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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승천과 재림사이 / 눅 1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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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승천과 재림사이
본 문 : 눅 19:11-27
설 교 : 김형준 목사 (동안교회)
 
 
어떤 비행기가 엔진고장으로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비행기 안에 탄 사람들이 공포와 두려움에 질려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한 사람이 태연스럽게 앉아있는 것을 본 옆 사람이 그 사람의 표정을 살핍니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요?” “나는 목사입니다.” “그럼 잘 됐습니다. 지금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는데 당신이 믿는 하나님께 빨리 기도해서 추락을 모면해 달라고 부탁을 드려보시지요.” 애타게 부탁했습니다. 목사님이 이 사람을 가만히 보더니 “저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비행기가 떨어지고 안 떨어지고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천국 기획국이나 비서실 소관인데 저는 영업파트에 있기 때문에 도무지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저는 실적만 잘 올리면 됩니다. 당신 예수 믿습니까?" 그렇게 질문하더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유머 속에 이 이야기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되는 사람인지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떠나시고 난 이후, 그리고 주님이 다시 재림하시기 전까지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가르쳐 주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열 므나 비유를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 열 므나 비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으러 외국으로 멀리 떠나게 되면서 자기 종들 열 사람을 불러서 한 므나씩 열명에게 나누어 주고 명령을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해라.” 므나라고 하는 것은 요즘 우리나라로 말하면 백만 원 정도 되는 그리 많지 않은 돈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떠납니다. 백성들 중에는 자신들의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노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결국 주인은 왕위를 받아서 돌아옵니다. 돌아와서 종들을 부르고 나누어준 므나에 대해 확인을 합니다. 

첫 번째 사람이 와서 “주인이시여 주인께서 주신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습니다.” 또 한 사람이 와서 “다섯 므나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와서 대답합니다. “주인님은 엄한 분이신 것을 제가 압니다. 심지 않은데서 거두시고 두지 않은데서 찾으시는 분이신 것을 제가 알기 때문에 혹 제가 장사하다가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 두려워 종이에 싸서 두었다가 다시 그대로 갖고 왔습니다.” 그 때 주인이 “이 악한 종아, 네가 정말로 그렇게 하길 원했다면 은행에라도 넣어 두었다가 이자라도 받게 해야 할 것 아니냐.” 그리고 가지고 있는 한 므나를 빼앗아서 더 많은 사람에게 주고, 그 종과 왕 되는 것을 방해했던 사람들을 붙잡아 죽이는 이야기가 바로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와 매우 흡사한 점이 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무언가를 맡겼다는 것과 돌아와서 정산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달란트 비유를 이야기해 주신 이유를 좀 더 자세히 나누어 설명해보면, 하나님께서 인생을 이 땅에 허락하실 때에 사람마다 각각 다른 것을 허락해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물질의 축복으로, 건강으로, 많은 가족들로 등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달란트를 가지고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얼마큼 주님을 기쁘시게 했는가,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았는가를 찾으시겠다고 하는 의미를 이 달란트 비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음악에, 어떤 사람은 미술에 재능을 주셔서 그 음악과 미술을 가지고 얼마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그 재능을 받지 못한 사람보다 더 많이 올려드렸는가 하는 것을 주님이 찾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이 므나에 대한 비유에서는 각각 다르게 주지 않았습니다. 똑같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주었던 사명은 바로 복음을 증거하고 전도하는 것임을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부터 20절까지 말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어떤 달란트를 받았던, 우리가 부하게 살던 가난하게 살던, 여자든 남자든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신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증거하고 주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 땅에 심판주로 다시 오실 때에, 우리에게 찾으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형편에 있었든지 간에 나로 인해서 새로운 역사가 얼마큼 일어났는지 그것을 찾으시겠다는 의미가 오늘 이 므나의 비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살다가 목표를 잃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또한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본질을 잃어버릴 때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속에 주신 다양하고 독특한 달란트를 가지고 주님을 섬겨드리고 봉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 오실 때까지 해야 될 궁극적인 일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신 전도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비유를 통해서 두 가지를 나누어 설명합니다. 주인이 명령했던 명령을 잘 준행하고 그 사명을 잘 감당하여서 복과 권세를 누린 사람에 대한 얘기와 순종하지 못한 사람의 얘기를 함께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이 같은 사명을 받았지만, 우리들 중에도 이 사명을 잘 감당하여서 주님 오셨을 때 놀라운 은혜와 상급을 받을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어떻게 열 므나와 다섯 므나를 남긴 종들은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었을까요? 주님께서 심판주로서 서실 때, 어떻게 해야 우리가 아름답고 귀한 모습의 결실을 남길 수 있을까요?’ 하는 질문에 대한 답과도 같습니다. 

오늘 이 종들이 어떻게 열 므나와 다섯 므나라는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었을까요?

첫 번째로 주인이 명령한 것을 그대로 순종하며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주인의 명령은 무엇이었습니까? 13절 말씀에 주인이 한 므나씩 나누어 주면서 주인이 올 때까지 장사하라는 명령을 동일하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한 므나를 가지고 장사한 사람, 장사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한 므나를 가지고 장사하는 사람입니까?  주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종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한 므나를 가지고 장사하지 않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주인의 말을 자기 임의로 해석하고, 자기 뜻대로 받아들여서 순종치 아니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전도에 대한 사명을 동일하게 갖고 있는 우리지만, 전도에 대한 사명을 순종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줄 아십니까? 주인의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이 순종할 수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저의 어머님이 오셨습니다. 그 때 어머님은 당뇨라는 진단을 받으셨어요. 당뇨가 어떤 병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했습니다. 당뇨는 음식조절을 잘하시고, 야채를 많이 드시고, 운동을 하셔야 다스려지는 병이지 그렇지 않으면 굉장히 어려운 병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는 어머님 오셨을 때 야채로 밥상을 차려드렸습니다. 순간 표정이 이상해지시는 것 같았지만 우리는 정성을 다해 준비해드렸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다하신 다음 “어머니 밖으로 나가시죠.” 해서 산책을 했습니다. 다음 끼니에도 야채를 가득 드리고는 제가 동행하지 않고 “어머니, 여기 미국은 공기가 좋으니까 한번 둘러보세요.”하고는 억지로 나가시게 했습니다. 이틀쯤 되니까 정색을 하시면서 “내가 풀 먹으로 온줄 아냐. 맛있는 음식들이 많은데 왜 풀밖에 안주냐?” 하시는 어머니께 설명을 드렸습니다. ‘어머니, 당뇨란 것이 이렇고요…….’ 했지만 그래도 어머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셨습니다. 할 수 없어 야채 말고도 음식을 조금 드렸습니다.

그리고 저의 외삼촌이 보스톤에 교환교수로 와 계셔서 그 쪽에 어머니를 모시고 갔습니다.  마침 저의 외삼촌의 장모님이 오셨는데 그분이 당뇨가 심하신 분이셨습니다. 식사를 하시는데 작은 밥그릇에 삼분의 일만 잡곡으로 드시고, 반찬도 야채 중심으로 드시더니 또 드시자마자 나가셔서 운동하고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묻습니다. “저 어른 어디가시냐?”  “운동 하러 가시지요.” 갔다 오신 후에 둘러 앉아 대화가 시작됐습니다. 당뇨의 결과와 합병증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얘기하다보니 저의 어머니는 깜짝 놀라셨습니다. 그 다음부터 야채를 드리면 ‘미국에는 야채가 싱싱하고 풍성해서 좋구나.’ 하시면서 달라지셨습니다. 제가 아무리 바른 것을 전해도 그 말을 믿지 않고 실천에 옮기기 않으셨습니다.

들을 수는 있습니다. 제가 전도에 대한 말씀을 하면 여러분은 들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삶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그 말씀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진실한 말씀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에만 가능합니다.

여러분 이 종들의 비유를 한 번 보십시오. 종들은 장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장사를 안 해도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먹여주고 입혀 주기 때문입니다. 만약 장사를 잘 했다고 생각해봅시다.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그 돈이 종의 돈이 되는 것입니까? 종들이 자기 돈으로 가져갑니까? 아니지요. 가져가지 않습니다. 종들은 소유권이 없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도 주인의 것입니다. 그러니 장사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입니다.

그 다음 성경말씀을 보니까 종들에게 영향을 준 일이 있습니다. 주인이 왕 되지 못하도록 더불어 있는 사람들과 함께 방해공작을 했습니다. 그러니 종들의 마음속에는  ‘주인은 왕이 되어 돌아오진 않을 거야. 그리고 당장 내가 장사를 안 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진 않을 거야. 받은 것 그대로 돌려드리면 별 문제 없을 테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전도할 때 한번 보십시오. 전도 안한다고 배가 고픕니까 아니면 벼락이 떨어집니까, 또는 월급을 안줍니까? 실제 신앙생활에 있어 전도를 하는 것과 안하는 것의 차이는 별로 없습니다. 전도하면 어떻습니까? 교인숫자가 늘어나면 여러분 마음속에 ‘목사가 잘해서 부흥한 줄 알 테니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혹 모르겠습니다.

만약 전도 한 사람 할 때마다 백만 원씩 드린다고 하면 정신없이 전도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나에게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이익이 없으면 안하는 것입니다. 전도 안 해도 신앙생활 하는데 지장 없습니다. 게다가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너 전도하냐? 어느새 예수쟁이 됐냐?’ 하는 식의 이야기 등 전도는 왠지 부담스럽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봅니다. ‘자기나 잘 믿지 자기도 못 믿으면서 남이나 전도하려고 해’, ‘소위 믿는다는 사람이 저렇게 행동해’ 이런 얘길 들을까봐 자신감이 없어서 잘 전하려고 하질 않습니다. 그렇게 전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주변에 그와 같은 이야기가 들려도 종들이 주인의 명령을 그대로 실천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인의 말에 순종하는 위치인 종의 신분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이 누군지 자기의 주인이 누군지 분명한 관계 속에서 순종한 것입니다.

어떤 형제, 자매가 연애하는 중에 자매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형제가 저를 만나고 난 이후에도 여러 자매를 만나고 다닌다는 소문이 들리는데 이 형제하고 결혼해도 될까요?” 그래서 “그 형제를 사랑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 “형제를 믿어요?” “제가 믿습니다.” “그러면 믿음대로 행하세요.” 지금은 잘 살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어떤 행동을 선택하든지 별 이익과 손해는 없지만, 그 일을 순종한다는  것은 주님을 주님으로,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신앙고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도 없고, 또 전도 한다고 해서 신앙생활의 놀라운 변화가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전도의 사명을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므나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많은 돈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 우리를 굉장히 부담스럽게 하거나 골치 아프게 하지는 않습니다. 쉽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당장 이익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 전도를 하는 사람은 주위 사람의 시선은 괘념치 않고, 내가 받아 누린 생명의 소중함을 이웃에게도 증거하기를 원하시는 그 주님을 의식하고 순종해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익을 남겼던 종들이 장사를 했다는 것에는 바로 이러한 신앙고백이 기초하고 있음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주인이 명령한 것을 지키고 순종할 수 있었던 종들은 희생적이고 최선을 다하며 모험과 도전을 했던 종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 본문에 16절과 18절에 보면 열 므나와 다섯 므나를 남긴 사람이 보고하는 것 중에 동일하게 ‘남겼나이다’, ‘만들었나이다’ 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말은 ‘장사하라’는 주인의 명령에 상응하는 단어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장사라는 ‘프라그마 투오마이’라는 단어는 부지런한 행위를 말합니다. 열심히 걷고 열심히 움직이고 열심히 노력해서 얻어진 소득이 장사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즉 ‘남겼나이다’, ‘내가 만들었나이다’ 이 말은 주인이 주신 한 므나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고 잠 안자고 피와 땀을 흘리고 희생을 하고 도전을 하고 모험을 해서 돈을 남겼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장사를 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마 장사를 해 보신 분이 많으실 줄 압니다. 제가 장사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사업하는 분 옆에서 3년간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봉제 공장이었습니다. 옛날에 저는 운동권에 있는 학생들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사업하는 분들은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자기들만 배부르고, 좋은 차타고 잘 다니고, 편하게 사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때 저는 모든 사람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사업을 하는 장로님 옆에서 지켜보니 밤잠도 안 자고, 밤늦게 사업 때문에 사람들 만나고, 뛰어다니고, 바이어가 오면 무슨 죄진 사람처럼 그 사람 밑에서 굽실굽실 거리면서 대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음식점을 가면 자기 좋아하는 것을 시키는 줄 아십니까? 좋아하는 음식 제대로 먹어보지도 못합니다. 대접하려고 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다보니까 정말 좋아하는 음식도 못 먹습니다. 수출했던 물건이 되돌아올 때의 그 창백했던 얼굴. 수출 일정 선적을 마치기 위해 밤을 새우고 직원들을 독려하면서 물건을 만들고, 불평 있는 사람 다독거리던 장로님. 자금회전이 안될 땐 피가 마릅니다. 제가 그것을 지켜보니 비싼 음식 먹을 자격이 있습니다. 좋은 차타고 다닐 자격이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인정을 했습니다. 

여러분 남의 포켓에 들어있는 돈을 나오게 한다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공이 들어갑니다. 힘과 노력이 들어갑니다. 전도라는 것은 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라 주님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장사하라는 의미는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부지런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부지런해야 됩니다. 안 믿는 사람보다 부지런히 노력하고 뛰어 다녀야 합니다. 대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눈물과 물질과 시간에 더해 내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다가가지 않으면 그로 하여금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는데 ‘난 상관하지 않는다.’ 하는 태도는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될 분량에 대해서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정말로 한 영혼을 구원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주님께서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때,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겠나이까?’ 할 때 예를 들으신 것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였습니다. 이웃이라는 개념을 설명하실 때, 주님께서는 내가 정말 사랑해야 될 사람을 이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상관없는 사람을 사랑하는데, 그것도 나를 욕하고 저주하고 짓밟는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 도와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기준을 세워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나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인생에 가던 길을 멈추어야 됩니다. 우리가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 연약한 사람,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내일에만 몰두해서 가던 걸음을 멈추어야만 됩니다. 멈춰 서서 그 사람의 어떠함을 바라봐야 됩니다. 병들어 있고 쓰러져 피 흘려 있는 모습을 봐야합니다. 그리고 소리를 들어야 됩니다. 어디가 아픈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지 듣는 귀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아픈 사람의 자리까지 걸어가야 됩니다. 다가가서 어디가 아픈지 만져봐야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포도주를 꺼내서 그 상처에 부어야 됩니다. 물질과 소유가 아픈 사람을 위해서 쓰여야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을 매어야 됩니다. 병든 영혼의 무게로 내 영혼에 부담감이 느껴져야 합니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한 구체적인 짐들이 마음속에 밀려와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귀에 타는 대신 아픈 사람을 나 대신 싣고 치료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서 나의 물질을 지불하는 것, 이것이 돕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전도를 얼마나 하셨습니까? 주님께서 마지막 날 우리 이름을 부르면서 너로 인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몇 명인지 물으실 때, ‘이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십니까? 한번 돌아보십시오. 전도에 대한 부담감이 생기십니까? 나에게 복음 증거하기 원했던 사람이 바로 그 부담감 때문에 복음 증거하기를 중단하고, 순교의 자리도 가지 않고, 바다를 넘어 알 수 없는 미개의 나라 이 한국 땅 대동 강변에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복음을 갖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전도하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쉽지 않게 느껴집니다. 마음의 부담이 많이 됩니다. 그러나 거기서 주저앉는다면 복음은 증거될 수 없습니다. 전달될 수 없습니다. 복음이 증거되기 위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미 주신 이 므나를 사용하셔야 됩니다. 많은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재산과 지식이 없고 그 외 많은 것이 없을지라도, 내게 있는 것 전체를 사용해서 한 영혼을 구하는 일에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고 물질과 시간을 들이고, 그 사람을 생각할 때 밀려오는 영적인 부담감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기도하는 구체적인 삶을 주님은 우리에게 원하고 계십니다.

불과 한 달 전에 온누리 교회에서 60대를 위한 전도훈련을 한 적이 있습니다. ‘부모님들, 연세 드신 어른들은 언제 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지 모릅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에게 육신의 생명을 주시고 양육해 주신 사랑하는 부모님이 지옥 가는 것을 그냥 보고 계시겠습니까? 여러분 부모님의 인생이 다가기 전에 부모님에게 드릴 수 있는 귀중한 선물이 있다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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