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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은 날을 셉시다 / 시 9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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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남은 날을 셉시다
본 문 : 시편 90:1~12
설 교 : 박조준 목사 (갈보리교회)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기도를 읽었습니다. 이 시편은 그러니까 가장 오랜 시편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읽어보는 대로 우리 인간의 무상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무상함을 말하는 것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나 신약시대사도들의 공통된 신념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석양낙조 황혼이 깃든 인생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달과 별들의 빛이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할 때 고요한 마음으로 '사람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으로 자처하고, 자연을 정복하고, 우주를 여행하며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 나가는 인간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도대체 그런 인간이 무엇인가? 를 물어 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많은 철학자들이 한결같이 물어오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어디서 왔으며 무엇 하러 왔으며, 그리고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이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또한 대답합니다. 사람은 공간적으로 말하면 한평의 공간을 다 채울 수 없고, 시간적으로 말하면 밤의 한 정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사람의 일생은 잠깐 지나갑니다.

더구나 이렇게 연말이 가까워오면 이와 같은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저는 40여년의 목회생활을 마무리하고 이 갈보리교회를 후임자에게 맡기려 하는 이 마당에 더욱 이 모세의 기도가 저의 가슴 깊이 젖어듭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이 백성인 우리를 돌아보아 주신 것은 찬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우리를 돌보아 주셨습니다. 지금도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돌아보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왜 모세가 기도의 첫 머리에 이런 기도를 하게 되었을까요?
이스라엘 민족은 450년 간의 긴 세월을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었고, 너무 너무 사는 것이 어려워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저들의 수고를 아셨고, 눈물을 보셨고, 부르짖는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신 것입니다. 극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벌어질 때는 감사 감격하다가도 조금만 힘이 들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지도자 모세에게 시비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고 하나님이 종래 그들을 포기하는 자리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그들의 조상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호호하게 된 것입니다. 가나안땅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말하자면 순례의 땅이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그들의 거처가 되셨습니다. 그들이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이 비록 장막이라고 해도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했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 민족이 오랫동안 종살이하던 속박의 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피난처가 되셨습니다. 핍박과 억압 속에서도 민족의 생명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모세만 하더라도 애굽 땅에서 살아 남을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애굽왕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 땅에서 멸절 시키는 정책으로 이스라엘 사람의 가정에서 아들을 낳거든 산파로 하여금 낳자마자 엎어 죽이라는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 아이가 태어나게 되었고 그 부모는 아이가 하도 순수해서 바로의 명령을 어기고 집에서 숨겨 키웠습니다. 100일이 지나니까 어린애의 목소리가 어떻게 우렁찬지 도저히 더 이상 집에서 숨겨 키울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갈대로 상자를 만들고 역청을 발라 말린 다음 물이 들어오지 않게 해서 그 상자 안에 아이를 넣어 나일강 달 때 밭이 있는데 띄웠습니다.
마친 바로 왕의 공주가 목욕하러 강에 나왔다가 갈대 상자를 발견하고 이 아이는 틀림없이 이스라엘 자손이다는 것을 알면서도 왕궁에서 키우기로 했습니다. '물어세 건졌다.'고 해서 그의 이름을 모세라고 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모세가 태어났고 자랐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이 세상의 풍파와 역경, 고난과 질고가 아무리 많다해도 주안에 있을 때 평안과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평안은 주님 안에서의 평안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도 간증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님은 우리의 거처가 되시기 때문에 어떤 환경이나 처지에서도 평안과 위로가 있습니다. 이 평안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영원히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살았으나 사실은 죽어 가는 중에 있는 피조물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위로도 죽으면 없어질 위로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사람은 하나님이 영원하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3절을 보세요.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다 흙으로 빚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주께서 말씀 한마디로 티끌이 되게 하십니다.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말씀하셨나이다" 인간을 지배하시고 인간을 자시의 마음대로 처분하실 수 있는 불가항력적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죽게 하시는 것은 그가 인생을 자기에게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생명을 받으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모두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도 하시며 죽이기도 하십니다. 전도서 12장 7절에 보아도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러니까 우리의 영혼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말씀했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허무한데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4절에 뭐랬어요?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진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천년이란, 긴 세월을 말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영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나절도 안됩니다. 이미 지나간 때이던, 앞으로 다가올 때이던 천년동안의 모든 사건은 바로 어제 있었던 일, 아니 한시간 전에 있었던 일처럼 영원한 정신의 소유자에게는 언제나 새롭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의 삶이 얼마나 무상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 5절과 6절을 보시겠습니까?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만 자는 것 같으며 아치에 돋는 물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되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되어 마르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쉬지 않고 영원의 바다를 향해 흘러내려 가고 있는 강물과도 같습니다. 그 물 줄기는 끊임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들은 그 물 줄기와 함께 영원을 향하여 흘러가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우리가 매일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을 향해 다가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2002년 12월에 살고 있습니다. 1년 동안 죽음에 더 가까워졌습니다.
어떤 때는 홍수처럼 갑자기 수십명, 수백명, 수천명 전염병의 홍수로 쓸어 가십니다. 어떤 때는 지진의 홍수로, 화산폭발의 홍수로, 전쟁의 홍수로, 기근의 홍수로, 교통사고의 홍수로 쓸어 가십니다. 홍수는 그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사정없이 쓸어버립니다.
노아의 홍수가 그렇지 않았습니까? 방주 밖에 있던 것은 모두 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인생의 죽음이란 바로 끊임없이 닥쳐오는 대홍수인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꿈과도 같습니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무상함을 잘 모릅니다. 잠자는 사람은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다 지나고 난 다음에 라야 인생이 꿈처럼 허무한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모세는 인간을 꽃에다 비유해 표현했습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져버리고 마는 풀의 꽃처럼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처럼, 사실 수에 칠 가치조차도 없는 것이 허무한 인생입니다.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의 풀의 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상하기가 쉽습니다. 노년기는 말하자면 인생의 겨울, 인생의 황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을 시들어버리게 하고 기진 해지게 합니다.

그런데 풀은 여름에 무성하게 자라다가 겨울이 되어야만 시드는 것이 아니라, 한 여름에도 상할 수가 있습니다. 인생도 때로는 질병의 재난으로 인해 때 아니게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습니다. 그가 비록 70의 생을 누리고 80의 건강을 즐긴다고 할지라도 영원 속에 흘러가는 한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오늘 주신 말씀 9절에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 하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빠른 세상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도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이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을 바로 보고 한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z로 호흡하고 있는 것인데 내 쉬고 들이쉬지 못하면 그것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에 칠 가치도 없다는 말이 옳은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인간이란 몹시 흥분했다가 깨고 나면 곧 잊어버리는 꿈과 같고,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어 버리는 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잠깐 보이다가 업어지는 안개'와 같다고 말했고 셰익스피어는 '인생은 걸어다니는 그림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현대 문명의 생활향상과 의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평균 수명이 전에 비해서 많이 연장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의 말대로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공부 많이 한 사람이나 공부 적게 한 사람이나, 권력 있는 사람이나 권력이 없는 사람도 다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입니까? 우리는 힘써 일할 필요도 없습니까?
여기서 모세는 아주 확신에 넘치는 대답을 했습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여기 우리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여기 우리 인생의 참된 안식처가 있습니다. 나그네와 행인 같은 인생, 우리가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데 우리의 갈 곳이 어디입니까? 날은 저물어 가는데 돌아가 쉴 집이 없는 나그네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얼마나 처량합니까? 그러기 때문에 갈곳 없는 사람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에 먹고 마시고 마음껏 즐기자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갈 곳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확신 있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겉 사람이 후패하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겉사람이 후패해지는 것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왜요? 겉사람은 후패해지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겉사람은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이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것을 압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10절에 보니까 "우리의 년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다 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우리가 70년을 살고 건강해서 80년을 산다고 해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고했습니다. 욥기에 보면 "사람이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옛글에도 '수즉다욕(壽則多辱)'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우리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여기에 모세의 중요한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이 기도의 말씀은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우리가 사는 날이 얼마나 짧은가를 올바로 생각할 수 있게 하옵소서"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왜 모세가 이런 기도를 했습니까?


첫째, 시간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문명 비평가 스펭글러가 그의 저서 『서양의 몰락』이란 책에서 이런 지적을 했습니다. "원시인에게 있어서는 시간이란 말은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도 시간 속에서 살았지만 시간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그들이 의식한 것은 공간이었습니다. 공간은 우리의 감각 세계와 같이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공간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입니다.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집을 짓고, 먹고 마시며 사는 것이 현실공간입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도 공간은 의식하면서도 시간을 의식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스펭글러는 말했습니다. 사람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 살고 있지만 시간에 대한 계산을 별로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한 시간 일하고 돈을 얼마 받으면 하루에 얼마 번다는 계산은 잘 합니다. 이것은 사실상 시간보다는 물질에 대한 공간의 계산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일은 반성도 없으며 내일에 대한 깊은 뜻도 없이 사는 것입니다.
참된 인생의 삶은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에 사는 것인데 이 시간을 잘 계산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이 시간을 잘 쓸 줄 모르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남은 날을 셀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의 인생관입니다. 시간을 셀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시간을 귀중히 쓰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바울 편지를 보면 '세월을 아끼라' 했는데 이 말은 '기회를 사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사람에게는 기회가 있는데 기회를 잃어버리는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고, 기회를 잘 잡은 사람은 성공하는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간적인 사람의 말입니다.
시간은 생명입니다. 한 시간이 지나면 내 생명이 한 시간 짧아졌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1년이 지나면 내 생명이 1년이나 짧아 진 것입니다. 돈은 잃었다가 다시 벌 수 있지만 시간을 자나가면 다시 돌이 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나의 남은 날을 계수하는 지혜는 '어떻게 하면 하루도 헛되어 살지 않고 보다 값있게 보람되게 살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날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까? 남을 미워하는 생각을 그대로 품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회개하고 화해해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죽음 앞에 원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밉던 사람, 원수라고 해도 그가 세상을 떠나면 숙연해 집니다. 죽음 앞에서 용서 못할 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하면 나의 의무를 최선을 다해 감당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루 하루를 종말론적인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루 하루를 귀하게, 하루 하루를 보람되게, 하루 하루를 바로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우리가 마지막 날처럼 산다고 해서 계획도 하지 아니하고 경영도 없이 살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 엘몬드는 "우리가 일하는 것은 영원히 사는 것처럼 일하고, 사는 것은 오늘 죽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끝으로, 영원한 세상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70년을 살고 강건해서 80년을 삽니다. 물론 그 이상의 수를 누리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그쯤 살고는 누구나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정확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욕심만 부리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해의 농사가 잘 되었다고 이미 있던 창고 가지고는 모자라겠다고 생각하고 창고를 증축하고 가득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자기 영혼에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배부르게 먹고 편히 쉬며 즐겨라. 창고에는 먹을 것이 얼마든지 싸여 있다" 이렇게 어리석은 부자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 어리석은 자여, 오늘 저녁 네 생명을 데려가면 그 모든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까?
무슨 일을 하던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세상 위해 살지 말고 영원한 세상을 준비하며 삽시다. 그러면 해도 되고 안 해도 상관없는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변하는 세상, 썩어지는 세상, 없어질 세상 위해 살지 아니하고 영원한 세상을 위해 준비하며 사는 지혜 있는 삶, 보람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남은 날이 얼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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