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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후회할 선택 / 창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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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후회할 선택
본 문 : 창 13: 1~13
설 교 : 김형준 목사 (동안교회)
 

  1845년 영국 해안에 영국에서 가장 유능하다고 생각되는 선원 138명이 선장인 존 프랭클린을 중심으로 항해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북극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서 꿈을 안고 출항했습니다. 두 배에 나누어 탄 138명의 선원은 사명을 가지고 출항하였지만 다시는 고향 땅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북극 지방에서 이 모습 저 모습으로 흩어져, 얼어서 혹은 굶주린 체 그들은 시신이 되어 발견되었습니다. 그들은 북극 항로를 개척하려는 꿈은 가지고 있었지만, 항로 개척을 위해 준비한 것은 정작 12일간 쓸 연료와 1200권의 장서로 가득한 도서관, 손으로 연주하는 오르간, 장교들과 승무원들이 사용할 도자기로 된 식기, 받침이 달린 세공 류의 포도주 잔과 순은으로 된 접시들이었습니다. 두꺼운 외투 한 벌 준비 못한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출발했지만, 추위라는 어려움이 다가왔을 때 추위를 이길만한 준비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행복과 목표와 꿈을 위해 선택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우리 삶에 나타나는 결과는 오히려 불행과 아픔뿐일 때가 많습니다. 인생이 불행하기 위해서 선택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기로 인해 가족들이 고통 받게 하고자 선택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지만 동기와는 달리 자신이 결정했던 일들이 불행을 가져오는 경우를 나의 삶과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주 아브라함의 지혜로운 선택에 이어서 롯의 어리석고 후회할 선택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내용은 동일합니다.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 재산문제로 분쟁이 일어났을 때 롯을 불러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제 너와 나는 한 골육이 아니냐 우리가 서로 다투지 말자. 네가 이 넓은 들을 바라보고 살 곳을 먼저 선택하라.” 이때 롯이 온 땅을 둘러보니 동쪽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땅이 비옥하고 물도 많고 목초지도 풍성해 보였습니다. 롯은 자기와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동쪽 땅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하게 됩니다. 좋은 의도로 그 땅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이 그와 그의 가족, 함께했던 사람이 모두 망하고 마는 비참함의 시작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어떤 선택을 했기에 롯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었습니까? 풍요로움과 행복을 위해서 선택했지만 빈털터리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내를 잃어버리고 두 딸과 오로지 자기만 살아남으면서, 두 딸은 아버지를 통해서 자식을 얻게 되는 그야말로 쓸쓸한 인생, 비참한 노년을 보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우리들은 행복을 위해서 선택하며 살아가고 앞으로도 살 것 입니다. 그러나 행복을 위해서 선택한다고 하는 것이 그만 불행을 가져오는 선택이 되고 말 때가 적지 않습니다. 바로 롯처럼 말입니다. 후회할 선택이 되어 버린 요인이 무엇입니까?  불행의 씨앗을 담고 있었던 선택,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분별하지 않으면 롯처럼 비참한 인생의 말로를 겪게 될 지도 모릅니다.

  첫째, 롯은 축복의 근원 되는 사람을 떠났습니다. 11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선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지금까지 아브라함과 롯은 함께 살았습니다. 오늘 1절 말씀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올 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함께하여’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 중에 하나는 롯이 계속하여 아브라함과 동행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이제 롯이 아브라함과 헤어질 것이라는 전제가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우리는 함께 있고 싶은 사람과 늘 같이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면 외롭고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늘 함께 하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입니다.

  어제 저는 우리 교회에서 개척한 군인교회인 ‘주향 교회’에 다녀왔습니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섰는데 군인들을 가만히 보니 ‘저들이 떠나 올 때 저들을 떠나보낸 부모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 가득했겠지만 떠나보내야 아들이 자라고 성숙할 수 있기에, 보내기로 한 부모님의 선택이 없었다면 그들은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3년 뒤에는 그들이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인생에 대해서 책임지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결혼한 자녀를 떠나 보내지 못한 부모는 가정 분란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떠나 보내야 할 사람을 떠나 보내지 못할 때 불행의 시작이 되기도 하지만, 떠나 보내지 말아야 할 사람을 떠나 보낼 때 겪는 인생의 어려움도 큽니다.

  롯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을 떠난다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그 이유는 롯에 대한 성경의 기록들은 아브라함이 언약의 대상으로 언급될 때 따라서 등장하는 인물이지 성경의 주체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즉 아브라함을 통해서만 등장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입니다. 롯의 인생을 살펴보면 아브라함을 떠나서는 오늘날과 같은 성장이 있을 수 없었고 오늘날의 풍요로움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 자신에게 있어서 많은 좋은 것의 공급자였음을 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성경적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면 창12장 1절부터 3절까지에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라 하시면서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시고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시겠다 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롯이 단순히 아브라함을 떠난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을 떠났고 복을 스스로 차버린 것이라 가르쳐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눅15장을 보면 아버지를 떠난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들이 철이 들어 보니 아버지란 존재는 돈을 주는 존재로만 느껴집니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와 아버지라는 울타리를 떠나 돈이 가져다 주는 쾌락을 즐깁니다. 하지만 돈이 주는 비참함도 경험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품이 단순히 돈을 주는 그 이상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돌이켜 아버지의 품으로 갑니다. 아버지란 존재는 돈 이상의 존재이며, 가정이 갖는 인생 속의 의미는 단순히 함께 사는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돈이면 다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돈이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번도 보질 못했습니다. 편리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았습니다. 오히려 돈이 있어서 정말 못사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돈이 있다고 땅땅거리며 살던 사람이 이제는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감방에서 밥을 먹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돈으로 인해서 풍요로울 줄 알았지만 오히려 돈 때문에 가족이 나뉘어져서 분열과 다툼만 일어난다는 것을 아십니까?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 것처럼 있기 때문에 겪는 고통과 아픔이 있습니다. 돈은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지만, 잠은 살 수 없고, 돈으로 책은 살 수 있지만, 지식과 지혜는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여자는 살 수 있지만, 아내는 살 수 없고, 돈으로 약은 살 수 있어도 건강은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치 돈은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처럼 믿는 대상이 되어있습니다.

  또한 권세라는 것도 우리 인생에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를 통해서 권세 가진 사람의 말로를 봅니다. 대통령의 아들이었기에 그 인생이 왜곡되고 불쌍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권세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73편 28절 ‘인생의 참 복은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나의 복이라’라고 고백했습니다. 목동이 임금이 되어 온 나라를 통치했던 다윗도 시편을 지어가면서 내렸던 결론이 시편 16편 2절입니다.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라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어떤 중요한 선택을 해야 될 때에 있는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의 선택은 내일의 나를 결정합니다. 과거의 선택이 오늘의 여러분을 만들었듯이 오늘의 선택은 내일의 여러분을 만듭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잘못되고자 선택하는 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을 자초하는 선택의 원리 하나는 복의 근원되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선택을 하는 것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롯의 잘못된 선택의 원인은 탐욕이 그 선택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0~11절을 읽어보면 ‘이에 롯이 눈을 들어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마음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관심이 머무는 곳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롯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물이 넉넉해 보이는 동쪽 소돔성에 그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롯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롯이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목축을 하다 보면 비옥한 땅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선택이 탐욕에 근거하고 있다면 마음에 병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영국 속담에 ‘탐욕은 우리를 소경으로 만든다.’ 라는 말도 있습니다.

  롯이 ‘바라보았다’라는 의미는 단순히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 땅을 정말 사모하면서 의도를 가지고 바라본다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창3장 6절에서도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금하였던 선악과를 하와가 바라봤을 때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도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얼마나 귀하게 여겨졌을까요? ‘저 땅만 가지면 나는 행복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탐욕을 가진 사람의 특징은 첫째로 은혜를 모릅니다. 감사를 모릅니다. 이기적이 되고 자기중심적이 되면서 자기의 결정을 관철시킵니다. 롯을 보십시오. 그는 아브라함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인생을 배웠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돈도 벌고 가족을 다스리는 법도 배웠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복의 근원되는 주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를 보아도 롯이 아브라함에게 감사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삼촌이 먼저 선택을 권했을 지라도 체면상이라도 삼촌 먼저 하기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탐욕이 있는 자는 양보가 없습니다. 자기의 목적을 이루는 곳에만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에 도착해서 외부의 침입을 받아서 가족과 재산이 다 포로가 되어 잡혀갈 때 아브라함은 목숨을 걸고 적은 병사를 가지고 습격해서 롯과 그의 가족을 구출해 줍니다. 그래도 롯에게는 아브라함에 대한 감사가 없었습니다. 탐욕이 있는 자는 주의 일을 하든 세상일을 하든 감사가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자기의 사업 자금 대주기를 바라고 부모를 이용하며, 주지 않을 때는 폭행까지 하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리고 감사가 없는 사람에게는 희생이 없습니다. 섬김과 봉사가 없습니다. 나눠줌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목적만이 남아 있습니다. 내 인생 내 힘으로 살아왔다고 말하시고 싶으시겠지만, 나라가 어려움을 겪을 때에 먼저 살았던 우리 선조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가 누리는 부와 건강과 명성과 지식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간접적으로 그들의 보호함의 은택을 입은 것입니다. 스스로 자랐습니까? 짐승은 태어나자마자 걷기도 합니다만 인간은 절대로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성경에 한 부자가 이야기합니다. 농사를 잘 지어놓고 곡식이 많이 쌓였으니 ‘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기자’ 합니다. 이 짧은 문장 속에 ‘나’라는 단어가 여섯 번 내지 일곱 번 등장합니다. 부자는 햇빛과 물을 주신 하나님과 수고한 일꾼들을 잊은 채 자신의 힘만으로 된 것처럼 착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거두어가시면 모든 것이 끝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은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탐욕은 은혜를 모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감사한 것을 모릅니다. 아내의 수고와 남편의 땀과 부모님들의 희생을 모르시는 분이 있다면 맘속에 탐욕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탐욕은 병든 가치관을 가지게 합니다. 롯이 요단 들을 볼 때에 마치 애굽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보게 되었습니다. 외국에서 풍족했던 삶을 잊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동산같이 보일 정도로 그 땅을 아름답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머리 속에는 ‘저 땅에만 가면 인생이 행복해질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탐욕을 가지고 행하는 사람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이번 일만 잘되면 ......”, “인천에 배만 들어오면......”하면서 매달리는데 이것이 바로 병든 가치관입니다.

  눅12장 15절을 보면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생명이란 의미의 ‘조에’라고 하는 단어는 생물학적인 생명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삶의 질을 의미합니다. 즉, 살아갈 때 갖는 보람과 의미를 함께 이야기 합니다. 참된 기쁨은 소유에 있지 않기 때문에 소유에만 마음을 두고 있는 욕심을 버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탐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소유가 인생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롯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임을 믿고 와서 보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습니다. 기근 때문에 애굽에 갔더니 그 땅은 풍요롭습니다. 후에 아브라함의 신앙적인 깨달음이 있어 다시 가나안 땅에 왔지만 또 다시 기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목초지가 풍성했다면 목자들도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초지가 풍성했으면 하는 소원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고 롯의 마음에 탐심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내 눈에 보기에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인지, 탐심에 의해서인지 검증하지 않으면 행복을 위한다 할 지라도 불행의 시작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옳은 것 인지 검증하시고, 아니라면 아프지만 버리셔야 합니다. 많은 이익이 있을지라도 포기 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요일2장 15~17절을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의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오는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오는 것이라 이세상도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탐욕은 관계를 파괴 시킵니다. 이웃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도 파괴 시킵니다. 탐욕이 있는 사람은 자기를 돌볼 줄 모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필요로 해도 자기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병든 신앙을 갖게 됩니다. 또 하나 탐욕의 결정적인 양상은 무관심 입니다. 안주고 안받고 신경 쓰지 않겠다는 철저하게 소극적인 이면의 모습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에 나는 안 먹고 안주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탐욕에 근거하고 있지 않은지 진지하게 돌아 보셔야 합니다. 무관심은 탐욕이 갖고 있는 모습 중에 하나임을 아시길 바랍니다.

  물질도 필요하고, 권세와 명예도 필요 합니다. 교회의 일을 위해서 내가 할만한 일을 하는 것도 필요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탐욕이 있으면 주의 일이든 세상일이든 관계를 파괴 시키면서 주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선택하는 선택이 여러분의 탐욕에서 나온 것인지 말씀을 통해서 검증해 보시길 바랍니다.

  셋째, 롯의 잘못된 선택은 죄를 너무 쉽게 생각 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과 13절을 읽어보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여기서 ‘큰’ 이란 단어는 ‘매우’ 또는 ‘아주’ 라는 의미로서 사람의 죄악상이 상상을 뛰어 넘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여호와 앞에’, ‘라이후아’라는 단어는 히브리어가 표현할 수 있는 최상급의 극 최상급의 표현입니다. 즉, 그들이 하나님 앞에 망령되이 행하고 여호와의 면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짓밟는 일들을 서슴지 않고 했다는 것을 성경은 이야기해 줍니다. 롯은 처음부터 그것을 알았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롯은 처음부터 소돔과 고모라 땅에 가지 않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쪽의 동편을 택해서 갔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점점 이동하여서 소돔성 안에 들어갔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죄는 암세포와 같습니다. 조그만 포자 하나만 남겨져 있어도 곧 다시 시작되는 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속에 깊게 자리 잡게 되는 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창19장 1절 이후에 가면 소돔과 고모라 성 입구에서 천사들을 맞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옛날에는 성 입구가 모든 사교의 장소였고 외부에서 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사업의 장소였습니다. 롯이 성의 지도자 위치에 서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의 삶이 이미 죄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삶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업 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거래처로부터 이미 부정한 돈을 받은 사람은 새로운 물건, 품질이 좋은 물건이 와도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받은 돈은 이미 자신을 옭아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는 더 심각하게 우리의 삶을 옭아매게 됩니다. 우리의 행동을 조정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 무엇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성경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살전5장 22절에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말씀합니다. 우리의 품성 속에 죄성이 있습니다. 유혹은 우리의 죄성을 자극합니다. 죄는 분별력을 상실하게 합니다. “나만 그런가…… 다 그런데.”, “이번 한번쯤이야.”, “적어도 그 정도까지는 나는 감당할 수 있어”, “나는 분별력이 있어.” 라고 말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젖어 들게 됩니다.

  롯이 어느 정도 젖어 들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천사를 보낼 때 마을 사람들이 좇아왔습니다. 그 사람을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동성연애를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롯이 무엇이라 이야기하는가 보니 “이 사람을 건들지 말라. 대신 정혼한 내 딸 처녀가 있으니 데리고 가서 놀아라” 라고 합니다. 이 말이 아버지가 할 말입니까? 이미 롯의 맘 속에 죄가 한 가치관으로 자리 잡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에도 그와 같은 일이 많습니다. 얼마 전 TV를 보니까 딸 셋을 가진 어머니가 티켓다방을 운영하는데, 티켓 다방의 종업원 중에 그 딸들이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좋아서 하는 일인데 뭘 그래요?” 양심이 마비되었습니다. 병들었습니다.

  여러분 죄는 우리를 그렇게 만듭니다. 가정을 버리게 하고, 하나님을 버리게 하고, 이웃을 버리게 만듭니다.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죄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쉽게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롯이 아내도 잃고 빠져 나왔습니다. 얼마나 외롭고 허전하겠습니까? 술을 먹고 창녀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두 딸들이 알게 되었고, 자신들이 창녀로 가장해서 아버지에게 들어가 동침한 후 자녀를 나았습니다. 그것이 롯의 후손입니다. 죄가 마음 속에 자리 잡으면 곧 생활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생활이 죄 된 줄 모릅니다. 죄의 열매를 먹고 살아가게 됩니다.

  형제에게 화낸 적은 없습니까? 분노한 적은 없습니까? 성경에 형제에게 분노하고 화낸 사람은 살인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음욕을 품은 적이 없습니까? 성경은 그것을 간음한 사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늘 죄를 짓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신학자의 말처럼 “새가 날아다니며 배설물을 싸는 것을 막을 수 없지만 우리 머리에 새 둥지를 트는 것은 우리가 막을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죄 지을 환경이 될 때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회개해야 합니다. 자백의 기도시간에 “나와 하나님만이 아는 은밀한 죄를 계속해서 회개 합니다”라는 기도가 왜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에게 내어 놓을 수 없는 하나님만이 아는 죄를 털어 놓고 빨리 없애 버려야 죄의 영향력에서 우리는 벗어나게 됩니다. 매주일 예배 드리는 이유 중에 하나가 죄로부터 자유하는 보혈의 능력을 우리는 덧입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잘 살아 왔습니까? 인생의 끝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지 않으면 마지막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오늘도 여러분은 선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선택들의 기준이 무엇 입니까? 아브라함처럼 지혜로운 선택을 할 뿐 아니라, 롯처럼 후회할 선택이 무엇인지 잘 깨달아서 저와 여러분의 남은 인생이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가족들이 당신으로 인해 내 인생은 참으로 행복했노라고 고백할 수 있는 복의 영향력이 있는 삶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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