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해방의 목표 / 출 3:7-14

  • 잡초 잡초
  • 320
  • 0

첨부 1



제 목 : 해방의 목표
본 문 : 출애굽기 3:7-14
설 교 : 김형준 목사 (동안교회)
 

    금년 8.15는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 된지 57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민족은 주권 상실이 얼마나 우리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고, 역사를 왜곡시키는지에 대해서 피부로 직접 경험한 그런 백성들입니다. 꽃다운 나이로 전쟁터에서 짓밟힌 우리 정신대 할머니들의 아픔과 상처가 수많은 시간이 지나서 오늘까지도 이야기 되는 것을 보면, 주권을 상실한 민족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소년티를 갓 벗은 그런 청년의 모습으로 군대에 갔다가 끝내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사할린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할아버지들과 우리 형제 자매들을 생각해 보면, 아직도 우리 가운데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악재의 설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국가의 주권과 자유가 짓밟힐 때, 이렇듯 비참한 결과들이 이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이러한 체험이 어떤 한 민족이나 공동체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여정 속에 우리를 구속하는 수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질병 때문에 침상에만 누워 자기 생각과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구속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우리 자신을 구속하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습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습관이 가족과 자신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인 줄 알면서도 습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또 어떻습니까?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들을 바로 자신에서부터 시작해서 여러 사람 가운데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 인생은 어쩌면 자유 상실과 얽매임의 연속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도 원하지 않는 환경 속에 놓여 아픔을 겪으며,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이때 어디 계십니까?” 기도하는 우리 성도들도 적지 아니하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때 우리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 하나님은 어디 있을까요?

      오늘 성경 본문에는 이스라엘을 해방 시키시고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서 인간의 고통과 역사를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구체적으로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하시어 궁극적으로 승리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대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살펴보는 가운데, 삶의 여러 가지 굴레로 인해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들에게 그 굴레가 벗겨지는 시간, 참된 하나님과 만나는 복된 시간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과 아픔을 아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고통과 아픔을 아셨던 하나님은 구속과 굴레 속에 살아가며 고통스러워 하는 우리도 역시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요셉을 통해서 애굽이 위기일 때 구원함을 얻습니다. 요셉에게 고마워하던 애굽의 관리들과 왕들이 다 죽고 난 후,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는 새 왕이 나타났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하는 태도와 모습이 변하게 됩니다. 급기야는 그들을 노예로 삼고 지배하게 됩니다. 그 생활이 무려 430년간이나 지속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7절 말씀,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그리고 9절 말씀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430년간 계속된 학대와 고통, 울부짖음과 아픔 속에서 하나님은 왜 기다리셨을까요? 왜 그 기간 동안 그냥 두셨을까요? 오늘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의 아픔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모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말씀할 때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았다’ 이 표현은 평범하게 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어떤 아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지 마음으로 같이 감당하며, 아픔의 종류가 무엇이고, 무엇 때문인지를 관심과 집중력을 가지고 살펴보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또 ‘그들이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다’ 이 간역자라는 의미는 노예의 지배자, 감독자 그런 의미입니다. 그리고 또  ‘그 부르짖음을 듣고’ 의 ‘듣는다’는 것은 정말 귀를 기울여서 신음소리까지도 다 듣고자 하는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들을 때, 이 단어를 씁니다. ‘내가 보고, 듣고, 그래서 내가 알았다’ 고하는 이 문법적인 구조는 단순히 알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행동을 전제로 한 앎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행동 안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표현을 쓰신 것은 이제 구체적으로 듣고, 보고 구원하기 위해서 행동하기 직전의 모습을 표현할 때 이런 문법적인 구조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셨대요! 이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답니다.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고,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셨다고 증거 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은 1장 14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과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역사가 다 엄하였더라” 자유인으로 살다 원하지 않는 일을 강제로, 벽돌 찍어내고 성을 쌓는 일을 하는데 고통의 원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11절 말씀에 나옵니다. 1장 11절,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바로 자신의 수고와 애씀을 취하지 못하고 다 남들에게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애쓴 것을 빼앗길 때의 우리 마음이 어떻습니까? 사람을 고문하는 방법 중에 고도로 발달된 고문 방법이 이쪽에 있는 돌무덤을 저쪽으로 옮기게 하는 것입니다. 다 옮기면 또 이쪽에 있는 것을 저쪽으로 옮기라고 합니다. 사람은 성취욕이 있는 동물이기 때문에 의미와 목적이 없는 일을 하게 되면 그 속에서 고통을 느낍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말, 나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쓸 수 있다면 고생하고 수고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고 괴롭고 울부짖을 만한 일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수고와 노력이 아무런 댓가도 없고 의미가 없다고 생각 될 때 목적을 상실하게 됩니다. 고통은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있는 것 같지만, 정신적인 것에 있고 나아가 영적인 것에 원인이 있다 하겠습니다.

      430년 동안 그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당하면서 있었다는 사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들으시고 구원의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고통의 원인을 찾아 보면, 요셉과 그들이 행한 일들을 알아주지 않는 새 왕이 나타났다 했습니다. 우리의 고통은 또한 나의 수고와 노력을 알아주지 않을 때 옵니다. 아내가 가정을 위해서 애쓰고 힘쓰는데도 남편이 알아주지 않는다면, 회사가 어려울 때 건강 생각 안 하면서 충성했는데, 영어 좀 못하고 컴퓨터 좀 못한다고 나가라 할 때는 배신감을 느낍니다. 그럴 때 고통이 찾아옵니다.

      상해 군인들, 고엽제로 고생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분노를 느끼겠는가를 생각해봅니다. 지금은 그분들의 역할이 사회적으로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에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 수고하였습니다. 생계비를 더 받고, 덜 받고 하는 문제 보다 목숨 바쳐 수고한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할 때 더 큰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명퇴대상, 추출대상 1위로 등장하는 오십대(사십 대까지 내려갔다고 그러더군요.)가 중동에 가서 그 뜨거운 태양 밑에서 일하지 않았더라면, 월남전에 가서 전투하며 필요한 물질을 벌어들이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렇게 땀 흘려 수고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우리 경제가 이만큼 발전이 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회는 지난날 수고했던 사람을 잘 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는 삶 여기저기에서 고통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것을 디모데후서 3장 1절에서 3절까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고통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다른 일이 아니라 무정하고 무자비하며 감사하는 마음도 없어지고 마음이 조급해 지고 서로 사랑과 격려 그리고 은혜가 없어져가는 그 공간이 어려운 공간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바꾸어 말하면 무의미와 무목적만 있고, 서로 격려와 사랑이 없는 공간과 시간, 용서와 감사가 없는 그런 인간관계, 이것이 바로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에게 있는 고통이 어떤 고통입니까? 우리가 물질적으로 어려움 당하는 것이 고통입니까? 육체적인 질병이 고통입니까? 이것들을 당할 수 있지만, 그러나 거기에 사랑이 없고 격려가 없고 용기가 없고 그리고 나를 알아줌이 없을 때의 외로움이 바로 우리의 고통이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 형편과 사정에 맞게 정말 우리의 입장이 되어 주셔서 상황을 이해하시고 받아들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죄로부터 온 것을 압니다. 죄의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보셨다는 것입니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공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무도 모르는 내 마음, 외로운 그 구석을 누군가 찾아와서 어루만져 준다면 그렇게 외롭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1976년 6월 27일 그리스 아테네 공항을 출발한 프랑스 여객기가 아랍 테러리스트에 의해 납치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102명의 이스라엘 사람이 타고 있는 AIR 프랑스는 당시 유명한 독재자였던 이디아민이 통치하는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착륙하게 됩니다. 동시에 이스라엘 각료는 긴급 소집되어 회의를 하고, 비밀스러우면서 중요한 결정을 내립니다. 후에 이스라엘 수상이 되었던 삼십 세의 내탄야후 대령이 이끄는 특공대와 여섯 대의 비행기가 저공비행하며 적의 레이더 망을 피해서 엔테베 공항에 도착하게 됩니다. 불과 15분 내지 20분 만에 모든 작전을 완수합니다. 특공대원 한 명과 인질 세 명이 살해를 당하고, 테러범들이 사살이 되는 세계가 깜짝 놀라는 작전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엔테베 공항의 작전’이라고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한 기자가 내탄야후 특공대장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이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에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당신에게는 두려움이 없었습니까?” 이때 내탄야후 대령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전 아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나의 동족이 우리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아니면 저들을 구할 수 없다. 정말 저들을 구해야 된다는 그 마음 밖에는 내 마음속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 한마디는 외로운 이스라엘 백성의 가슴을 적셨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과연 민족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일깨워 주는 한마디였습니다. 인질로 잡혀있는 그 절박한 상황들, 두려움, 무서움, 도움 받지 못하고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는 절박한 좌절감...... 내탄야후 대령은 마음으로 느꼈습니다. 그것을 느꼈기에 저들은 생명을 걸고 구출하는 작전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 누구도 관심 갖지 않을 때, 주님께서 어떻게 하면 나를 저주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길까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여러분은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 사랑이 있기에 주님은 행동에 옮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특히 고통 중에 있는 분들, ‘내 힘으로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그리고 오랜 시간 계속 되어서 내 인생이 이대로 끝나는 모양이다. 아무도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분들, 주님께서 우리 아픔을 아신다고 말씀하셨고, 울부짖는 신음소리를 들으셨다 하셨고, 아시고 찾아오시고 구원하실 계획을 분명히 갖고 계신다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는 그 악재 속에 눌려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여러분 6절 말씀,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 곱의 하나님이니라” 인간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 스스로 그 고통을 풀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인간의 고통을 풀어 갈 수 있는 하나님만의 방법과 계획으로 모세에게 다가가신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이 고통과 얽매임 속에서 가장 잃어버리기 쉬운 것은 믿음입니다. 내가 나를 못 믿어요, 남편도 못 믿고, 아내도 못 믿어요, 다른 사람도 못 믿어요, 부모도 못 믿어져요. 그리고 세상 환경도 믿지 못해요. 그래서 삶을 살 용기와 기댈 모든 마음조차도 다 상실해 버리는 것이 오랫동안 속박 속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타나셨어요.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이 말은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면 크게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그 시대가 각각 다 다릅니다. 살아가는 삶의 모습도 다 다릅니다. 그리고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도 다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셨듯이 약속한 대로 그 아들 이삭의 하나님이 분명 되어 주었고, 또 야곱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 그 하나님은, 사람과 환경과 시대를 초월해서 너희들의 하나님으로 된다는 것을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오늘 너희들의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어 줄게’ 라고 선포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과거에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다’ 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신 것처럼 ‘그 역경 속에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어 주리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어 주리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너를 돕는 자가 되리라 내가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도우리라 굳세게 하리라’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그들에게 동일하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도왔던 것처럼 도울 것이요, 이삭과 함께 했던 것처럼 함께 할 것이요, 야곱을 용서하고 야곱을 붙들어 준 것처럼 붙들고 새롭게 만들리라는 약속의 말씀이 선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지칭해서 말씀하신 이유가 또 어떤 것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죄 가운데 있던 불신자였습니다. 그를 선택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를 불러내었습니다. 그는 실수투성이인 사람이었습니다. 주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대단한 존재로 보지만 성경을 계속해서 살펴보면 아브라함은 그렇게 믿음의 조상이 될만한 자질을 갖고 출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만든 것은 하나님입니다.

      이삭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찌 보면 우유부단한 사람입니다. 별로 특별한 특징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그러나 그도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 잘못된 일을 반복해서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이 유약하여 적들이 쳐들어 올 때 우물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가는 유약하고 연약하고 사람을 하나님은 끝내는 붙들어서 약속의 자녀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장자에 대한 개념이 중요한 나라입니다. 아브라함의 장자는 이스마엘입니다. 바로 그 뒤에 태어난 사람이 이삭이었습니다. 야곱보다 앞서서 태어난 사람이 누구입니까, 에서가 아닙니까? 에서가 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택했습니다. 인간성도 별로 좋지 않은 야곱에게. 그러나 하나님이 지명하여 택하고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지명하여 부른 사람, 그 사람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끝내 세워서 하나님 역사에 아름답게 등장되고야 마는 사람으로 만들었던 그 하나님이 바로 ‘나’라고 말씀하고 계신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니 이스라엘 백성이 대단한 민족이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노예에 불과한 민족이었고, 애굽의 휘하에서 보잘것없는 민족으로 알려지지도 않았습니다. 이름 없고, 별 볼일 없는 너희를 세워 나의 언약 백성으로 삼겠다고 주님은 약속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저와 여러분이 과연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 있겠습니까?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학벌이 높습니까, 가문이 좋습니까, 인물이 잘 생겼습니까? 정말 내가 있는 환경이 하나님이 사랑할 만한 성품을 가졌습니까? 한번 살펴 보십시오. 여러분이 모르면 옆 사람에게 한번 물어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께서 정말 축복할 만하신 가치 있는 사람으로 보입니까? 그렇게 한번 물어 보세요.

      저나 여러분이나 별 볼일 없습니다. 세상에 동대문 구청장님도 우리를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보는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미 있게 보실 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약속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내가 구원함을 주리라고 약속하신 그 언약의 약속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을 굉장히 귀하고 소중하게 여깁니다. 신명기 7장 9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 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제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는 하나님” 시편 89편 33절부터 34절까지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파하지 아니하며 내 입술에서 낸 것도 변치 아니하리로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약속은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따라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허물 가운데서 인생의 결론은 죽음뿐입니다. 심판입니다. 지옥입니다. 그것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우리 인생의 굴레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대신 죽으심으로, 죄 사슬을 끊어 주시고 우리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소유하는 백성으로 운명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 약속을 계속 하시는 것입니다.

      고난과 고통 속에 있는 분들, 굴레 속에서 나는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면 이 땅의 굴레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영원히 우리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죄의 문제, 사망의 문제를 주님께서 대신 해결해 주시고,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그것을 붙들기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