일꾼에게 주신 상급은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두 달란트 남겼을 때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다섯 달란트 남겼을 때가 꼭 같습니다. 주님의 칭찬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상급에도 차이가 없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 할지어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합당한 상급을 주십니다. 작은 일에 충성된 사람을 보시는 하나님은 큰 일에 충성된 사람도 꼭 같이 보십니다. 하나님은 맡은 일에 충성 하는 것을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상급은 자신이 맡은 달란트를 잘 활용하고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꼭 같이 주어집니다. 만일에 상급에 차이가 있다면 달란트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달란트를 활용하는 사람의 신실성 여하에 따를 것입니다. 다가오는 마지막 때에 '충성된 종'이라 칭찬 듣는 우리 하나 하나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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